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과 응답 인간은 만남을 원한다. 남녀의 만남은 만남의 한 가지 형태일 뿐이고 여기서 만남은 구조론 용어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부름과 응답이다. 그대가 나를 불러주기를 원하고 나의 부름에 그대가 응답해 주기를 원한다. 진리를 만나고 문명을 만나고 역사를 만나고 진보를 만나고 신을 만나야 한다. 세상 전부와 만나야 한다. 사람을 만나든, 진리를 만나든, 자연을 만나든, 만남으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그럴 때 인간은 전율한다. 그러나 그 만남의 기쁨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가 없으므로 누가 물어보면 소득을 원한다고 말한다. 소득은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는 증거다.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콤플렉스의 보상이다. 비뚤어졌다. 소유하고 획득하고 쟁취하려는 것은 남들 앞에서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학생이나 어린이에게 필요한 행동이다.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엄마한테 말한다. 하루동안의 일을 보고하고 싶어한다. 고양이의 꾹꾹이는 엄마의 젖을 잘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다 컸는데 꾹꾹이를 한다. 아기 때의 버릇이 어른까지 가면 곤란하다. 어른이면 보고하기보다 반대로 보고받고 싶어야 한다. 사건의 기에 서야 승전결의 보고를 받는다. 이끄는 자가 되어야 따르는 자의 보고를 받는다. 초등학교 4학년만 되어도 엄마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대신 친구들과 정보를 공유한다. 보고하고 칭찬을 듣자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성공, 행복, 출세, 재산, 미인, 쾌락, 행복, 욕망의 추구는 집단에 보고하려는 사회적 본능의 소산이다. 소인배의 아부행동이다. 꿀벌은 꽃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8자 모양으로 춤을 춘다. 꿀벌 무리에게 발견한 꽃의 위치를 보고하는 것이다. 개가 짖어대는 것도 새가 지저귀는 것도 무리에게 사건을 보고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사건이 종결되어야 보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는 사건이 종결된 뒤의 보고가 아니라 사건을 일으켜서 기에 서서 승전결을 확보하는데 있다. 승전결의 보고를 받는데 있다. 만남을 일으켜야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의 다음단계로부터 보고를 받을 수 있다. 부름이 있어야 응답이 있다. 호응이 있다. 의미가 있다. 모든 사건은 어떤 만남으로 시작된다. 거기서 에너지가 작동한다. 계를 이루어 에너지를 틀어쥐고 운용하는 것이 의미있다. 뒤에 따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기쁨은 독자가 따르는데 있고, 가수의 기쁨은 청중이 따르는데 있고, 부모의 기쁨은 자녀가 따르는데 있고, 스포츠맨과 연예인의 기쁨은 팬이 따르는데 있다. 상사의 기쁨은 부하가 따르는데 있고, 투자자의 기쁨은 이윤이 따르는데 있고, 농부의 기쁨은 수확이 따르는데 있다. 수확이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켜 가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소득을 강조하는 것은 타인의 눈앞에 전시하여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명하려고 애쓴다면 이미 틀려먹은 것이다. 집을 지어도 만남의 집을 지어야 한다. 자신의 성공을 증명하고 확인도장 받으려는 식은 곤란하다. 화려한 집을 지어봤자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다. 과시적인 건축은 곤란하다. 조경을 해도 만남의 조경을 해야 한다. 내 보기에 좋더라는 식은 유치한 거다. 좋은 것은 좋지 않다. 옷이 좋다면 옷이 좋지 사람이 좋냐? 옷을 입어도 만남의 옷을 입어야 한다. 음악을 들어도 만남의 음악이 좋고 그림을 그려도 만남의 그림이 좋다. 심리적으로 보상받는 집, 보상받는 조경, 타인에게 인정받는 옷, 인정받는 음악은 좋지 않다. 이발소그림이 최악인 이유는 따스한 행복감을 주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행복감이 필요할 만큼 심리적으로 궁핍하다. 신대륙으로 건너와서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고 하루 14시간 노동하며 고생 끝에 낙이 와서 이제 살 만큼 되었으니 한시름 놓고 나 이렇게 벌었노라 하고 칭찬받고 싶은 그 마음을 들킨다. 속 보인다. 그림 속에 주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 마음은 어리광부리는 미성숙한 마음이다. 만날 수 없다. 누가 찾아오겠는가? 만남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추사의 세한도는 비워놓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집에 담장이 없다. 주인도 없다. 가구도 없다. 누구든 들를 수 있고 쉬어갈 수 있다. 그냥 지나가도 된다. 호객행위는 없다. 억압도 없고 애걸도 없다. 만남을 그리라 하니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처럼 둘이 만나는 장면을 그리려 하면 곤란하다. 부름과 응답의 그림이어야 한다. 건축 속에 부름이 있고 응답이 있어야 한다. 부름과 응답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 박진감이 있어야 한다. 기세가 있고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어우러짐이 있어야 한다.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조경에, 패션에, 문학에, 음악에, 그림에, 소설과 시에 그것이 있어야 한다.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냥 좋은 것을 찾자면 마약을 먹으면 된다. 1분 만에 행복해질 수 있다. 그 안에 만남이 없고, 부름이 없고, 응답함이 없고, 어우러짐이 없고, 기세가 없고, 에너지가 없다. 사건이 있어야 하고,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다음 단계가 있어야 한다. 문자향 서권기가 있어야 한다. 너무 화려하면 손님이 거부감을 가지고 도망가게 된다. 너무 소박하면 성의가 없어 보인다. 짜증난다. 손님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려고 하는 졸부의 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 개념미술 핑계로 성의없이 조금 그려놓고 말로 때우려고 하는 북유럽식 태도 좋지 안다. 너무 많은 것을 꾹꾹 눌러 담으려 한다면 손님의 역할을 빼앗는 거다. 적절히 비우고 적절히 채워서 균형에 도달해야 한다. 슬그머니 운을 띄우고 적절히 힌트를 남겨 다음 타자가 자연스럽게 이어받게 해야 한다. 위압적이지 않고 무성의하지 않아야 한다. 양념과잉 곤란하고 싱거워도 좋지 않다. 완벽주의 자랑하다 편집증으로 발전한다면 좋지 않다. 기교를 부려 관객의 혼을 빼놓고 감탄을 끌어내려 한다면 촌스러운 것이다. 품격이 있어야 한다. |
"모든 사건은 어떤 만남으로 시작된다. 거기서 에너지가 작동한다. 계를 이루어 에너지를 틀어쥐고 운용하는 것이 의미있다. 뒤에 따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무대를 설계하고 청중이 마지막을 장식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군요.
작품 안에서만 완전성을 찾으려고 하니깐 더 큰 완전성이 보이질 않는 것.
결국 소통하는 작품이 진짜 작품.
그런데, 단순히 현장에 있는 청중만 소통하면 예전 방식이고,
인터넷 시대에는 더 큰 관객과 소통을 하고자 하는게 현대 미술.
가령 반크시 같은 사람들.
모바일 시대에는 또다른 형태의 소통이 가능할 것으로 에상할 수도 있고.
그걸 찾아서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성공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