1. 막장 드라마
몇 해 전부터 한국의 드라마에는 '막장 드라마' 라는 해괴한 장르가 생겨났다. '막장' 이라는 것이 어떻게 정의되는지는 몰라도, 내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아주머니들이 욕하면서도 끝내 보는 드라마" 라고 하면, 얼추 의미가 통하려나? 보통 입에서 욕이 나올정도의 드라마라면, 채널을 돌려버려야 정상인데, 욕하면서도 드라마를 본다면, 드라마 제작자가 대단하던가, 인내하는 시청자가 대단하던가 둘 중에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막장 드라마의 구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남녀 주인공은 서로 사랑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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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고보니, 서로 남매였다.
2) 계급이 달랐다.
3) 불치병에 걸렸다.
4)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5) 또 다른 유혹이 다가온다.
6) 기타
보통 이런 스토리는 서양에서는 신데렐라 처럼 고전으로 남아, 현재는 찾기 힘든 형태의 이야기다. 서양에서는 사라진 이야기가 HD 급 화질과 함께 한국에서 꽃을 피워, 수십억의 아시아 사람들에게 수출하고 있다.
막장드라마를 욕하면서도 보는 이유는 극 중에 주인공의 스트레스가 높아질 수록, 시청자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시청자들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극의 내용에 시청자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로 하여금 뭔가 한마디 하고 싶게 만들기 때문. 여기에 독설이 난무하면 금상첨화.
때문에 막장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남녀 두 주인공이 연기를 잘하는 것 보다도 악역이 얼마나 잘하냐에 따라서 흥행이 결정된다.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길가다가 우연히 시청자로부터 돌이라도 맞으면 완전대박이다.
막장드라마에서는 악역이 항상 문제를 주도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선과 악의 대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남과 여가 대칭에 있고, 악역이 축을 맡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축을 이동하여 남녀간의 밸런스를 깨버리는 것이 악역의 임무인 것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패턴의 막장드라마라도 결국 갈등의 본질은 조직의 유지를 위하여, 개인의 사랑이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 가문을 위해서", "우리 회사를 위해서", "우리 나라를 위해서"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스토리가 한국에서 먹히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지도 조직의 논리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2. 사랑하는 문제, 살아가는 문제
사랑하는 문제와 살아가는 문제는 늘 충돌한다. 단지 막장드라마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존재한다.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도 좋단 말이냐?"
그렇다. 사랑과 돈이 충돌하면 보통의 경우 돈을 따르곤 한다. 가난한 이수일보다는 다이아 반지가 있는 김중배가 낫고, 가난한 고학생 보다는 그룹 회장 외동아들이 낫다. 같은 경우라면 남자건 여자건 10명 중에 8~9명은 그렇게 판단한다. 왜 그럴까? 그 편이 스트레스가 적기 때문이다.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의 책 <건투를 빈다>에서 보면, 딱 한구절 인상적인 말이 나온다. '사랑은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렇다. 사랑은 애석하게도 내가 원하는 상대와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노력의 영역이 아닌 거다. 물론 기술적으로 잠시동안 누군가를 유혹할 수는 있겠지만, 의지대로라면 사랑이 아닌 것이다. 눈빛 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이심전심의 세계가 사랑이다.
문제는 돈이나 스펙은 제어가 가능한데, 사랑은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사랑은 지랄맞게도 남녀노소와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그래서 제어할 수 없고, 그래서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니 불확실성의 사랑보다는 확실성의 스펙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살다보면 적당히 성격도 맞게 되고, 그러다 정들면, 어느쪽을 선택하든 다들 비슷해지는 것이다" 라는 결론에 닿는다. 물론 그 결정에 대한 호불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지...
3. 결혼의 조건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은 남녀노소와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 때문에 제어가 불가능하다. 해서 조건 자체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결혼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결혼에는 조건이 있다. 있어야 한다. 만약 결혼에 조건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굉장히 순진한 편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무엇인가? 결혼하는 이유는 모두가 다르겠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녀가 생을 함께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 문제는 끊임없이 문제를 낳는다. 때문에 만약에 결혼을 해야만 한다면, 그 상대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 기준이 바로 '문제해결능력'이 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스펙,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떤 차를 몰고 다니는지, 돈을 얼마나 모아뒀는지,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 연봉은 얼마나 받는지 따위는 그러한 문제해결능력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 돈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돈은 일상에서 생겨나는 상당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있다.
