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 약한 쪽 보다는 강한 쪽이 좋을 것이다. 문화의 차이일런지는 몰라도, 이상하게도 일본 만화를 보다보면,' 강하다' 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익히 알고 있는 <슬램덩크>에서도 그랬고, <더 파이팅>에서도 주인공 일보 역시 '강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서 부터 복서의 길이 시작된다. 유독 일본인들이 강하다는 말에 집착하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정말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고, 돈이 많고, 권력을 가지면 강한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강함'은 '약함'의 상대적인 개념이고, 강한 놈 보다 더 강한 놈이 나오면 상대적으로 약한 놈이 되어 버린다. 물론 내가 '이런 것이 강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국어사전의 강하다의 정의로 나올리는 만무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의 답을 찾기로 했다. 그것이 왜 필요하냐 하면, 때로는 어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나오는 강한자의 모습이란,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이나 신체적인 장애, 혹은 주변의 시기와 따돌림 등을 극복하고 끝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휴먼 드라마 였다. 만화가 현실이 되기도 하고, 현실이 만화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 드라마는 힘들게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보내주곤 한다. 그런 드라마가 현실이 되면,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사속에서 그 시대를 진보시킨 사람은 몰락한 귀족이나, 망명한 지식인이 많다. 국가와 국가의 사이에서, 종교와 종교의 사이에서, 계급과 계급의 사이에서 있는 사람. 그리고 최근에는 혼혈인의 성공사례도 있다. (즉 세력에 의지할 수 없는 환경에 있다.)
징기스칸은 망한 부족의(부족장의) 아들 이었고, 미국을 세운 사람들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망명한 사람들(필그림)이었다. 강하다는 말 자체는 상대적이지만, 역사 속에서 시대의 진보를 이끈 사람들의 일정한 패턴은 어떤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시대의 진보를 이끌어 낸, 인류를 좀 더 자유롭게 했던 사람들에게서 그런 강함의 절대성이 있다고 정리하였다. 관성으로 움직이는 시대를 전환시킨 힘이 비로소 강함이고, 그것은 역사에 고스란이 남겨져 있다. (모든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와 인간의 자유도가 확산되는 계기를 말함.)
2. 약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2,500여년 전 싯타르타 부처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고, 모든 고통은 욕망에서 나온다. 욕망을 제어하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인류의 자유도를 높이는 방향이 진보라고 한다면, 부처는 인간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욕망에 있다고 한 셈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하자면 '두려움' 역시 인간을 구속한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 <범죄의 재구성>은 사기꾼에 관한 이야기. 그 영화 말미에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 알면, 사기칠 수 있다는 메세지가 나온다. 그렇다. 욕망과 두려움으로 인간은 제어된다. 그리고 힘이 세건, 싸움을 잘하건, 돈이 많건, 권력을 가졌건 욕망과 두려움에 제어되는 사람은 약하다. 약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금방 밑천이 드러난다.
이런 현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도박판이다. 어떤 사람은 욕망에 이글이글 타올라, 또 어떤 사람은 불안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배팅을 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높아질수록 주술적인 힘에 의지하고, 우연성에 기대해보지만 결국 인생을 말아먹는다. 반면에 설계사, 타짜는 기술과 시스템으로 필연성으로 남의 인생을 말아먹는다. 타짜가 좋다 / 싫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두려움이 합리적인 사고를 못하게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길다. 제법 길다. 그리고 점점 더 길어져서 이제는 인간 수명이 90세 까지 산단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인생은 짧은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인생이 짧다고 말하는 진짜 이유는 그만큼 쓸데없는 시간을 많이 보내기 때문이다. 초, 중, 고, 대학교에 이어서, 어학연수, 대학원까지 갔다오고 30세 전후에서야 회사에 입사해서 오래 일해봤자 50 세 까지다. 20년 일하겠다고 20년 공부를 하고, 나머지 수명의 40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고민에 고민을 한다. 그리고 기껏 고민의 끝이 통닭집 정도다.
물론 게 중에 기업인으로, 통닭장사로, 조직의 고위직으로 성공한 자도 몇 있겠지만, 대부분 그 성공케이스를 위하여 또 많은 사람들의 수십년 시간의 희생이 이어진다. 왜? 두려우니까...줘 패가면서 공부시키고, 옆집 아이가 영어학원 가면 우리애도 보내고, 옆집 아줌이 자동차를 샀다고 하면, 기어이 나도 사야 한다. 왜? 두려우니까...
욕망, 두려움(압력) > 스트레스 > 판단을 타인에게 양도 > 주술, 세력에 의지 > 인생무상
있는 사람은 욕망 때문에, 없는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스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주술(종교, 샤머니즘)에 의지하거나, 세력에 편승하려고 하고, 비로소 안도한다. 그러나 결국 삶은 피폐해진다. 비 과학적으로 판단하고, 비 효율적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약하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 세력에 의지하려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또한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무한 시간을 투자해, 무한 경쟁을 한다. 그건 약하기 때문이다.
3.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역사를 진보시킨다는 것은 창의를 한다는 것이고, 창의를 하려면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후회없이 행동하는 것이 삶을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다. 문제해결능력은 삶의 효율을 높인다. 그런 사람이 강하고, 강한 사람이 역사를 진보시키고, 인류를 더 자유롭게 한다.
어쨌거나 삶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채워나가야만 하는 것. 태어난 그 자체에 불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삶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의 스스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그 삶이 행복하건, 불행하건, 성공하건, 실패하건은 별개의 문제다.
