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과 범신론 진실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을 당황하게 만들더라도 진실을 말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있다. 의도가 있다. 구조론은 범신론적이지만 범신론이 아니며 이신론적이지만 이신론이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일원론이고 일신론이라는 거다. 신과의 일대일 개념이다.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도 있다. 범신론은 일원론이 아니다. 대충 비슷한 느낌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런 것을 함부로 논한다면 위험하다. 예컨대 이런 거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 그 상대성이라는 말에 환호를 부르는 사이비들 많다. 상대성이라는 표현을 거짓말 해도 되는 권리 혹은 까방권 정도로 여기고 자기네들 세상이 왔다는 식으로 설쳐댄다. 상대성이라는 표현을 자의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상대성은 광속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절대성 이론이다. 연관성이론이 바른 번역이라는 말도 있다. 범신론은 다원론의 형태를 띠는 위험이 있다. 대중에 아부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황희정승의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아 하는 것이 대중에 대한 아부다. 매우 위험한 행동이 된다. 이신론도 고약하다. 이신론은 신과의 교감을 부정한다. 기도는 의미가 없고 기적은 없다는 말이다. 신과의 대화는 필요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위험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고립되었다고 느끼면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 지구가 망하든 말든 내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을 한다. 지구를 정화하려면 70억을 죽여야지. 이런 식의 폭주가 일어난다. 인간은 언제라도 사회와 연결된 존재이며 인간의 행동은 개인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집단의 의지가 투영된 것이다. 즉 신이 사회의 의사결정중심을 의미한다면 인간은 언제나 신과 교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적은 있고 기도는 필요하다. 엘리트는 자부심이 있다. 자신이 사회의 대표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인은 자신의 행동이 사회를 대표하는 행동임을 모른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사회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사회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한다. 소인배는 그 사회의 단위가 작다. 박근혜는 박빠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이명박은 소수 친이 패거리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누구나 그런게 있다. 지사는 천하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원론적 태도다. 이신론자나 무신론자는 천하와 소통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들이 엘리트일 때는 자부심이 있어 괜찮지만 궁지에 몰리면 순식간에 타락한다. 천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은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허무주의는 극단적 파괴행동으로 나타난다. 라즈니쉬나 마광수의 기행에는 짙은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그들은 세상을 파괴하고 싶어한다. 세상을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고 싶은 마음이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며 이신론과 무신론, 범신론을 경계하는 것은 심리적 고립에 따른 허무주의 극단행동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엘리트는 연결의 중심에 있지만 일반인은 그렇지 않다. 고립을 느끼는 순간 집단을 끌어들이며 그 방법은 자기파괴다. 어린이가 퇴행행동으로 돌봐주는 보모의 주의를 끌려는 것과 같다. 언제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그 연결의 중심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구조론의 신 개념이다. 어쨌든 우주는 일원적인 원리로 탄생한 것이 맞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의미가 있다. 의미는 사건의 연결이다. 사건으로 보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하나로 존재하며 그것은 문명사건이다. 사건으로 보면 너와 나의 구분은 의미없다. 무신론은 세상을 물질로 본다. 이는 대상화, 타자화, 객체화의 시선이며 그 시선은 곧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무신론자는 세상과 내가 끊어져서 별개로 있고 여긴다. 그럴 때 히틀러나 모택동과 같은 폭주를 일으킬 수 있다. 주체화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세상과 나는 연결되어 있으며 한 편이며 하나의 의사결정 중심을 바라보고 있다. 우주가 원래 그렇게 탄생했고 인간이 역시 그렇게 사회적 동물로 세팅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기도는 필요한 것이며 그러므로 기적은 때로 일어나는 것이다. 기도는 세상과 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자신이 집단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집단과 호르몬을 교환해야 한다. 환경과도 긴밀하게 소통해야 한다. 겉돌면 안 된다. 삐꺽거리면 안 된다. 동료의 땀냄새를 맡고 이성의 살냄새를 맡아야 한다. 호르몬이 교통정리를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세상의 중심과 소통하는 것이다. 세상과 내가 삐꺽거리며 겉돌지 않도록 부단히 주파수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과의 대화다. 기적은 주체화의 관점이다. 유물론은 철저하게 대상화의 관점이다. 