그런데, 만약에 돈이 많은 사람과 결혼했는데, 알고보니 그는 알콜중독자였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문제생산' 인 것이다. 플러스가 되어야 하는데, 마이너스가 된다. 도박에 빠져있다거나, 바람끼가 있다거나 하는 것도 문제해결보다는 문제생산에 가깝다.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해도, 막상 부딛히면 모르는 것 투성이다. 지금까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문제가 해결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사랑 = 내부로 부터 발산, 시간의 에너지, 내부의 문제해결
돈 = 외부로부터 유입, 공간의 에너지, 외부의 문제해결
사랑과 돈은 대칭을 이룬다. 꼭 그렇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랑은 가족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돈은 가족 외부의 문제를 해결한다. 사랑은 남녀로 시작되어 각자의 생활과 관계로 발산하고, 돈은 외부에서 가족 내부로 유입된다. 사랑도 돈도 에너지인 것이다.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 양쪽의 에너지가 모두 필요로 한다. 나무가 뿌리로 양분을 흡수하고, 잎으로 광합성을 하는 것과 같다. 사랑과 돈, 이중 한쪽에 올인하면 에너지가 바닥나서 고립되고 만다. '문제해결' 이라 생각한 선택이 되려 '문제생산' 이 되어버린다.
4. Heart Breaker
이 뿐만이 아니다. 막장드라마에 악역이 있드시, 현실속에서도 악역이 있다. 현실의 악역이 더 지독한 것은 누가 악역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차라리 악랄하게 욕설을 퍼붓고, 독설을 퍼붓는다면 알기 쉬울텐데 말이다. 문제는 사랑과 돈이라는 '에너지' 에서 오거나 관계라는 '밸런스'에서 발생한다.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말하는 논리는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약속" 이라는 것이다. 이거 많이 들어봤을 거다. 이 말인즉슨, 결혼은 조직과 조직의 M&A 라는 것이고, 그것을 위하여 개인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과 기업의 M&A라면 상대 기업의 현재가치와 미래가치를 따져야 한다. 결혼이라면 상대의 스펙을 따져야 한다. 스펙이 가치인 것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넌 잘 몰라서 계산을 못하니, 내가 대신 계산해줄께!" 라며 개입하게 된다. 그런데 그 놈의 계산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쳐준다는 것이다. 돈이나 스펙은 계산기에 넣으면 바로 나오기 때문에 쉽지만, 존엄과 자유와 사랑의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배제한다. 그럴수록 오차범위가 넓어진다.
개인의 문제가 주변 사람이 개입하는 순간 조직의 논리가 작동된다. 개인의 계산서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계산서를 내 놓는다. 그래서 양쪽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교착된다. 주변사람이 개입하는 순간 이미 관계는 훼손되었고, 모두가 달라붙어 저주의 굿판을 벌이니, 혹여 겨우 결혼에 골인한다고 해도 이미 상처를 입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면 주변사람들 한마디 한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그런데 말이다. 비밀을 하나 가르쳐주자면, 그렇게 남의 결혼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정작 자신은 결혼의 실패사례이거나 행복한 결혼생활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패의 아픔이 있기 때문이란다. 실패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계속해서 실패를 답습할 뿐이다. 참고하려거든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를 참고하시라. 공부 못하는 애 답안지 베껴쓰면서 정답을 바라면 안된다.
(전우애로 똘똘뭉친 이외수 부부, 교도소 앞에 방을 얻어 옥바라지 했던 김대중 - 이희호 부부, 어려서부터 죽는날까지 함께했던 노무현 - 권양숙 부부 정도는 되어야지 결혼의 성공사례라 부를만 하지 않겠나?)
5. 행복한 결혼생활
어쨌거나 이런 막장드라마의 데이터가 축적되어 나름의 현명한 방법을 개발하였으니, 그것이 소위 말하는 '연애 따로, 결혼 따로' 인 것이다. "키 작은 남자 = Loser" 발언이 세간이 화제가 되었던 KBS 쇼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152회 방송을 보면서, 나는 문제가 되었던 루저 발언보다도 "연애 따로, 결혼따로"의 논리를 접하는 외국인 미녀들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더 인상 깊었다.
그 중에서도 이태리에서 온 크리스티나 氏는 결혼을 말하면서 사랑을 에너지 개념으로 풀어낸다. 이들은 에너지를 아는데, 한국인은 에너지를 통 못 알아 먹는다. 그들의 눈에는 보이는데, 한국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차이가 표정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의 차이(수평)가 아니라 수준(수직)의 차이다. 어째서 외국에는 없는 문제가 한국에만 있는가?
