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과 귀납의 문제 세상이 연역이라는 것은 초딩도 안다.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안다. 논리를 전개하려면 합당한 근거를 대야 하기 때문이다. 근거에 따라 진술하면 그게 연역이다. 조리 있게 말하다 보면 자연히 연역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쉽잖아. 언어 안에 답이 있다. 전제에 따라 진술한다. 전제에 진술이 따르는 문장구조 자체가 그대로 연역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면 그것이 연역이다. 다만 박근혜 어법처럼 주어가 없으면 실패다. 베이비 토크를 벗어나면 누구나 연역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인류는 1만 년 동안 귀납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버벅대는가? 연역은 근거를 대고 말하는 것인데 근거를 찾는 과정이 귀납이기 때문이다. 연역은 물이 흐르듯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일단 위에서 시작한다. 연역하려면 위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무지상태인 아래에 있다. 아래에서 위로 역주행하면 귀납이다. 아는 것을 자연스럽게 말하면 연역인데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뭔가 알아내려고 하면 귀납이다. 알아야 말할 수 있다는 딜레마다. 연역하려면 알아야 하고 알려고 하면 이미 귀납하고 있는 실패를 저지르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본능이다. 이미 아는 것을 근거로 삼아 추론을 해야 한다. 그것은 언어감각이다. 언어감각은 다들 알고 있잖아. 환경과 상호작용하다 보면 답이 나온다. 환경과의 상호작용 그 자체가 연역의 근거다. 상호작용은 연결이며 그렇다면 이미 연결에 성공해 있다. 즉 알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을 근거로 삼으려고 하므로 실패를 저지르게 된다. 추상적인 관계가 모든 것의 근거다. 우리는 관계 속에 곧 상호작용 속에 살고 있다. 가족관계, 사회관계, 친구관계 같은 관계가 연역의 근거다. 문제는 이런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가 없는 점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있지만 근래의 유행어다. 국가와 개인을 연결하는 권력관계를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친구 사이에 우정이니 의리니 하는 말이 있지만 사람들은 의미를 모른다. 연역은 근거를 대고 말하는 것이며 근거는 우리의 문장구조와 언어감각에 있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있다.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작은 앎을 큰 앎으로 복제한다. 패턴은 같기 때문이다. 1+1=2나 100+100=200이나 같다. 2를 먼저 알고 1을 다음 안다. 1은 아직 숫자가 아니다. 그냥 관측된 대상일 뿐이다. 2가 되면 라인이 개설된다. 둘을 연결하는 개념이 성립한다. 그룹이 시작되고 집합이 시작된다. 집합론에서는 공집합도 집합이라고 하지만 원소가 없어도 이미 라인이 살아있다. 공집합은 이미 2다. ( )로 '('가 둘이 있잖아. 라인은 하나에 없고 둘에만 성립하는 것이다. 1을 알고 2를 아는게 아니라 2를 알고 그사이의 라인 1을 안다. 1을 알면 진법을 이해한 것이다. 진법을 이해해야 숫자를 이해한 것이다. 인간은 연역하려고 근거를 찾다가 귀납하므로 실패한다. 연역은 서열이 있다. 차례대로 치고 빠진다. 치고 빠지지 않으므로 이원론의 오류에 빠진다. 큰 것을 먼저 하고 작은 것을 나중 한다. 큰 것이 빠지고 작은 것이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큰 것이 빠지지 않고 작은 것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게 이원론자가 타자를 차별하는 병폐다. 원인이 가고 결과가 오는데 원인인 부모가 가지 않고 자식을 지배하려 한다. 씨앗이 썩어서 열매가 열리는데 씨앗이 죽지 않고 열매를 억압한다. 이원론의 병폐는 패턴이 같다. 사단과 칠정 사이의 살아있는 라인 1을 봐야 일원론인 것이다. 임금과 신하를 각각 보면 안 되고 그사이에 살아있는 하나의 명령계통을 봐야 한다. 라인이 진짜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회사에서 부장과 과장의 관계로 연역되고 군대에서 상병과 일병의 관계로 연역된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다. 위가 아래를 지배하는게 아니고 바톤이 넘겨지는 것이다. 그사이에 권력관계라는 라인이 살아있다. 그 살아있는 권력라인 1이 실재이며 임금이니 신하니, 부장이니 과장이니, 상병이니 일병이니 하는 것은 인간들이 적당히 가져다 붙인 거다. 그것은 일 안에서 임시적인 포지션에 불과하다. 유가 아니라 무다. 연역은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 귀납은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일원론은 근거와 주장, 전제와 진술, 원인과 결과 사이의 살아있는 라인 1에 주목한다. 명령계통이 권력이다. 이원론의 오류, 귀납의 오류는 그 둘 사이의 살아있는 라인을 찾지 못해서 명령계통을 모르므로 둘이 연결되지 않아 겉돌게 되고 그러므로 권력라인의 앞단계가 뒷단계를 억압하도록 방치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라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사랑이라는 라인 1이 살아있음을 보지 못하므로 힘이 센 남자가 힘이 없는 여자를 지배해야 한다는 식의 허접한 논리를 만들어낸다. 라인이 없으면 부부가 끊어지고 부부가 끊어지면 가족이 해체될 텐데 그럼 어쩌냐고? 사랑이라는 라인 1이 살아있음을 봤다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야 가족이 유지된다는 식의 어거지 논리는 필요 없는 것이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챙겨야 하는게 아니고 각자 매뉴얼대로 하면 된다. 괜히 회사에 충성 요구하고 하면 후진국이다. 여직원을 차별하는 마초 사장은 여직원은 남직원에 비해 충성심이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뉴얼도 없이 후진국식으로 경영하고 있다. 직원에게 충성심을 요구하면 이미 잘못된 것이다. 그게 이원론의 억압인 것이다. 사건은 연결된다. 라인을 보지 못하므로 둘이 분리된다. 분리되면 안 되므로 일의 순서에서 앞선 쪽이 뒤따르는 쪽을 지배하는 억지수단을 써서 라인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망한다. 그러다가 후배에게 폭력을 쓰고 처벌을 받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대화할만한 상대인지는 3분만 대화해보면 알 수 있다. 근거를 대고 조리 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핑퐁식으로 상대의 말을 받아쳐 넘기는 식의 말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이니 대화상대로 삼지 말자. 어떤 중국인이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그러게', '진짜야?' 이 두 마디만 해주면 된다고. 친구와의 대화에는 이런 기술이 먹히겠지만 진지한 장소에서 이런 식의 어린이 어법은 곤란하다. 말만 제대로 해도 제법 아는 사람 흉내를 낼 수 있다. |
이미 알고 있는 연역을 남한테 설명하려다 보면 남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찾아들게 된다. 이 때 원본의 훼손이 벌어지니 이를 두고 귀납적이라 한다.
좋은 말씀인데 이미 알고 있는 연역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꼬맹이들 셈을 할 수 있는 것은 10진법과 같은
진법을 알기 때문인데 자신이 진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것은 그것을 수학자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
1이 호두나 사과 한개인지 아니면 사람과 연결하는 라인이 1이라는 건지
수학자들도 모르고 있으니 알기는 아는데 모르지요.
뇌기능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는 모릅니다.
알지만 무의식적으로 알 뿐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려다 보면 귀납이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설명하기는 힘들다. 즉 무의식에 가까운 뇌연산을 의식할 수준으로 알아차리는 게 어려운 거군요.
"일원론은 근거와 주장, 전제와 진술, 원인과 결과 사이의 살아있는 라인 1에 주목한다. 명령계통이 권력이다."
세상에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있다.
사랑은 구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