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시작하라 공자의 정명사상을 생각하자. 말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말을 바로 해야 한다. 미처 말을 떼지 못한 자들은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줄 수 없다. 도덕경 첫머리의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떠올려도 좋다. 도는 상도가 아니고 명은 상명이 아니다. 그대가 봤다면 잘못 본 것이고 그대가 말했다면 잘못 말한 것이다. 수학이 없으면 알아도 셈할 수 없고 구조론이 아니면 알아도 말할 수 없다. 도구가 없으면 이룰 수 없고 언어가 없으면 말할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행함이며 행해서 결과를 이루는 것이며 이루어 게임에 이기는 것이다. 말로 꾸며대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실전에 이겨서 게임의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간다면 인정한다. 거기서 끝나면 가짜고 다음 단계가 제출되면 진짜다. 보수가 가짜인 것은 그걸로 끝나기 때문이고, 진보가 진짜인 것은 그걸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멕시코국경에 장벽을 세우면 그걸로 사업은 끝이다. 장벽을 완성한 다음에 어떻게 한다는건 없다. 진보가 남북통일을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비로소 시작된다. 거짓인지 참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음 단계가 없으면 가짜다. 어떤 사람이 무한동력장치를 발명하여 10경 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한다고 떠든다. 기사로 써주는 기레기가 있다. 그런데 말이다. 뭣하러 한가하게 그런 장치나 만들고 있냐고? 논문을 발표하여 노벨상 받으면 장치는 남들이 알아서 만들어 줄 텐데 말이다.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에서 자신이 기에 서는 게 맞는데 결에 서겠다고 하면 가짜다. 좋은 거 놔두고 나쁜 거 선택하면 가짜다. 기에 권력이 있다. 자신은 논문만 쓰고 구체적인 성과는 남들이 내게 한다. 남들을 부려먹고 좋잖아. 굳이 손에 기름때 묻혀 가며 고생할 이유가 없다. 장치를 제작하면 가짜고 이론으로 증명만 하면 된다. 언어가 중요하다. 장자가 나비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자꿈을 꾸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나비는 장자 꿈을 꿀 수 없다. 장자가 나비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는 수학이다. '1+1은 어쩌면 2가 아닐지도 몰라.' 이런 말 하는 사람은 때려죽여야 한다. 이는 수학의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2는 1보다 크고 장자는 나비보다 크며 이는 수학의 약속인데 약속을 깬 것이다. 언어는 약속인데 그 약속을 깬다. 상도는 길이 나 있는 길이며, 상명은 말해져 있는 말이다. 진리는 상도가 아니니 길이 나 있지 않은 길이며, 상명이 아니니 말해져 있지 않는 말이다. 도는 자연 스스로의 약속이며 명은 약속될 수 있는 약속이다. 인간이 눈으로 본 도는 가짜이고 인간이 입으로 말한 약속은 거짓이다. 천안함부터 세월호까지 묻지마 음모론은 약속을 깨고 언어를 깬다. 언어는 자연의 사실을 담는 그릇이다. 사실을 왜곡할 필요조차 없다. 그 사실을 담는 그릇을 깨면 된다. 그릇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천하의 공물이니 그릇을 깨는 자는 천하에 도발한다. 도량형을 파괴하고 GPS를 교란하고 표준원기를 망가뜨리고 인터넷에 바이러스를 심고 유튜브에 가짜뉴스를 올린다. 인터넷 주소를 쓰되 WWW.HTTP//라고 무려 열 글자를 쓸데없이 타이핑하게 복잡한 규칙을 만든 자도 때려죽여야 한다. 인류를 골탕 먹이려고 괜한 짓을 한 것이다. 천하의 흡혈귀 빌 게이츠보다 흉악한 자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인류의 공물인데 사유화한다. 아우토반은 톨게이트가 없고 요금이 없다. 공물이다. 그런 게 진짜다. 세종대왕이 한글 특허 내서 로열티 받았나 말이다. 