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이야기 구조론은 세상을 구조로 설명한다. 구조가 아니면 속성이다. 구조는 둘이 엮여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속성은 하나의 대상에 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둘이냐 하나냐다. 구조는 항상 둘로 짝지어 존재하고 속성은 그냥 하나로 존재한다. 구조론은 어떤 둘이 만나서 짝짓는 방식이 사물의 성질로 나타난다는 개념이다. 짝짓기 방식은 무한하므로 구조론은 세상의 다양성을 모두 커버할 수 있다. 속성은 잘 모를 때 얼버무리는 말이며 비과학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성질에 따라 사물을 분별한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단 것은 성질이다. 그 성질이 어디서 왔느냐다. 어떤 둘 사이의 간격에 그 성질이 숨어있다고 보는 관점이 구조론이다. 보통은 막연히 고유한 속성으로 성질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속성은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소금은 원래 짜고 설탕은 원래 달다. 이는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고 인간의 접근 한계를 정한 것이다. 봉건시대라면 설탕이 왜 달고 소금이 왜 짠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며 과학을 해 왔던 것이다. 즉 인류는 그동안 세상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생물은 진화로 설명할 수 있다. 무생물은 무엇으로 설명하는가? 우주는 무엇으로 설명되는가? 우리가 자연에서 1차적으로 얻는 것은 정보다.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짜다는 것은 정보다. 그 정보는 어떤 관측의 결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원인은? 그것이 속성이다. 인간이 혀로 느낀 맛이 결과라면 원인은 설탕이나 소금의 성분이 혀에 화학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사물의 내재한 속성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는 있다. 방울을 흔들면 소리가 난다. 방울을 쪼개보면 속에 작은 쇠구슬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성질이 대상에 내재해 있다면 그 내부를 쪼개보면 어떨까? 곤란해진다. 쪼개면 더 작은 것이 나오는데 그것을 쪼개면 더 작은 것이 나온다. 언제까지 계속 쪼개고 있어야 하는가? 우리가 얻는 것은 정보다. 정보의 근원이 내재하지 않고 외재한다면 쪼갤 필요가 없다. 그 경우는 속성이 부정된다. 그런데 정보가 외부에 떠돌아다녀도 곤란하다. 그것을 어떻게 포획하지? 구조론으로 보면 정보는 둘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러므로 내부를 쪼갤 필요도 없고 외부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잡으려고 잠자리채 들고 쫓아다닐 필요도 없다. 정보는 어떤 둘 사이의 경계면에 걸쳐져 있다. 걸치는 방식이 구조다. 둘이 만나는 시공간적 방식이 정보의 내용을 결정한다. 다만 관점의 변화가 요구된다. 구조를 보려면 둘을 떼어서 각각 보지 말고 둘 사이를 동시에 봐야 한다. 그것이 주체의 관점이다. 관측대상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방법으로 대상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대상을 앞에 놓고 무의미한 실험을 반복할 필요가 없고 내가 관측방법을 바꾸는 방법으로 한꺼번에 모두 알아낼 수 있다. 이에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과 태도의 변화가 요구된다. 거대한 패러다임의 교체가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1차적인 정보다. 추론하여 그 정보의 출처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물질의 고유한 속성에 그것이 숨어있다고 믿는다. 금이 금이고 은이 은인 것은 그러한 성질이 금속 내부에 숨어있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구조론은 그 성질이 대상 자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둘의 엮이는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관계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경우가 많다. 그 관계를 사건의 계에 가두어 시스템으로 고정시키면 구조다.