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구조는 연결이다. 믿음은 연결이다. 구조는 자연을 연결하고 믿음은 마음을 연결한다. 연결하면 중심과 주변이 생긴다. 전체와 부분으로 갈린다. 거기서 에너지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사건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방향성이 있다. 의사결정은 언제라도 모두 연결된 전체에서 일어난다. 전체가 부분에 앞선다. 이것이 질서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여기서 일의 우선순위가 결정되고 만물의 질서가 태동하니 구조론의 출발점이다. 문제는 인간의 관측이다. 우리는 연결이 끊어진 각각의 부분을 개별적으로 관측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부분을 각각 떼어서 별도로 관측한다. 에너지의 연결망을 포착하지 못한다. 핵심을 놓친다. 부분에는 에너지가 없다. 전체를 관측해야 전모를 파악할 수 있지만 전체는 움직이므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림자나 보는 편이다. 관측하려면 연결해야 하는데 정지한 것을 연결하기 쉽고 움직이는 것을 연결하기 어렵다. 움직이는 것을 관측하는 방법은 나란히 움직이는 것이다. 빛을 관측하려면 광속으로 따라붙어야 한다. 비행기의 공중급유와 같다. 나란히 함께 가면서 상대적인 정지상태를 도출하지 않으면 관측할 수 없다. 왜 인간은 무언가를 믿으려고 하는가? 나란히 함께 가려는 것이다. 신에 의지하려면 신과 나란히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방향이 일치해야 한다. 신의 반대편에서 요구조건을 내걸고 신과 흥정하려고 한다면 곤란하다. 구조론은 유물론도 아니고, 유심론도 아니고, 이신론도 아니고, 무신론도 아니다. 신은 존재하여 있지만 인간이 상상하는 인격신은 아니다. 수염이 난 할아버지가 아니다. 우주가 모두 연결되어 통일적으로 존재하므로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의 의사결정 중심이 있다. 내가 중심으로 다가갈 뿐 내게로 신을 호출할 수 없다. 방송국은 라디오를 호출할 수 있지만 라디오는 방송국을 불러낼 수 없다. 인간은 허무를 두려워하고 의미를 찾는다.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키는 것이 의미다. 연결이 끊어지면 허무다. 우주가 내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고 내가 우주로 다가가야 한다. 전체가 부분 속에 들어갈 수는 없고 부분인 내가 전체로 나아가야 한다.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인간을 감시하고 심판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교묘한 속임수를 써도 신은 진상을 알아낸다는 말이다. 그런데 찌질하다. 민간인 사찰을 해도 난리가 나는 마당에 신이 인간을 사찰하다니 말이나 되나? 신이 누군가의 침실을 엿보고 화장실에서 하는 말을 엿듣고 있다는 말인가? 문제는 그런 행동이 선수가 아니라 후수라는 점이다. 인간이 일을 저질러 선수를 친 시점에 신의 전지전능은 깨졌다. 뒷북치는 신은 신이 아니다. 인간이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막아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신이 전지전능한 게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제한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피부색과 성별과 국적으로 제한된다. 부분은 전체에 의해 제약당한다. 질문이 먼저고 해답이 뒤따르므로 이미 제약당한다. 미래는 과거에 제약당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한다. 승은 기에 제한되고 전은 승에 제한되고 결은 전에 제한된다. 결과는 원인에 제한되고 응답은 부름에 제한된다. 이는 우주의 질서다.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답변을 제출할 수 없다.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에 타자가 칠 수 없고, 용한 소방수라도 켜지지 않은 불을 끌 수는 없다. 걸리지 않은 병을 치료할 수 없고 먹지 않은 밥을 배설할 수 없다. 반대로 신은 인간을 제약한다.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사건의 발전을 제약하는 존재다. 전지전능은 언어적으로 모순이다. 우주에는 합당한 질서가 있다. 그것은 사회에서 권력으로 나타나며 권력은 선행이 후행을 제약한다. 권력의 제약하는 속성을 설명하려다가 대충 얼버무린 말이 신의 전지전능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권력의 제약하는 성질에 의지하는 것이다. 만유의 연결은 그러한 제약에 의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제약되지 않고 오버한다면 존재는 파탄난다. 만약 타임머신에 의해 미래가 과거를 침범한다면 현재는 파탄난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미래에서 현재로 잔뜩 와서 지구가 무거워져서 궤도를 이탈할 판이다. 50억 년 후에는 지구가 망하는데 다들 과거로 도망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결과가 원인을 친다면 우주는 깨진다. 사회에는 권력이 제약하고 자연은 질서가 제약한다. 구조는 연결이다. 믿음은 연결이다. 공간으로도 연결되고 시간으로도 연결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줄에 꿰어져 일관되어야 한다. 보수가 나쁜 것은 그 연결선을 끊기 때문이다. 왜? 진보에 의해 역사는 연결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달이 없다면 고대와 중세와 현대와 미래가 연결되지 않는다. 진보로 시간은 연결된다. 연결의 단위가 있다. 그것이 완전성이다. 찢어진 북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북이 찢어지면 음악으로 청중과 연결되지 않는다. 썩은 씨앗은 싹이 트지 않는다. 썩은 씨앗은 수확으로 농부와 연결되지 않는다. 신을 중심으로 사유하고 완전성을 중심으로 소통해야 한다. 인간이 찾는 의미는 그 안에 있다. 귀신이 없고, 영혼이 없고, 천국이 없고, 내세가 없고, 천사가 없고, 악마가 없고, 사탄이 없는 것은 우주의 완전성을 파괴하여 그 연결을 끊기 때문이다. 생각하라. 영혼이 있고 내세가 있고 천국이 있고 뭔가 잔뜩 플러스 되어 있는 것보다 그것들이 없는 것이 더 멋지지 않는가 말이다. 대신 질서를 얻고 완전성을 얻게 되잖아. 대신 우주의 통일성과 진보의 일관성이 있잖아. 그러므로 신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잖아. 의지할 수 있잖아. 귀신, 영혼, 천국, 내세, 천사, 악마, 요정, 유령, 심판, 부처, 미륵, 염라, 옥황, 사천왕, 저승사자, 산타할배, 삼신할멈 따위가 잔뜩 끼어들어 개판쳐 버리면 우주의 단일성은 파괴되고 만다. 권력이 망하고 마는 것이다. 자연은 아름다움이 권력이다. 사회는 신뢰가 권력이다. 자연은 질서가 권력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 권력의 자연스러움 흐름 속에 녹아들고자 하는 것이다. 권력은 일의 다음 단계를 제약한다. 스승은 제자를 제약하고, 부모는 자식을 제약하고, 선수는 후수를 제약한다. 원인은 결과를 제약하고, 부름은 응답을 제약한다. 제약하므로 경우의 수가 줄어서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럴 때 연결된다. 그럴 때 솔로는 연결되어 커플이 되고, 백수는 연결되어 직원이 되고, 만인은 연결되어 동료가 된다. 연결되어 커다란 네트워크를 이루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전진하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가치를 찾고 의미를 얻는다. 각자의 자리는 그곳에 있다. |
"자연은 아름다움이 권력이다. 사회는 신뢰가 권력이다. 자연은 질서가 권력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 권력의 자연스러움 흐름 속에 녹아들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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