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와 가치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사건이 중간에서 흐지부지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 의미다. 끝까지 가서 다른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이 의미다. 인생의 본질적 허무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 의미다. 인생이 허무한 것은 중간에 사건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탔는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야 한다. 버스 기사가 틀어주는 라디오에 레전드급 컬투쇼가 나오는데 이야기가 재미지다. 그런데 끝까지 듣지 못하고 다음 정거장에서 하차해야 한다면 허무다. 인생이 대개 그렇다. 문명의 진보라는 버스에 탔는데 중간에 하차하게 된다. 민주화에 일생을 바쳤는데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황금시대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내가 운전대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통제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버스가 아니라 자가용이라면 끝까지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진정한 믿음이 허무를 극복하게 한다. 봄에 심은 국화를 나는 보지 못하지만 내 자식은 가을에 꽃을 보게 된다. 믿음은 사건을 믿는 것이며 그 사건의 계속됨을 믿는 것이다. 사건에는 에너지가 걸려 있다. 그 에너지를 믿는 것이며 그 에너지의 방향성을 믿는 것이다. 사건은 시스템에 의해 작동한다. 그 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사건은 다른 사건과 연결하여 커다란 계통을 이룬다. 그 계통의 부단한 연결을 믿는 것이다. 행복이니 성공이니 출세니 하는 타인의 참견은 필요 없다. 내가 납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입력과 출력 사이에서, 부름과 응답 사이에서, 노동과 보상 사이에서,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서, 출품과 수상 사이에서, 노래와 앵콜 사이에서, 투자와 이윤 사이에서, 리플과 추천 사이에서 서로 아귀가 맞아떨어져서 납득하는 것이다. 행복이니 출세니 성공이니 하는 건 개인에게 가해지는 집단의 압박에 지나지 않는다. 남들의 참견은 필요 없고 본인의 납득이 중요하다. 21세기는 개인의 시대다. 가부장의 헌신 필요 없고, 애국주의 국뽕 필요 없고, 효자 마마보이 필요 없고, 성찰적 지성 필요 없고, 정치적 올바름도 필요 없고 내가 납득하고 인정하면 된다. 성찰적 지성이니 정치적 올바름이니 하는 것은 오마이뉴스나 한겨레가 남의 일에 참견하려고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지양되어야 할 소인배의 권력행동이다. 시시한 개소리에 넘어가지 말자. 적어도 나이가 열다섯 살을 넘겼거든 남들의 평가에 자신을 맡기지 말라. 극복해야 할 부족주의 본능이며 무의식의 압박이다. 인간은 또 가치를 추구한다. 가치는 대칭되어 의미를 이루는 둘 중에서 앞에서 이끄는 것이다. 사건의 원인측이 가치 있다. 반응하는 자가 되기보다 자극하는 자가 돼라. 결과를 제출하는 자가 되기보다 원인을 일으키는 자가 돼라. 나중에 범인을 체포하는 형사보다는 먼저 와서 사건을 일으키고 불을 지르는 자가 돼라. 응답하는 자가 되기보다 광야에 먼저 와서 목 놓아 부르는 자가 돼라. 시키는 대로 하고 보상받기보다 먼저 와서 게임을 설계하고 판을 짜는 사건의 주최측이 돼라. 사람들이 노상 의미타령 하고 가치타령 하지만 눈에 보이는 공간의 사물에서 답을 구하려들 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사건에서 구하지 않으니 어리석다. 다이아몬드가 루비보다 가치 있어 하는 식이다. 심는 것이 수확보다 가치 있다. 좋은 가방을 들고 있어도 가방이 인물 보다 돋보이면 망한다. 모델보다 옷이 돋보이면 망한다. 사람이 원인이고 장식은 결과다. 사람이 가치 있다. 문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출력은 확실히 모니터에 보이는데 입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결과는 홈런이니 눈에 보이는데 원인은 훈련이니 어디서 훈련하는지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있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고, 반응이 있으면 자극이 있고, 보상이 있으면 노동이 있고, 수상이 있으면 출품이 있고, 승객이 있으면 운전기사가 있다. 그것은 보려고 노력해야만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전달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있는 것이다. 집단에 기여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을 극복해야 한다. 본능이 하라는 대로 하다가 보면 허무해져 있고 몰가치해져 있기 다반사다.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 하나가 되어 있다. 입력하는 자가 되고, 자극하는 자가 되고, 부르는 자가 되고, 노동하는 자가 되고, 출품하는 자가 되고, 노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입력했는데 출력이 없고, 자극했는데 반응이 없고, 불렀는데 응답이 없고, 일했는데 보상이 없고, 출품했는데 탈락하고, 노래했는데 앵콜이 없을까 불안하지만 확률 속에 있다. 천하 속에 있다. 확률을 높였으면 된 것이다. 임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되어도 하나가 대표로 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우승컵을 들지 못해도 대표자의 탄생에 기여하면 된다. 에너지를 태워 불을 지르고 시스템을 만들고 계통을 이루면 언젠가 된다. 내가 결실을 눈으로 보지 못하더라도 알면 된다. 끝내 응답이 없어도 내 잘못은 아니다. 내가 할 만큼 했다면 납득할 수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대개 남이 일으킨 사건에 기생하며 묻어가려고 하므로 끝까지 가지 못한다. 허무해진다. 노무현 신드롬에 편승했다가 급하게 박근혜 신드롬으로 갈아탄 배신자 안철수의 무리가 그러하다. 중간에 에너지원을 바꾸면 망한다. 민주화에 줄 섰다가 독재세력으로 갈아탄 자들 있다. 그들이 어떤 결실을 얻든 본질에서 실패해 있다. 정동이 아니라 반동이기 때문이자. 정작용이 아니라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진보가 아니라 보수이기 때문이다. 편승하고 묻어가고 이용하려는 자는 결과와 상관없이 원초적으로 망해 있다. 그런 자와 결별해야 한다. |
"사건의 원인측이 가치있다. ~ 끝까지 가서 다른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이 의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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