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구조다. 관계를 시스템으로 고정시켜 구조를 도출하는 방법은 사건 안에서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다. 사건은 계에 에너지가 작용할 때 입력에서 출력까지 진행되는 내부모순의 처리과정이다. 계가 어떤 방식으로 에너지의 모순을 처리하느냐에 따라 구조가 결정된다. 내부에서의 의사결정이 외부에 정보로 드러난다. 우리는 외부에 드러난 정보를 보고 내부에 어떤 속성이 숨어 있다고 믿지만 이는 막연한 표현이고 실제로는 의사결정구조가 작동하고 있다. 계 내부의 에너지 모순을 처리하고 있다. 우리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정보는 그 모순의 처리결과로 얻어진 값이다. 구조는 어떤 둘의 만남 형태로 성립한다. 물이 흐르는 것은 물에 흐르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 때문이다. 꽃이 예쁜 것은 꽃에 스며든 미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나비나 벌과 만나는 방식 때문이다. 어떤 것을 그것답게 규정하는 원인은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게 아니라 외부환경과의 관계로 안팎에 걸쳐져 구조화되어 있다. 구조는 속성을 대체한다. 불교용어로 말하면 '자성自性은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성은 어떤 둘의 만남 형태로 안팎에 걸쳐져 있다. 그것이 석가의 연기법이다. 2500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 아저씨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것은 사건 속에서 작동하는 의사결정구조다. 구조는 내부에서 모순을 처리하고 우리는 외부에서 정보를 획득한다. 각각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이룬다. 만유는 사물의 고유한 속성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구조의 연결로 이루어졌다. 모순을 처리하면 그 남겨진 결과가 또 다른 모순을 야기하므로 구조는 널리 복제되어 망라된다. 천하는 비로소 이루어진다. 사건은 내부에 고유하지 않고 안팎에 걸쳐져 있으므로 외부와 연결된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복제된다. 그러므로 큰 세계를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주는 개별적인 여러 가지들이 어떤 이유로 모여들어 이루어진 하나의 집합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의 커다란 연결망이다. 본래의 하나가 짝짓기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펼쳐진 것이다. 우주는 연출된 존재다. 구조론과 원자론 우리는 속성개념으로 접근한다. 속성은 사물에 내재해 있다. 내부를 보려면 쪼개야 한다. 쪼개면 양파껍질처럼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단위가 필요하다. 맺고 끊는 지점이 필요하다. 구조론은 사건을 단위로 보는 관점이다. 사건이 아니면 사물이다. 우리는 주로 고체 형태의 사물을 단위로 삼아 대상에 물리적으로 작용하여 보고 반작용으로 돌아오는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으로 관측하지만 중력이나 전자기나 열이나 힘은 사물을 단위로 삼는 방법으로는 관측되지 않는다. 액체나 기체나 플라즈마와 같은 유체도 마찬가지다. 사물이 공간상에 위치해 있다면 사건은 시간상에 펼쳐져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정확히 말하면 사건은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의 연속적인 전개과정이다. 우리는 공간의 사물에서 속성을 찾으려고 하지만 곧 원자론의 한계를 만나게 된다. 사물은 덩어리가 커서 내부사정을 알 수 없으므로 잘게 쪼개서 내부를 들여다봐야 한다. 쪼개다 보면 원자를 만난다. 원자는 쪼갤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막연한 표현이다. 왜 쪼갤 수 없다는 말인가? 원자의 크기가 작아서 인간의 기술적인 한계에 직면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원래 내부가 없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사실은 쪼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양파껍질을 계속 까다가 같은 짓을 반복하려니 허무해서 포기하는 것이다. 구조로 보면 답을 얻는다. 정보를 까서 시간을 얻고, 시간을 까서 공간을 얻고, 공간을 까서, 물질을 얻고, 물질을 까서 에너지를 얻는다. 만유는 에너지의 방향성 하나로 모두 설명된다. 