세상은 타자다. 나와 세상은 별개다. 그럴 때 의사결정은 물질의 여러 지점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다. 구조론은 반대로 의사결정이 하나의 중심에서 일어난다는 거다. 왜 기적이 일어나는가?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방향이 바뀔 때 한꺼번에 모두 변하기 때문이다. 유물론으로 보면 세상은 철저히 대상화 되어 있고 사건은 여러 지점에서 일어나며 뭔가 한꺼번에 바뀐다면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며 세상은 철저히 산발적으로 국소적으로 변화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국소성의 원리는 진작에 깨졌다. 의사결정은 중앙에서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일제히 일어난다. 세상이 뒤집힐 때는 지구의 자기장 방향이 바뀌듯이 한꺼번에 확 넘어간다. 의사결정은 항상 그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의 이러한 속성 곧 의사결정 중심의 존재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맞게 대응해야 한다. 그것은 변화는 갑자기 기적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비하고 그러한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대화하고 소통하고 환경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맞게 자신의 호르몬을 바꿔야 한다는 거다. 결론은 호르몬이다. 호르몬은 맞게 세팅되어야 한다. 물론 자연법칙과 맞지 않는 뜬금없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몰아서 한 방에 기적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 기적적인 변화가 언제 일어날지 항상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기도의 의미다. 이신론, 범신론, 무신론은 이성을 강조하지만 인간은 호르몬에 지배되는 나약한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와의 유대는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일원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일원적으로 작동하며 인간과 부단히 상호작용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인간의 무의식은 언제나 집단을 주시하고 있다. 의사결정은 언제나 집단의 중심에서 일어난다.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태도는 곤란하다. 맞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긴밀한 대응이 요구된다. 정리하자. 구조론이 범신론적인 혹은 이신론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방향이 다르다. 구조론은 의사결정원리로 보며 의사결정은 연결된 상태에서만 일어난다. 의미가 있는 상태다. 곧 허무를 부정한다. 허무는 의사결정을 못하는 것이며 그것은 단절이다. 범신론, 이신론, 유물론은 모두 타자의 관점, 대상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구조론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남인가? 아니다. 타인은 없다. 너는 나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축구선수는 공을 돌리다가 찬스가 되면 슛을 날린다. 그럴 때 팀을 대표한다. 의미는 패스의 연결이며 슛은 개인이 집단을 대표하는 것이다. 기도의 의미가 거기에 있다. 나의 슛인 것이 아니라 팀의 슛이다. |
차우님의 글은 동렬적 혹은 구조론적인데요. ^^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일신론, 다신론, 이신론 등이 다 무용지물이지요.
포지셔닝을 제대로 해야하는데 그게 안되니가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거지요.
일원이 맞고, 다원은 틀리다. (어의만 살펴보 그게 잘못된 것임을 왜 모를까 싶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원이 맞다고 주장하곤 한다.)
일원은 존재론이고, 소위 사람들이 다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식론으로 잘못된 표현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을 헛갈리는 사람들과는 이야기가 힘들다.
일원이 올바로 서야 관계가 설정된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질-입자-힘-운동-량은 결국 관계론이다.
명쾌한 정리글 감사합니다.
종교인은 드러내놓고 바보인 것을 들키고
과학자는 뒤에서 바보인 것을 들킵니다.
구조론은 종교도 과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흥종교도 유사과학도 아니라는데, 그럼 뭐야?
구조론에 들어와서 많이 보았던 게
유사과학자와 기성종교인들
그들에게 뭘 물어보면, "동렬님이 그렇게 말했어"
"우리는 동렬님처럼 될 수 없으니깐,
동렬님이 말해주는 걸 잘 써먹기만 해도 된다고."
환장하는 겁니다.
아마 '적'이란 말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的은 외견상 비슷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지,
그것과 동일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과학하는 사이트에서
일부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연역적"이라고 말했다가,
어떤 엘리트가 눈깔을 뒤집고 소크라테스의 연역은 그런게 아니라고 공격하더군요.
환장하는 겁니다.
구조론자인 우리는 전달자의 고민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달을 보라고 해도 손가락을 보고
그 사이를 보라고 해도 달을 보는게 인간인데,
유일한 해결책은 전달자를 아예 안 쳐다 보는 겁니다.
그냥 내가 전달자가 되면 됩니다.
제발 노무현을 죽이는 노빠가 되지 말기를.
대신 우리는 스스로 노무현이 되어 인류를 대표해야 합니다.
기도라는 말에서 기성종교의 기도를 찾고,
할배신의 응답을 찾는다면 피곤해지는 겁니다.
구조론은 종교와 과학 이전의 종교이자 과학입니다.
차라리 그냥 철학이라고 합시다.
그래도 오해할 것 같지만.
구조론자라면 머리통이 흰머리로 뒤덮을 때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써먹거나 돈벌려고
구조론을 연구하는게 아닙니다.
내가 진리에 대하여 호응할 수 없다면
그게 더 미칠 지경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