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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637 vote 0 2019.12.26 (14:07:16)


         

    거대한 전복의 시작


    구조론은 원자론에 대해 구조론이다. 구조론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다윈의 진화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견주어볼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류에게 커다란 지적 충격을 던져주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근래에 이루어진 양자역학의 성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류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혼미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들의 공통점을 모른다. 


    이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데 누가 다가와서 어깨를 흔들며 말한다. ‘바보야! 그게 아니라고. 이게 아니고 저거잖아.’ 하고 일깨워주는데 과연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런 일이 매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번 깨우쳤는데도 여전히 깨우침을 당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태도의 전환이 아니면 안 된다. 


    구조론이 극복하려고 하는 원자론은 돌턴의 원자가설이 아니다. 구조론은 정확히 데카르트의 기계론과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겨냥하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고대 원자설이 있었지만 오래도록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밀려 묻혔고 근대 원자설은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론, 결정론에 영향받아 돌턴에 의해 재구축된 것이다.


     근래에 와서 인류에게 충격을 준 사람은 다윈이다. 근대의 수단으로 중세인의 봉건적 사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지동설을 보급한 갈릴레이다. 우리는 이들의 공통점을 포착해야 한다. 바른길과 어긋난 길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다윈과 갈릴레이는 이론을 떠나 근본적으로 과학자의 태도에서 무언가 특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다윈은 화석을 관찰했고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썼다. 그들에게는 확실한 도구가 있었다. 도구를 손에 쥐고 그 의미를 알아채는 순간 사람의 태도가 바뀌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고 학자의 자세가 바뀐다. 평범한 농부가 총을 손에 쥐는 순간 눈빛이 변한다. 권력의지를 가지고 대상을 통제하려 든다. 그것은 주체의 관점이다. 주체는 언제라도 대상과의 게임에 이기려고 한다.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뉴턴의 결정론은 공통적으로 대상의 관점에 머물러 있다. 본질에서 그들은 같다. 기독교의 신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틀렸으면 뉴턴도 틀렸고, 플라톤도 틀렸고, 기독교도 틀렸다. 그들의 언어는 다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같다. 권력의지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대상에 매몰되어 수동적으로 보느냐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종교의 신 개념을 대체한다. 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모든 자리에 이데아를 넣으면 무리가 없이 통한다. 중세의 교부철학은 플라톤을 철저하게 우려먹었다. 사유의 본질이 같으니까. 단어가 다르나 문법이 같고 화법이 같고 사유가 같다. 종교의 신이 들어갈 자리에 마르크스의 혁명을 넣거나, 칸트의 이성을 넣거나, 돌턴의 원자를 넣거나, 뉴턴의 결정론을 넣어도 같다. 영혼 개념을 보편화시키면 신이고, 세련되게 표현하면 이성이고,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이데아고, 물질적으로 표현하면 원자고, 사회적으로 표현하면 혁명이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에 도달하려고 한다. 화살을 쏴서 과녁을 맞추려 한다. 영혼, 신, 이데아, 이성, 원자, 혁명은 궁수가 맞추어야 할 과녁이다. TV는 그것을 사랑으로 표현하고 보통사람은 그것을 행복으로 표현한다. 직업에 따라 다른 단어를 쓸 뿐 본질은 같다. 그들은 부족민이 사냥감을 쫓던 시절의 관습을 버리지 못했다. 원시 부족민의 지적 한계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5만 년 전의 사피엔스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없다.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본 사람도 드물게 있다. 다만 철저하지 못했을 뿐이다. 세상을 프로세스로 보느냐, 대상으로 보느냐다. 주체의 관점을 얻어 프로세스로 보는 사람은 공자, 다윈, 프로이드, 석가 정도다. 이는 관측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다. 지동설이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도 일부 관측자의 문제를 제기하는 점이 포착되지만 대개 철저하지 못하다. 


    폭넓게 해석하면 노자나 장자의 사유에도 일부 주체의 관점이 스며 있다. 그 점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유의미한 정도는 아니다. 이유극강의 강이 공간의 대상이라면 유는 시간의 과정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르크스도 그런게 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으로 보면 인간의 운명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자연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게 되어 있다. 귀족은 평민을 착취하고 평민은 노예를 착취한다. 사자는 사슴을 먹고 사슴은 풀을 먹는다. 그런데 사슴들이 단결하여 사자에게 대들면? 물론 가능하지 않다. 사슴은 총이 없으니까. 그러나 인간에게는 총이 있다. 도구를 손에 쥐는 순간 인간은 변한다. 스펜서가 철저하게 대상화의 관점으로 봤다면 마르크스는 일부 주체화의 관점을 획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파편화된 부스러기 생각이지만 말이다. 


