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원자설에 영향을 받아 막연히 사건의 원인이 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입자는 하나다. 그러므로 원인은 언제나 하나라고 여긴다. 어떤 하나의 원인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만족한다. 중요한건 통제가능성이다. 대상을 통제할 수 있어야 원인을 찾아낸 것이다. 입자는 상대가 맞대응을 하므로 통제되지 않는다. 그 입자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배후를 찾아서 에너지의 공급을 단절시켜야 통제된다. 사건의 메커니즘은 복잡하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원인의 원인이 있다. 원인의 원인의 원인도 있다. 하나의 사건에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친 세부 의사결정이 있다. 이 다섯 가지 원인 중에서 두 번째 입자를 원인으로 치는게 보통이다. 이들 중에서 하나의 원인을 찾았다면 단서를 잡은 것이다. 추론하여 범인을 특정할 수 있다. 살인범을 체포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배후에 살인을 청부한 사람이 있다.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전체 메커니즘을 파악해야 원인을 찾은 것이다. 에너지 관점에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너지는 상호작용의 형태로 계를 이룬다. 그 지점까지 사유를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안다는 것은 맞다/틀리다, 옳다/그르다, 같다/다르다, 있다/없다, 이다/아니다의 다섯 가지 판단으로 구성된다. 어떤 일을 시도하면 처음에는 무조건 틀리게 된다. 다섯이 다 틀리는게 아니고 이 중에 하나가 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시행착오를 겪는다. 오류시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환경과 맞춰가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적응과정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한다. 사건을 OX 시험문제 풀이로 착각한다. 당신이 여자친구에게 고백한다고 치자. 어떻게 고백하든 그건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배후에서 권력의 문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백했다면 당신은 권력을 행사한 것이며 갑을관계가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일을 그르쳤다. 원래 한 번에 안 된다. 원인의 원인의 원인까지 해결해야 한다. 바둑이라면 한 수 앞을 내다보는 것으로 부족하다.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환경에 먼저 조치한 다음에 고백해야 한다. 사귀는 상대는 입자다. 먼저 질에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압도적인 에너지로 되는 것이다. 동물은 냄새에 익숙해져야 동료로 받아들이고 인간은 호르몬에 익숙해져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많은 결정이 무의식 영역에서 일어난다. 사전절차 없이 입자에 바로 작용하면 당신이 어떻게 하든 상대는 무조건 반대로 움직여서 맞대응한다. 이는 기계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선한 의도라도 실패하고 악한 의도라 해도 실패한다. 사건은 힘의 형태로 촉발된다. 힘을 막으면 입자가 나타나고 입자를 제거하면 에너지가 나타난다. 차가 고장난 것은 힘이다. 수리했는데 또 차가 고장나는 것은 이물질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이물질은 입자다. 입자를 제거해도 또 고장나는 것은 도로가 개판이기 때문이다. 보통 말하는 원인은 대상화되는 입자다. 인간에 의해 지목된다. 입자가 대단해서 원인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의로 입자를 지목한다. 왜냐하면 지목할 수 있으니까. 질과 힘은 다른 부분과 결합해 있는데 입자는 고체의 형태로 독립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지목하기 쉽다. 그런데 유체라면 헷갈린다. 입자를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은 질과 힘도 지목할 수 있다. 적절한 언어가 없을 뿐이다. 특정인을 지목하면 입자라 할 수 있다. 이게 다 뭐 때문이야 하고 입자를 지목할 수 있다. 이게 다 성소수자 때문이야, 이게 다 조선족 때문이야, 이게 다 빨갱이들 때문이야,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하고 차별의 언어로 지목하면 된다. 입자는 지목하기 쉽기 때문에 바보들은 언제나 입자를 지목하는 것이다. 질과 힘은 지목하기 어렵다. 한국인이 말하는 분위기나 일본인들이 말하는 공기나 시장의 트렌드, 유행, 시대정신을 지목하면 질이다. 그런데 질은 지목하기 어렵다. 특정한 위치에 있는게 아니므로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없다. 못 배운 보수꼴통이 차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지 지목하기 쉽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려면 세련된 언어라야 한다. 병에 걸린 환경은 질이고, 바이러스는 입자고, 발병은 힘이고, 통증은 운동이고, 체온처럼 측정되는 것은 량이다. 이 다섯 모두가 원인이지만 이들 중에서 뒤에 오는 것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의 상태가 많은 부분을 결정하므로 보통은 원인으로 치지 않는다. 진짜 원인은 질이지만 질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어서 입자를 지목하므로 일이 꼬인다.
문제는 프레임이다. 보통은 다섯 중에 하나만 강조하는 것으로 프레임을 건다. 그게 먹히기 때문이다. 진보든 보수든 프레임 놀음에 열중해 있다. 원자설의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대상화되고 지목되는 것은 다 가짜다. 연속되고 방향성이 파악되는 것이 진짜다. 상대가 맞대응하는 것은 가짜고 제 3의 것으로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 진짜다. 사건의 다음 단계가 제시되는 것이 진짜다. 왜인가? 입자는 언제나 상대방이 있지만 질은 피아간에 공유되기 때문이다. 입자는 너나 나나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해결되지만 질은 제 3의 인물을 개입시켜 우회할 수 있다. 수요와 공급 중에 하나가 이득보면 하나가 손해보는 것은 입자고 시장의 파이를 키워 모두가 이득을 보는 것이 질이다. |
"연속되고 방향성이 파악되는 것이 진짜다. 상대가 맞대응하는 것은 가짜고 제 3의 것으로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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