천하의 공물을 임의로 건드리는 자는 쳐죽여야 한다. 언어를 깨는 언어는 언어도단이니 언어가 아니다. 대화할 이유가 없다. 몽둥이로 해결하는 게 정답이다. 한 살짜리 아기가 아인슈타인과 대화하면 누가 이길까? 한 살짜리 아기의 옹알이 공격을 아인슈타인은 당할 수 없다. 말로 다투면 당연히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 서울 가본 사람은 낱낱이 증명해야 하므로 말이 이치에 맞아야 하지만 서울 안 가본 사람은 꾸며내므로 이치에 맞다. 이치에 맞게 꾸며내면 되기 때문이다. 남대문 성문 앞뒤좌우에는 용이 네 마리 살고 있는데 각각 흑룡 백룡 황룡 청룡이라고 말해주면 믿는다. 뭔가 아귀가 맞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못 믿는 눈치면 음양오행을 들먹이며 사찰의 사천왕상을 연결시켜 준다. 그래도 안 속으면 동대문의 네 마리 호랑이 백호 흑호 황호 청호와 연결시켜주면 된다. 이 정도면 넘어간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는 하늘이 검게 보인다. 이는 안 가본 사람이 알 수 없는 지식이다. 대기권이라는 다음 단계가 제시된다. 궤변을 쓰는 사람은 대부분 혹시 아냐? 1이 2보다 클지도.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사실을 논하는 게 아니라 피아간의 규칙을 깨뜨리는 거다. 축구든 야구든 규칙을 깨는 자와 시합을 할 이유가 없다. 단매에 쳐죽여야 한다. 1이 2보다 크다면 그것은 수학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와 답은 호응한다. 원인과 결과는 호응한다. 자극과 반응은 호응한다. 시작과 종결은 호응한다. 인간의 대화는 호응과 호응의 연쇄고리로 이루어진다. 호응하지 않으면 대화는 깨진다. 음모론 따위 개소리는 언어의 대칭과 호응을 방해하는 것이다. 상대가 발언하는 도중에 마이크를 꺼놓고 논쟁에 이겼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폭력이다. 업무방해다. 대부분의 음모론 개소리들은 업무방해에 해당되는 폭력행위다. 논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널리 연결되기 때문이고 연결되어 마침내 하나가 되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핵심이 되는 하나를 증명하여 모두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주워섬기면 안 된다. 이걸 논파 당하면 저걸 제기하는 식으로 돌려막기식 발언을 한다면 한 살짜리 아기가 열변을 토하는 아인슈타인에게 그래봤자 나는 못 알아먹지롱. 너는 나를 설득할 수 없지롱. 하고 약 올리는 격이다. 그런 대화는 불성립이다. 아무나 게임의 판에 오르는 게 아니다. 게임할 자격을 얻어야 한다. 호응에 성공해야 자격을 얻는다. 프로토콜을 맞추지 못하는 자는 대화자리에 낄 수 없다. 언어는 규칙이 있고 규칙을 지킨다는 맹세를 하고 대화자리에 낄 수 있다. 나비는 장자꿈을 꿀 수 없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질서가 있어서 전부 한 줄에 꿰어지며 그러므로 논리가 있고 논리에 의해서 대화가 있는 것이다. 언어는 사실을 보증하는 수단이 아니라 연결하여 의미를 성립시키는 수단이다. 맥락이 중요하다. 글자에 뜻이 있는 게 아니고 연결에 뜻이 있다. 그것이 맥락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맥락을 무시하고 연결을 파괴하며 사실을 보증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책 몇 페이지에 쓰여 있다는 식이라 기억력 좋으면 이기는 게임을 한다. 근육이 안 생기면 스테로이드 주사 맞으면 되고, 키가 모자라면 줄 자를 잡아당겨 늘이면 되고, 가격이 안 맞으면 위조지폐를 쓰면 되고, 화장이 안 먹으면 뽀샵을 하면 되고, 사실로 못 이기면 언어를 파괴하면 되고, 야구를 못 이기면 우천중단을 기도하면 되고 이런 식으로 엉뚱한 짓 하는 자들을 타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행함이며 행해서 결과를 이루는 것이며 이루어 게임에 이기는 것이다. ~ 실전에 이겨서 게임의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간다면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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