조직의 가치 > 개인의 존엄 모든 문제의 본질은 이것이다. 개인의 존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은 누구나 바란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뭐가 없으면 무슨 문제가 생기고, 뭐가 과하면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말한 할 뿐이다. 진짜를 말하지 않는다. 시작점과 지향점을 어디에 설정하는가가 중요하다. 행복이 거저 얻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뭘 해도 불행할 수 밖에... 행복이 얻어지기 까지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존엄 > 자유 > 사랑 > 성취 > 행복
행복하려면 성취해야하고, 성취하려면 사랑해야하고, 사랑하려면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로우려면 존엄해야 한다. 단기간에 성취해서 얻어지는 행복은 짧고, 스스로 존엄하면 항상 행복하다. 무엇이 되어서 얻어지는 행복은 잠시고, 무엇을 함으로서 얻어지는 행복은 길고, 존재로 얻어지는 행복은 영원하다.
스스로 존엄하지 못하니까 자유를 경험하지 못하고, 긴시간 사회에서 요구되는 것만 죽어라 해왔고, 그러니 사랑에 대하여 불확실하고, 그러니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가치를 성취하니까 결국 짧게 행복하고, 길게 불행하다. 앞서 사랑은 불확실성이고, 스펙은 확실성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스스로 존엄하면 사랑도 절대평가다.
무엇인가? 존엄하다는 것은 수평적인 차이가 아니라, 수직적인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눈높이다. 예컨대, 태어나면서 사람손에 길러져 단 한번도 다른 개를 본 적이 없는 개가 있다고 하자. 어느날 주인이 집 밖으로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는데, 다른 개를 마주친다면 그 개는 자신을 개라고 생각할까?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분명한 것은 개는 개를 보면 반응한다는 것이다. 왜냐? 눈높이가 같기 때문에... 개의 눈높이를 가지면 개이고, 사람이 눈높이를 가지면 사람이고, 신의 눈높이를 가지면 신이다.
말하자면 존엄을 그런것이다. 내가 존엄하면 존엄한 사람만 눈높이에 들어온다. 삶에 확신을 갖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으로 성취하고, 행복에 닿게 된다. 내 눈높이가 낮으면 이것저것, 개나 소나 다 보이니까 불안하고, 내 눈높이가 높으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가 보이기 때문에 확신을 갖는다. 사랑이냐? 돈이냐? 하는 문제는 상대가치 인 것이다. 절대가치가 있다면 무엇도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 자체로 삶은 미학이 된다.
절대가치 > 수준이 높다 > 의사결정이 단순하다 > 진행이 빠르다 > 결과에 만족한다
상대가치 > 수준이 낮다 > 의사결정이 복잡하다 > 진행이 더디다 > 결과에 후회한다
상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의사결정이 복잡하다. 따져봐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그러면 진행이 더디다. 주변에서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기 때문에, 결과에 후회한다. 가보지 못한 길에 미련이 남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O와 X로 의사결정이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행복이라는 결과가 있어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향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스트레스를 피하려는 선택이 되려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역설을 낳는다. 그 역설의 역설은 존엄이다. 존엄의 가치에서 삶은 미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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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또 쉬운일이 아니오. 인류 보편의 단계에서 코드를 맞추자면 또한 인류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데, 어떤 이에게는 너무도 쉬운데, 어떤 이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오. 7살 어린이에게는 쉬운데, 50살 아저씨 한테는 어려운 일이고, 여행자 한테는 쉬운데, 땅부자 한테는 어려운 일이오.
차별하는 자는 같아도 다르다고 말하고, 존엄하는 자는 달라도 같다고 말하는 것이오. 다름이 곧 같음이오. 그래야 코드가 맞아서 소통할 수 있소. 존엄은 인류의 공동분모를 찾아내자는 것. 소통하면 즐거운 게요. 즐거우면 행복한 게요.
코드가 안 맞는 이유는 안에서 쥐어짜기 때문이오.
내부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데 안에서 쥐어 짜서야 답이 나오겠소?
결국 밖에서 자원을 끌어오면 저절로 코드가 맞게 되어 있소.
예컨대 내가 울동네에서 금광을 발견했다 하면
광산허가는 받았느냐, 환경영향평가는 어떤가 하며 온갖 트집잡는 사람이 백 명 있소.