원자의 쪼갤 수 없다는 개념은 양파껍질을 계속 까다가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패턴의 반복 앞에서 좌절한 것이다. 방향이 틀렸다. 내부를 쪼개지 말고 안과 밖의 경계를 쪼개야 한다. 그럴 때 더 이상 쪼개면 안 되는 에너지의 방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에너지의 공급이 끊어지고 사건의 진행이 멈추는 지점을 포착하게 된다. 정보의 반복에서 시간성을 유도하고, 시간의 변화에서 공간성을 유도하고, 공간의 대칭에서 물질성을 유도하고, 물질의 경계에서 에너지의 일원적인 방향성 곧 엔트로피의 법칙을 유도해내면 사건의 전모가 확보된다. 거기서 더 이상 쪼개면 안 되는 사건의 단위를 포착하게 된다. 원자개념을 고안한 것은 단지 단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위는 맺고 끊는 지점이다. 단위를 근거로 일을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 해가 넘어가면 하던 일을 멈추듯이 추론하다가 단위를 만나면 거기서 멈춘다. 그런데 사물에는 분명한 단위가 없다. 우리는 낱낱의 열매를 단위로 삼지만 과일은 나무와 연결되고 나무는 지구와 연결되어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세포를 하나의 단위로 볼 수 있지만 세포를 떼내면 죽는다. 사물의 단위는 인간의 편의적 설정일 뿐 명확하지 않다. 단위가 없으면 하던 일을 끝낼 수 없으므로 마땅히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이를 원자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단위는 사물에 없고 사건에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 학위를 받고 공부를 멈춘다. 학위의 형태로 공부를 멈출 수 있는 근거를 획득한 것이다. 축구는 전후반 90분으로 끝나고, 야구는 9회로 끝나고, 농구는 4쿼터로 끝나고, 배구는 3세트로 끝난다. 원인은 결과로 끝나고, 시작은 종결로 끝나고,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머리는 꼬리로 끝난다. 플롯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끝나고 한시는 기승전결로 끝난다. 사건에는 당연히 단위가 있고 단위를 쪼개면 시합이 무효가 된다. 그러므로 단위는 쪼갤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둘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구조는 원래 끊을 수가 없다. 끊음은 만남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관계를 끊으면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다. 통화중에 전화를 끊을 수 없다. 의사소통은 실패다. 똥누다가 중간에 자를 수 없다. 에너지는 입력으로 시작하여 출력까지 전개해야 한다. 그래야 대응할 수 있다. 투수가 공을 던졌는데 날아가는 공을 중간에 세워놓고 작전타임을 가질 수 없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원자를 쪼갤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는 쪼갤 수 없는 한계를 현실에서 무수히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경험칙이다. 맨손으로는 밤송이를 깔 수 없다. 맨손으로 호두를 깔 수도 없다.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를 뽑을 수도 없다. 그런 경험의 원용이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인간은 다양하며 찾아보면 엉덩이로 밤송이를 까는 사람도 있고 맨손으로 호두를 까는 사람도 있다. 사실 쪼갤 수 없는 것은 공간 속의 존재가 아니라 시간 속의 사건이다. 우주는 쪼갤 수 없는 공간의 원자가 아니라 끊으면 안 되는 시간의 사건으로 되어 있다. 사건을 구성하는 것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곧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다. 공간과 시간은 원래부터 그냥 있고 세상은 그 시공간의 좌표 위에 덧입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건을 연결하는 에너지의 변화가 물질과 공간과 시간과 정보를 도출한다. 태초에 에너지가 있었다. 에너지가 고유한 활동성에 의해 출렁거리다가 우연히 구조적으로 얽혀서 계를 이루면 외력의 작용에 맞서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으로 가는 물질현상을 연출한다. 물질은 곧 엔트로피다. 어떤 계가 움직이려면 동력이 필요하고 동력은 수학적 효율성에서 얻어지며 효율성은 계 안에서 방향과 순서의 감소로 얻어진다. 방향의 효율화가 공간을 만들고 순서의 효율화가 시간을 낳는다. 사건의 근거는 엔트로피다. 