    주체화냐, 대상화냐. 자동차를 밖에서 관찰하는 것과 직접 운전하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게 무엇일까? 자동차와 배와 비행기와 마차와 자전거를 구분할 줄 알면 차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대상화는 밖에서 팔짱 끼고 관찰하고 주체화는 안으로 들어와서 직접 차를 타고 운전한다. 도구를 손에 쥐고 프로세스를 하나씩 진행하는 것이 주체화다. 자동차에 손을 대지 않고 밖에서 팔짱 끼고 쳐다보면 그것이 타자화에 대상화고 객체화다. 


    그들은 나를 고정시켜놓고 별이 움직인다고 믿는다. 팔짱 끼고 멀찍이서 쳐다보면서 말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요구된다. 망원경으로 보면 다르다. 별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조금만 자세를 바꾸어도 관측값은 완전히 변한다. 그러므로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방향의 차이가 있다. 대상화는 관측자와 대상이 서로 마주본다. '-><-' 이렇게 된다. 그 경우 인간의 작용에 정보의 반작용이 되돌아온다. 제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새로운 지평으로 올라서지 못한다.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주체화는 관측자와 관측도구가 '->->'꼴로 연속된다. 


    대칭되면 대상화고 연속되면 주체화다.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제하려면 대상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서 의사결정구조를 장악해야 한다. 모든 장치에는 반드시 -><-꼴로 대칭되어 마주보는 지점이 있고 그 둘을 통제하는 제 3의 무엇이 있다. 합쳐서 T꼴의 의사결정구조를 이룬다. 시계에는 T자로 생긴 앵커라는 장치가 있다. 그것이 시계의 핵심부품이다.


    자전거라면 체인과 기어의 톱니가 걸리는 지점이 있다. 역시 T자 모양이다. 인류의 모든 도구와 장치에 그것이 있다. 반드시 둘이 마주보는 접점이 있고 그 접점을 통제하는 수단이 있다. 칼은 날이 있고 볼펜은 촉이 있으며 거기에는 -><-자로 마주보는 접점이 있다. 인간이 그것을 통제해야 한다. 문제는 관측자인 인간과 관측대상 역시 -><-꼴로 대칭된다는 점이다. 인간과 대상이 -><-꼴을 이루면 거꾸로 대상에 의해 인간이 통제된다. 그 경우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짐을 당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의 보고는 자기소개가 된다. 


    어떤 사람이 붉은색을 보고 초록색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색맹이다. 꽃을 관찰하여 정보를 빼낸게 아니라 자기가 색맹이라고 꽃에게 보고한 셈이다. 대상을 본게 아니라 자기 수준을 들킨 것이다. 역사 이래 누구도 이 덫을 피해 가지 못했다. 


    눈동자 속의 맹점에 대상이 위치하면 보고도 보지 못한다. 인간의 학문체계에도 맹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여기까지 온 것은 여러 가지 지식이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 검증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지식이 공산주의처럼 망해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내심 납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인들은 자기들의 믿음이 거짓임을 알지만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종교의 교리에 인간의 사회성이 반영되어 있으며 종교가 과거 부족이 했던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 인간은 조상이 아프리카를 떠나온 후 5만 년간 부족사회에 맞게 진화해 왔으므로 결코 부족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족의 대체재가 종교다. 이는 상당 부분 본능의 영역이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과학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용감하게 사피엔스의 한계를 넘어 신인류로 도약해야 한다. 


    보통사람의 보통생각은 보통 틀린다. 관점의 문제 때문이다. 대상화의 관점은 어떤 완벽하고 이상적인 제도가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삼는다. 원자론의 원자처럼 혹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어딘가에 자리잡아 버티고 있고 그것에 도달하기만 하면 인류는 행복해진다는 식의 사유다. 무뇌좌파가 항상 범하는 오류이다. 광부가 황금을 찾듯이 어떤 대상에 도달만 하면 된다고 여긴다. 미안하지만 인류가 도달해야 할 어떤 대상은 없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하듯이 텐징 놀게이가 에베레스트를 오르듯이 딱 도달하면 끝나는 그런 근사한 것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평화는 내가 가는 길일 뿐 도달하고 끝나는 목적지가 아니다. 평화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바로 그것이 평화다. 민주주의는 과정의 예술이다. 독재를 해도 경제성장만 하면 된다는 식의 목표 지상주의가 버려야 할 대상화 관점이다. 모로 가도 목적지만 가면 되는게 아니고 타고 가는 차가 좋아야 한다. 타고 가는 차의 진화가 민주주의 발전이다.


