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과학의 출발점을 정하는 문제다. 그것은 기본단위다. 우리는 그것을 편의상 원자라고 부른다. 틀렸다. being은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시간의 사건이지 공간의 무엇이 아니다. 세상은 기본단위의 집합이 아니다. 집합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이미 잘못되었다. 그것을 집합시켜 주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둑은 바둑알의 집합이다. 그런데 바둑 두는 사람이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뒤늦게 바둑판을 꺼내온다. 바둑알을 집합시켜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바둑알은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기본단위가 될 수 없다. 바둑알은 공간의 어느 지점에 놓이고 바둑의 진행은 시간의 초읽기로 연출된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아우르는 개념이 제안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둑알보다 앞서고 바둑판보다 먼저다. 우리는 용감하게 근본의 근본을 질문해야 한다. 사실이지 인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설이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이든 임시방편으로 고안된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인류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창조설을 방패막이로 삼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해 왔다. 물리학자가 답을 내놓을 일이지만 통일장이론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17가지 기본입자를 찾았고 초끈이론이 제안되고 있지만 암흑물질에 암흑에너지 하며 갈수록 미궁이다. 근원을 사유해야 한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무언가 질문한다는 것은 바른 방법인가? 왜 둘이 마주보고 앉아 하나는 질문하고 하나는 응답하지? 왜 응답자는 질문자의 맞은 편에 앉아 대칭을 이루지? 인간의 언어체계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묻고 답하기는 바른 접근법일까? 인류는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어떤 것을 바르게 설명하려면 그것을 관측자의 맞은 편에 두지 말아야 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대칭을 이루는 즉 이미 잘못되고 만다. 질문과 답이 대칭행태면 이미 왜곡되어 있다. 원자든 입자든 어떤 '자'를 떠올리는 이유는 인간이 어떤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리켜져 지목되므로 물질도 가리켜져 지목되어야 한다는 억지다. 경험칙이기도 하다. 호두든 밤이든 땅콩이든 낱알로 이루어져 있다. 벽돌도 낱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주도 낱개의 집합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초딩의 아이디어다. 진실을 말하자. 인간이 눈으로 공간의 어떤 지점을 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눈에 소실점이 있기 때문에 물질도 이에 대응되는 어떤 극한의 지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원자든 입자든 그러하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보면 안 된다. 사건은 연속된다. A가 B를 치면 B가 C를 치는게 사건이다. 사물은 공간의 작용에 반작용으로 응답하지만 사건은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며 존재의 근본은 공간의 입자가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그것이 단위가 된다.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시작에서 종결까지, 머리에서 꼬리까지 진행하며 완결된다. 그 안에 의사결정구조를 갖추고 있다가 외력이 작용하면 계 내부의 에너지 모순을 처리한다. 이때 외력을 외부의 작용측에 되돌려주지 않고 내부에서 처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한 사건의 자체적인 완결성이 존재의 완전성을 이룬다. 완전성이 근본적인 단위가 된다.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반영하는 우주의 건축재가 된다. 세상은 사건의 연결이며 사건은 자체 메커니즘에 의해 내부적인 대칭성을 가진다. 외부의 인간과 대칭되는 순간 내부 대칭성이 깨진다. 그러므로 관측자인 인간에 의해 지목되는 것은 모두 가짜다. 원자든 입자든 무엇이든 인간의 눈동자가 만드는 소실점에 대칭된 것이며 인간과 대칭되면 망한다. 반대로 연속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체에 대칭성을 내재시켜야 한다. 그것이 의사결정구조다. 사건은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이 시스템을 이루며 그 안에 구조를 갖추고 대칭성을 제어하여 의사결정한다.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안다. 수박이 익었다는 사실을.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사실을. 냄새를 맡고 안다. 색깔도 정보를 제공한다. 우리는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으로 정보를 얻는다. 이것이 바른 방법일까? 틀렸다.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으로 얻은 정보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장님이 손으로 만져보고 얻어내는 정보는 빙산의 일각이다. 진실한 것은? 세상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존재의 더 안쪽으로 깊숙히 쳐들어가야 한다. ‘A면 B다.’ 이것이 우주의 절대지식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의 지식은 인과율이다. 대재앙이 일어나 인류의 모든 과학지식을 잃게 되었다면 다음 세대에 물려줄 단 하나의 지식은 인과율이다. 파인만이 틀렸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는 인과율을 발전시킨 석가의 연기법이다. 이것과 저것은 마주 보고 있지 않다. 그것은 상호작용이며 존재는 상호작용 매커니즘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상호작용이 바둑 두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둑알보다 먼저 와서 바둑판을 그리고 있다. 바둑알은 그 다음 연출이고 집합은 바둑이 끝난 다음의 관측이다. 우리는 집합을 보고 지식을 구하려 하지만 바둑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진실에서 멀다.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원자론은 틀렸고 구조론이 맞다. 원자론은 관측자가 있고 관측자에 의해 대상이 지목되며 관측자와 공간에서의 대칭을 이룬다. 대상화되고 타자화되고 객체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작용에 반작용한다. 그런데 원래 세상은 서로 상호작용할 뿐 반응하지 않는다. 반작용하지 않는다. 