존재는 공간의 사물이 아니라 계를 중심으로 시간상에 진행되는 사건이며 사건은 반드시 움직이고 움직이려면 힘이 필요하고 힘은 계 내부의 구조적 효율성에서 얻어지며 효율성은 엔트로피의 증가법칙에서 수학적으로 유도된다. 사건의 전개는 효율성을 소모하므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거기서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시작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원인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어 만유의 단위가 된다. 단위를 얻었다면 모두 얻은 것이다. 단위에는 완전성이 있고 그것은 복제되기 때문이다. 복제되면 응용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 속성개념은 자연의 단위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원자개념는 인간의 한계를 결정하는 무언가가 자연에 있다면 대략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정에 불과하다. 그런데 틀렸다. 단위는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공간에 걸쳐져 있으며 사건의 완전성 형태로 존재한다. 계가 외력의 작용을 만나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진행하며 의사결정구조를 작동시켜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는 완전성이야말로 진정한 존재의 단위가 된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 물리적으로 작용하여 반작용의 형태로 되돌아오는 정보를 보고 거기에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인식한다. 반작용한다는 것은 그 관측대상이 외부에서 작용하는 에너지를 어떻게든 처리하여 내적인 구조의 모순을 해결했다는 의미다. 그것이 근원의 완전성이며 이는 공간의 물질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 사건의 형태로 진행되는 시공간적 과정이라는 점이 각별하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생물이 진화론으로 설명된다면 무생물은? 우주는? 존재는? 인류의 뚜렷한 설명법은 없다. 대략 속성개념이나 원자개념으로 얼버무린다. 속성개념은 인간의 현실적 한계를 정한 것이지 납득할만큼 설명한 것이 아니다. 잘 모르니까 이 정도만 하자고 선을 그은 것이다. 어떤 소금은 짜고 어떤 소금은 짜지 않다면 의심을 하고 더 파헤쳐보겠지만 모든 소금이 짜다면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포기한다. 그 포기선이 속성이다. 원자론은 그러한 현실적 한계를 정하는 근원이 자연에 숨어 있다면 대략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추정한 것이다. 이는 얼버무리는 말일 뿐 진지한 태도가 아니다. 현실적 한계 앞에서 좌절하여 타협하고 절충하는 비과학적인 행동이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류의 확실한 설명법은 없다. 이에 구조론이 제안된다.
○ 구조론 - 세상을 구조로 설명한다.
○ 구조론 – 어떤 둘 사이에 정보를 싣는다.
○ 구조론 – 둘 사이를 동시에 보는 통합적 관점이다.
○ 구조론 – 공간과 시간을 합쳐서 동시에 보는 관점이다.
○ 구조론 – 합쳐서 보므로 관측자의 위치가 중요한 주체의 관점이다.
○ 구조론 – 사건의 원인에서 결과까지 진행과정을 단위로 삼아 추론한다.
○ 구조론 – 사건 속에는 계 내부의 에너지 모순을 처리하는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 구조론 – 사건을 쪼개면 사건의 진행이 중단되므로 쪼갤 수 없다.
○ 구조론 – 계 내부의 에너지 모순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수학적 원리에 따른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에 의해 물질과 공간과 시간과 정보가 연출된다.
○ 구조론 – 물질현상은 엔트로피의 방향성 하나로 전부 설명된다.
○ 구조론 – 물질의 운동하는 힘은 계 내부에 갖추어진 의사결정구조의 수학적 효율성에 의해 조달되고 그것이 물질의 공간성과 시간성으로 연출된다.
○ 구조론 – 전체를 한 줄에 꿰어 엔트로피의 법칙 하나로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 정보를 모두 설명하는 점에서 일원론이다.
○ 구조론 – 물질과 공간과 시간과 정보는 계를 이룬 에너지가 외력의 작용을 만나 내부모순을 처리하는 과정에 연출되는 수학적 과정일 뿐 별도의 존재자가 아니다.
○ 구조론 – 관측자가 사건의 출발점이 되는 원인측에 서서 의사결정구조를 중심으로 하고 결과측을 바라보는 연역적 관점이다.
○ 구조론 – 세상은 하나의 존재가 무한히 나누어진 바 사건의 복제와 연결이다.