동네 양아치에 조폭이 달려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 손을 내밀고 공무원이 방해하고 난리도 아니오.
심지어 스님도 문앞에 와서 신경질적으로 목탁을 두드리고 그러오.
그러나 외국 어디에서 금덩이를 실어오면 가만 있어도 손발이 척척 맞소.
정치인도 고개를 숙이고 공무원도 알아서 협조하오.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게 되어 있소.
결국 코드가 안 맞고 소통이 안 되는건
인간들이 밖으로 안 나가고 내부에서 복작거리기 때문이오.
그럼 왜 한국인들은 밖으로 안 나가고 안에서 복작거리는가?
그것은 그 바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왜 그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것은 한국의 총체적인 수준이 창의단계가 아닌 모방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오.
외부라는 것은 물리적 공간 뿐 아니라 이 현장에 없는 것을 의미하오.
즉 창의하면 그게 외부가 되오.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을 만들면 그걸 방해하기가 불능이오.
그걸 방해하려면 아이폰보다 더 좋은걸 가져야 하기 때문이오.
하느님 할배가 와도 스티브 잡스가 하는 일을 방해할 수 없소.
저절로 코드가 맞고 저절로 소통이 일어나오.
왜냐하면 방해하기 위해서는 선점해야 하는데
새로운 아이디어인 경우 선점할 수 없기 때문이오.
결론적으로 한국이 산업에서 문화에서 지식에서 최고가 되어야
존엄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오.
김연아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소.
최고이기 때문이오.
한국사회의 모순이 어제 오늘도 아니고
재벌의 독점, 삼성의 몰락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소.
삼성이 점점 더 자정능력 제로에 가까와지고
나빠지고 엉망되는건 다 아는데
이미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커서
어쩌지도 못하고... 걱정이라고 하지만...
그깟 삼성.. 알아서 망하든 말든.
지들끼리 다 해먹었고 극소수가 독점한다해도
새로운 걸 만들면 되지.
새로운 걸 만들 애들을 키워야지.
여전히 부모가 자식의 결혼에 참견하고 유산을 담보로 자녀의 진로와 친구관계, 결혼문제에까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소. 즉, 막장 진행형이라는 말씀. 부모와 자식의 문제는 대부분 세대간의 문제, 경제적 자립의 문제와 직결되오. 동서고금,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사회적 복지가 달성되지 않으면 여전히 봉건에서 벗어날 수 없소. 혁신만이 살 길.
사랑과 삶은 양자택일이라기 보다는 우선순위의 문제요. 즉, 배고픈 자는 배를 채운 뒤라야 금강산이라도 유람할 마음이 생긴다는거. 왜냐면 삶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오. 사랑을 전개한 것이 삶이오. 욕망의 우선순위에서 생존이 사랑을 앞서고 있으므로 우선 생존을 위해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오. 이것을 뒤집으면 경제력을 가진 여성들이 결혼을 회피하는 이유가 되오.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고된 가사노동과 아이들 양육비, 비싼 물가와 천정부지의 집값, 불안한 고용문제로 요약될 수 있소. 한국 남성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족속들이오. 탁아시설의 부족과 높은 사교육비, 비정상적으로 높은 기초생활비와 집값.. 내가 여자라도 결혼 안하겠소.
사랑과 돈이 대칭을 이루는게 아니라 결혼과 돈이 대칭을 이루고 있소. 결혼과 돈은 비례관계니까. 돈이 있으면 쉽게 결혼 할 수 있소. 그러나 돈이 있다고 저절로 사랑이 되지는 않소. 돈이 사랑의 스포터이자 필요조건인건 맞지만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오. 즉, 돈없는 사람이 사랑에 성공할 확률도 낮지만,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랑을 못하오. 사랑은 자유를 얻어야 가능하지만, 결혼은 성취만 해도 가능하오.
한 사람이 얻은 아이디어를 여럿과 공유하는 것이오.
왕은 왕에게만 아이디어를 알려줄 것이고
귀족은 귀족에게만 알려줄 것이고
노예와는 결코 아이디어를 공유하지 않을 것이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공유할 사람이 없어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사장되는 일이 부지기수요.
좋은 사회는 열심히 삽질하는 사회가 아니라
아이디어의 공유가 가능한 사회이오.
온갖 차별은 아이디어를 공유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오.
한국에서는 그것이 너무 심하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를 둘이 공유한다는 거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