상호작용은 A와 B가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다. A가 작용하고 조금 있다가 B가 반응하면 반작용이다. 원자설과 입자설 혹은 기계론과 결정론의 세계관은 모두 반작용을 근거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내가 바둑판에 흑돌을 두었는데 상대가 백돌로 맞받아 친다. 그것이 반작용이다. 상호작용은 그 전에 먼저 와서 바둑판을 그린다. 입자가 성립하기 이전의 플라즈마 세계다. 이 세계는 아직 입자가 없으므로 에너지의 법칙으로 기술된다. 그러므로 엔트로피의 법칙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최종근거가 되는 것이다. 자석과 쇠붙이는 작용에 반작용하는가? 아니다. 자기장이라는 에너지의 장 안에서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역사 이래 인류는 작용과 반작용 곧 시간간격을 두고 이해해 왔다. 틀렸다. 전기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천칭의 두 접시처럼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며 그것은 상호작용이며 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세상은 토대의 공유에 의해 대칭된 둘이 동시에 움직이는 상호작용 메커니즘에 의해 해명된다. 원인이 다녀간 다음에 결과가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토대의 공유 형태로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이 상호작용이다. 이는 외부의 관측자를 배제하는 것이다. 관측자가 어떤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사건은 언제라도 시간상에서 전개되는 법이다. 대상이 공간에서 가리켜져 지목되면 무조건 틀려버린다. 사물은 틀렸고 사건이 옳다. 구조론의 출발점은 원자설의 부정에 있다. 진화론이 맞다면 창조설은 틀린 것이다. 원자설이 틀렸으므로 구조론이 맞다. 원자설은 외부의 관측자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므로 이미 틀렸다.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보든지 그것은 틀린 것이다. 눈으로 보기 때문에 틀렸다. 마음으로 봐도 틀렸다. 왜 보는가? 음악은 보는게 아니다. 그것은 함께 몸을 맡기는 것이다. 음악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맞은편에서 대적하면 일단 틀렸다. 흐르는 연주에 탑승해야 한다. 버스 안에 파리가 있다. 버스는 부산행 버스다. 파리는 열심히 날아서 부산까지 갔을까? 당신이 버스 밖에서 어떤 주장을 하든 틀렸다. 당신은 버스에 타지 않았으므로 무조건 틀렸다. 원자론은 버스 밖에서 관찰하므로 무조건 틀렸다. 버스 밖에서 돌을 던지고 되돌아오는 반작용을 보는 것이 원자론이라면, 버스에 타고 운전해보는 것이 구조론이다. 밖에서 던진 돌은 버스에 맞고 되돌아온다. 안에서 운전하면 연속된다. 핸들을 꺾으면 바퀴가 움직인다.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럴 때 통제할 수 있다. 운전할 수 있다. 알 수 있다. 구조론의 출현은 좋은 소식이다. 구조론은 인과율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 둘로 설명한다. 원인과 결과는 공간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인과율이 시간과정임을 알고 있다. 뭔가 어색하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의사결정이 있다. 구조론은 의사결정개념을 도입하여 인과율을 구체화시킨다. 원인과 결과의 대칭이 아니고 원인>의사결정>결과의 연속이다. 대칭이면 사물이고 연속이면 사건이다. 정확히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연속이다. 기승전결이 연속되듯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연속되듯이 사건은 엔트로피에 의해 일방향으로 계속 간다. 구조론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통제가능성에 있다. 뉴턴의 물질 입자는 쪼갤 수 없고, 관통할 수 없고, 어쩔 수 없고 별수 없다. 통제불가능하다. 인간이 더 이상 달려들 수 없는 어떤 포기해야만 하는 막다른 지점을 우주의 단위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거기서부터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는 합리적 사고가 아니다. 구조론은 대칭이 아니라 연속이므로 통제가능하다. 신의 영역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되돌아오면 통제할 수 없지만 연속되면 통제된다. 여당이 야당을 쳤는데 야당이 맞받아치면 통제할 수 없지만, 야당이 그 힘을 이어받아 군소야당을 치면 연속되므로 통제할 수 있다. 민주당이 자한당을 치면 자한당은 비례당을 만들어 바른당을 친다. 보수대분열이 일어난다. 이 경우는 통제된다. 이 하나의 통제원리에 의해 우주는 137억년 동안 전진해 왔다. 이에 인류는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다. 옛날에는 자연수를 쪼갤 수 없다고 생각했다. 1보다 작은 것은 없다. 0.1이 등장하자 곤란해졌다. 쪼개봤더니 과연 쪼개졌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그것이 존재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전개과정은 그것보다 작으므로 이미 쪼개진 것이다. 모든 존재는 탄생과정에서 이미 쪼개졌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절차가 반드시 있다. 아기가 자궁 속에서 자라는 절차다. 아기를 쪼갤 수는 없다. 왜? 살인이니까. 원자를 쪼갤 수 없다는 말은 아기를 쪼갤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신의 분노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만 원자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인간은 여기까지다 하고 스스로 한계를 정한 것이다. 양자역학에 이르러 인간은 쪼갤 수 없는 세계에 뛰어들어 무수히 쪼개고 있다. 구조는 통제가능성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들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조건값을 변경하는 방법으로 통제한다. 원자론은 통제불가능성이다. 세상은 쪼갤 수 없는 통제불가능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결할 수 있는 통제가능성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것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식은 인과율이다. 구조론은 인과율의 해석판이다. 다만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를 대칭적으로 보는데 비해 구조론은 중간에 의사결정구조를 끼워넣어 연속적으로 본다는 차이가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계 내부의 에너지 모순을 처리하는 엔트로피의 일방향적 진행과정인 것이다. |
"구조론은 인과율의 해석판이다. 다만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를 대칭적으로 보는데 비해 구조론은 중간에 의사결정구조를 끼워넣어 연속적으로 본다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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