○ 구조론 – 세상을 의사결정구조로 보고, 사건의 진행과정으로 보고, 현재진행형의 프로세스로 보고, 어떤 둘의 만남으로 보고, 환경과의 긴밀한 관계로 본다.
○ 구조론 – 하나의 구조가 여러가지 정보를 생산하므로 세상을 통합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 구조론 – 구조는 어떤 둘이 공유하므로 다름 속에서의 같음에 주목한다.
○ 구조론 – 관측도구를 가지고 관점을 지정하여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본다.
○ 구조론 – 도구를 써서 관측대상을 통제하여 정보를 획득하므로 관측자가 관측대상과의 게임에 이겨서 정보를 뺏어내는 즉 의식적으로 보는 능동적 행위다.
○ 구조론 – 계 내부의 사정에 따라 원인에서 촉발하여 의사결정을 거쳐 결과까지 진행하여 모순을 처리하는 완전성이 존재와 인식의 단위다. 구조론과 원자론 혹은 속성으로 보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구조론은 통합적으로 보고, 주체의 관점으로 보고, 서로의 같음에 주목한다. 원자론은 분석적으로 보고, 대상의 관점으로 보고, 서로의 다름에 주목한다. 구조론은 관측자가 도구를 써서 관측대상을 이겨서 정보를 빼앗는 능동적 행위이고 원자론은 정보가 저절로 인간의 내부로 침투하여 보여짐을 당하는 수동적 자세다. 그러므로 둘은 양립할 수 없다. 이제 구조론을 취하고 원자론을 버려야 한다. 속성개념으로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원자론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구체적인 콘텐츠가 없는 막연한 것이다. 기초가 없다. 추론의 시작점과 종결점이 없다. 잘 모르겠으니까 더 이상 파헤치지 말자는 암묵적인 약속이다. 일종의 휴전선언이다. 이제 그 선을 넘을 때가 되었다. 이에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신이 세상과 대립하여 서는 위치를 바꿔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깨달음이라고 한다. 시작과 멈춤 ● 속성개념 - 어떤 것만 그러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면 그 차별의 요소를 의심하여 더 깊이 파헤치지만 모두가 그렇다면 포기하고 거기서 탐구를 멈춘다. 차별의 요소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한다. ● 원자론 - 비교와 차별의 방법으로 더 이상 파헤칠 수 없는 물리적 한계 혹은 현실적 한계를 만나면 거기서 탐구를 멈춘다. 혹은 더 이상 파헤칠 수 없게 한계를 정하는 성질이 물질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추정한다 ● 구조론 - 만유의 서로 연결하고 단절하는 의사결정구조의 완전성을 추론의 단위로 삼아 탐구를 시작한다. 완전성을 탐구의 시작점으로 삼되 멈춤이 없이 널리 연결한다. 기점을 얻어 일방향으로 계속 전개한다. 속성개념과 원자론은 비교차별의 방법으로 접근하다가 인간의 멈추는 지점을 정하지만 구조론은 반대로 인간의 시작점을 정하며 멈추지 않고 계속 연결해 간다. 시작점이냐, 멈춤점이냐로 바라보고 진행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점이 각별하다. 시작이 여럿이고 멈춤이 하나라면 곤란하다. 나무는 뿌리에서 시작하여 가지에서 멈춘다. 원자론은 뿌리가 여럿이고 가지가 하나라서 2인3각 경주처럼 혼란하지만 구조론은 뿌리가 하나고 가지가 여럿이라 큰 나무처럼 보기가 좋다. 인간은 똑같이 태어나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죽는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서 똑같이 죽는다면 그것은 몰살이니 이상하지 않은가? 시작이 같고 근본이 같고 원리가 같지만 펼쳐지는 모습은 진행과정에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각기 다르다. 시작이 다르고 근본이 다르고 원리가 다른데 끝이 같다면 그것은 교통사고와 같이 외부충격에 의한 몰살이다. |
"계가 외력의 작용을 만나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진행하며 의사결정구조를 작동시켜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는 완전성이야말로 진정한 존재의 단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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