만약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신과 나의 대립이다. 신이 처음부터 인간을 욕망과 두려움에 취약하도록 디자인했으니,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삶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신과 대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인류차원의 진보가 일어나고 비로소 신과 소통한다. 강한 개인은 그렇게 탄생한다.
세상의 창, 생각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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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능형인간.
공변형인간.
접촉 > 인지 > 판단 > 행동 > 결과
매사, 구조의 축이되는 판단을 스스로하면 강하고, 판단을 남에게 맡기는 사람은 약하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오.. 축을 중심으로 상위 포지션과 하위포지션이 나뉘기 때문이고, 스스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반증. 욕망과 두려움에 휘둘리는 것은 구조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오.
요는 자기 삶의 주도권이 강함과 약함을 결정한다는 것. 팀플레이는 세력에 의지함이 아니라, 이심전심으로 유기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것.
이다 아니다 수준에서 논해야.
욕망의 재정비화를 통해 '이다'를 성취할수 있지만,
작금의 글로벌 다단계화에서는, 욕망의 재정비화만 있을뿐,
야성이 숨쉴공간이 전무.
그러다보니, 그 정밀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이모양이꼴.
운명이다 - 생명력이 있다 - 주도한다 - 성장한다 - 이긴다
운명이다를 읽었소. 진보의 미래도 봤소.
너무 몰랐소. 정말 무지했던 나를 발견하고 놀라고 창피했소.
노무현 대통령은 강백호 같기도 하고, 드래곤 볼의 손오공 같기도 하오.
자꾸자꾸 진화했소. 끝까지 진보를 향해 돌진했소.
세상을 발견한 후 항상 갈등의 현장에 있었고, 변화의 첨단에 있었소.
항상 낭떨어지 끝에서 오롯이 발끝으로 세상을 주시했소.
책 속에 숨어 노닥거리지 않고, 전장의 하루하루로 책을 써 냈소.
공부한답시고 깝쭉거린 나 자신이 부끄럽소.
그 처럼 사는 것을 공부로 삼겠소.
-언놈들은 날 바보로 알드만 -
일본은 예로부터 인구과밀국가였소. 극심한 인구스트레스가 있었소. 막부시대 동경인구가 200만인데 그 중 70프로가 남자였소. 대부분의 남자는 장가를 못간다는 뜻. 여아살해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오. 일본 남자들이 '강하다'고 외치는 것은 '장가가고 싶다'는 뜻일 뿐이오.
제가 주장하는 강한 개인은 이 사진처럼 되지 말자는 의미라오. 왜 자빠졌는지 모르지만 이 동네에서는 대략 자빠져야만 대접을 받는가 보오. 아마 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자빠짐 초식을 구사한 모양이오.
강하다는 것은 구조의 단단한 심이 되는 것이며, 포지션의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오. 에너지원에 가까운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이오. 약하다는 것은 종속되는 것이며, 에너지원에서 먼 것이며 어떤 변화의 시점과 지점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오.
구조는 점점 성장하는 것이며 그 성장의 베이스가 있는 것이며 그 베이스에 가까울수록 유리하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대량생산 대량공급은 그러한 구조의 성장과정을 무시하고 있소. 즉 베이스 없는 성장을 꾀하는 것이오.
대나무처럼 가지가 없이 일시에 쭉 뻗어가는 성장을 하게 되었소. 이러한 성장은 순식간에 우후죽순으로 일어나지만 대나무처럼 더 성장하지 않소. 큰 나무처럼 지속적인 성장을 해야하나 그럴 수 없소.
그래서 대나무처럼 50년에 한번 대꽃을 피우고 전부 말라죽소. 대밭이 말라죽으면 팬더곰이 굶어죽소. 팬더곰이 굶어죽으면 중국은 대대적인 팬더 서식지 옮기기 사업을 하는 것이오.
각설하고 산업사회의 특징인 대나무형 성장시대는 끝났소. 물론 중국은 이제 시작이지만. 대나무형 성장이 끝났기 때문에 한국의 서울 주변 신도시들은 20년 내로 대밭처럼 일시에 말라죽을 것이오.
대나무형 성장은 끝났고 큰나무형 성장을 해야하오. 그러려면 많은 가지들을 확보해야 하오. 간선과 지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갈라지는 마디들이 강한 개인이오. 그곳이 성장의 베이스이며 또한 생장점이 되는 것이오.
가지의 갈라지는 마디가 구조의 대칭을 이루는 축인데 축은 그 갈라지는 시점과 지점을 결정하오. 즉 강하다는 것은 어떤 일의 진행을 위한 시점과 지점의 결정을 자신이 하는 것이오. 약하다는 것은 그것을 남이 결정하는 것이오.
머리가 1을 움직일 때 꼬리는 10을 움직여야 하오. 약자는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심심하면 잘려나가게 되오. 중요한 것은 산업사회의 구조 자체가 변화한다는 점이오. 대량생산 대량공급은 대량멸절로 이어지게 되오.
앞으로는 소량생산 다양한 공급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변화해야 하오. 창의적 인간이 되어야 하오. 그것은 역할을 나누어서 나는 요것만 너는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이오.
옛날에는 서울대만, 판검사만 타령을 하다가 요즘은 공무원만 타령을 하는데 뭐뭐만 하는게 약한 군중의 특징이오. 그런 것은 기본적으로 지고 들어가는 약자의 관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