    미술은 르네상스시대 소실점의 발견과 원근법의 등장으로 진보했고 음악은 피타고라스에 의한 화음의 발견과 바흐에 의한 대위법의 발전으로 발전했다. 천문학은 망원경의 발명으로 시작되었고 의학은 온도계와 현미경의 기여가 크다. 특히 소실점의 발견은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점에서 각별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한 도구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대상을 연결하는 도구의 획득에 의해 인류는 진보한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내가 도구를 지배하여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관측대상에 매몰되지 말고 도구를 통제하며 점차 도구를 발달시켜 간다. 


    내가 권력적으로 도구를 지배한다는 점이 각별한다. 도구를 써서 대상을 계속 이겨간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눈으로 본다. 눈이 도구다. 관점이 도구다. 언어가 도구다. 대상에 접근하는 수단인 관측자와 관측수단과 관점과 언어에 대한 해명 없이 대상만 보고 뭔가 알아내려는 것은 핸들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이 자동차를 운전하려는 격이다. 


    주체의 관점은 관측대상과 나 사이에 도구를 끼워넣는다. 도구가 프로세스다. 나는 도구로 대상을 제압하고 통제하여 이긴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도구를 다루었는지가 중요하다. 지속적으로 이겨가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만 하면 돼. 쾌락만 하면 돼. 혁명만 하면 돼. 돈이면 다 돼. 이런 식의 대상 지상주의 곤란하다. 돼지의 행복 필요없고, 마약의 쾌락 필요없고, 원시사회주의로 퇴행하는 혁명 필요없고, 돈의 노예가 되는 성공 필요없다. 


    공자가 처음으로 그것을 일깨운 사람이다. 공자가 만든 것은 사제관계에 기초한 학자집단의 공론이라는 도구다. 노자에게 없고 석가에게 없고 플라톤에게도 없다. 대의와 명분을 기초로 한 상호비판과 검증에 따른 공론의 형성이 중요하다. 어떤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하고 끝내는 것이 퇴계의 실패라면 끊임없이 공론을 도출하여 전진하려고 한 것이 율곡의 성공이다. 이들은 원초적으로 가는 길이 다르다.


    빛은 광원에서 출발하여 광자와 피사체와 스크린을 거쳐서 영상을 도출한다. 그 중간과정이 도구다. 사건의 전체과정을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 서로 다른 두 사물을 개별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동시에 바라보자는 것이다. 한 줄에 꿰어 통짜덩어리로 봐야 한다. 구조론은 사물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운용하여 보는 것이며 이는 근본적인 시각교정이다. 


    소실점이 둘 이상의 피사체를 하나의 시점에 꿰어 동시에 보듯이 화음과 대위법이 두 개의 음과 조를 동시에 조율하듯이 사건은 작용측과 반작용측을 동시에 봐야 한다. 코끼리의 귀와 다리와 몸통을 동시에 본다. 각각 보고 중간에서 절충하면 망한다. 사건으로 엮어서 봐야 버스가 파리를 태우고 가는지 파리가 제힘으로 가는지 안다. 앞에서 이끌고 가는 것과 뒤에 묻어가는 것을 분별해낸다.


    구조론은 거대한 세계관의 전환이자 패러다임의 교체를 끌어내는 과학의 새로운 도구다. 인류사 1만 년의 성취와 맞먹는 것이며 동시에 그간의 성취를 뒤엎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인류가 천동설의 세계관을 잘 다듬어 놨는데 코페르니쿠스가 한순간에 엎어버렸다. 지동설의 대두다. 구조론은 세상을 해석하고 재현하는 새로운 도구다. 지금까지 눈으로 봤지만 이제는 도구로 봐야 한다. 




[레벨:15]오세

2019.12.27 (12:58:41)

AI시대의 새로운 언어, 구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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