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마이너스다
나는 도덕가를 싫어한다. 그런 사람 있다. 충성하라. 애국하라. 효도하라. 성실하라고 압박한다. 그들은 에너지가 넘친다. 사교성이 있다. 붙임성이 있다. 말주변이 좋다. 대인관계가 좋다. 한 번 본 사람 얼굴을 모두 기억한다. 눈치가 빠르다. 분위기를 잘 띄운다. 국회의원 해도 되겠다. 결정적으로 권력에 집착한다. 물론 그런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20세기의 덕목이다. 지금은 21세기다.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되는 시대다. 지금은 다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자기 인생 자기가 살아야 한다. 봉건 가부장은 필요 없고, 새마을지도자도 필요 없고, 부녀회장도 필요 없고, 동창회도 필요 없다. 통반장들도 없애야 한다. 믿음은 마이너스다. 공간의 선택에서 시간의 계통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서 혹은 선과 악 중에서 또 옳은 것과 그른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배웠다. 틀렸다. 계통을 연결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연결하려면 완전성이 중요하다. 굳이 좋은 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는 것은 똑같다. 공간에서의 선택으로 보면 좋은 것, 선한 것, 올바른 것을 가려서 선택해야 하지만, 시간의 연결로 보면 강렬한 것, 인상적인 것, 작더라도 완전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스위치와 같다. 이중삼중으로 튼튼하게 연결할 필요 없다. 스위치가 살짝만 접촉해도 전기만 통하면 된다. 봄의 파종은 가을의 수확을 믿는다. 계통을 연결할 때는 하나만 남긴다. 그러므로 믿음은 마이너스다. 부모의 믿음은 자식으로 이어진다. 자식의 믿음은 부모의 것을 계승한다. 믿음은 연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연결하고 있는가? 하루에 몇 번씩 기도하고 자선을 해야 한다면 켜진 스위치를 또 켜는 셈이다. 거추장스러운 플러스는 연결을 방해한다. 물길을 연결해도 그렇다. 살짝만 길을 터주면 물 자체의 흐르는 기세에 의해 그리고 자체의 치고 나가는 관성력에 의해 완벽하게 연결된다. 남녀의 만남이라도 그렇다. 전화번호만 건네주면 지들이 알아서 한다. 소개팅이라면 인사만 하고 들러리는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자녀가 면접 보러 가는데 엄마가 회사까지 따라가서 우리 애 잘 봐달라고 면접관에게 부탁하는 나경원스러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회사와 취준생의 연결을 방해하고 있다. 플러스는 연결의 방해자다. 세상은 연결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것이다. 플러스 통제도 물론 있지만 대개 망해 있다. 허접한 하류들에서나 먹힌다. 믿음은 연결이며 연결의 라인은 하나여야 하므로 신의 숫자는 적어야 한다. 다신교는 변덕을 부린다. 신들 사이에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다. 연결이 끊어진다. 한 남자가 혹은 여자가 어장관리하며 여럿을 사귄다면 결혼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물론 어장관리로 성공하는 케이스도 있지만 이미 B급으로 내려와 있다. 믿음은 어떤 강력한 대상을 따르는 게 아니라 계 안의 에너지 통제구조 속에서 호흡하며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을 얻는 것이다. 대상을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을 예측가능한 상태로 두는 것이다. 미국인은 계약서에 매우 공을 들이고 일본인은 매뉴얼에 공을 들이듯이 자기 일관성을 담보하는 확실한 장치가 있어야 한다. 중국인은 대놓고 흥정하려고 하는 데 좋지 않다. 한국인들은 계약서도 없이 매뉴얼도 없이 일단 일을 시작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뒤에 바로잡으려 한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믿는 건데 이는 장단점이 있다. 작은 일은 되는데 큰일은 안 된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명문화된 원칙이 있어야 한다. 질서가 있어야 한다. 미국의 유명 빵집 체인 '파네라 브레드’의 공짜빵집 실험이 실패한 것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빵을 파는 게 아니라 질서를 파는 것이다. 연결을 파는 것이다. 인간의 선의라는 것은 플러스다. 실패한다. 빵집을 찾는 노숙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과의 연결이다. 일이 다음 단계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막연한 다양성 속에 숨으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 빛은 섞을수록 하얗게 되고 잉크는 섞을수록 까맣게 된다. 다양할수록 획일화된다. 연결을 방해하는 것이다. 중국음식처럼 모든 요리에 중국맛이 나게 된다. 원재료의 맛을 알 수 없게 된다. 중국요리에서 죽순을 먹고 오월의 싱그러운 대나무밭을 떠올리기 어렵다. 해삼을 먹고 바다내음을 떠올리기 어렵다. 너무 참견이 많아진 소스가 마음으로의 연결을 방해하는 것이다. 믿음은 마이너스를 마이너스하는 것이다. 손실을 줄이는 것이며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마이너스로 계를 통제하는 것이다. 마이너스란 단순화하는 것이다. 무엇을 더하려면 따로 접착제가 필요하다. 못을 박아야 하고, 붙들어 매야 하는데 복잡해진다. 통제되지 않는다. A를 가져오면 B가 밀려난다. 프로야구 FA가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것도 같다. 하나를 얻으면 뒤로 하나가 빠져나간다. 질서를 해친다. 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방해한다. 천국도 있고, 내세도 있고, 귀신도 있고, 구원도 있고, 심판도 있어 복잡하다. 복잡한 믿음은 가짜다. 조건을 걸고 흥정을 하고 점수를 매기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마이너스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혼하면 그걸로 끝이다. 결혼하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사돈관계라는 것이 따라온다. 가문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는다. 플러스는 시스템을 흔들어 놓는다. 계통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방해한다. 승객이 한 사람 내리면 그걸로 끝이다. 내릴 사람이 내린 거다. 통제가 된다. 질서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차에 타면 이미 타고 있는 사람이 한 자리씩 뒤로 밀린다. 물론 빈자리가 여럿 준비되어 있다면 상관없지만 그 빈자리들은 역시 이전단계의 마이너스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다.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내게 100이 필요하다면 80 정도로 준비하고 있다가 주변에서 20을 조달해서 100을 채울 생각을 버리고, 120 정도로 넉넉하게 준비하고 있다가 20을 뒤로 감추어 100으로 맞추는 게 맞다. 왜 자수성가형 인물이 뜨는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도와주므로 80만 준비하면 된다. 문제는 그 버릇이 계속되는 거다. 운명적인 대결이 벌어지면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런 게 미리 연습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의 논리는 믿을 수 없다. 옳다는 것은 단기적으로 옳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옳더라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별수 없다. 북미협상이라도 그렇다. 옳다 그르다 논리로 보면 선제조치를 한 북한이 옳다. 뒷짐만 지고 있는 미국이 그르다. 통제가능성의 논리로 보면 미국은 야당과 언론과 군산복합체의 방해책동을 해결할 수 있는가 문제로 되고 그리고 북한은 군부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단순하게 가야 한다. 미국이 양보하면 트럼프도 어쩌지 못하는 다수의 방해자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질 확률이 높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화하고 통제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음 단계로 연결하는 것이다. 미리 에너지를 처리하는 시스템을 준비해야 계를 마이너스로 통제할 수 있다. 어원으로 보면 시스템은 ‘쌍으로 선다’는 뜻이다. 공산주의 일당독재는 쌍이 아니다. 다리가 하나면 일어서지 못한다. 지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일이 진행되는 도중에 갑자기 새로 절차를 만든다. 플러스하는 것이다.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쌍으로 서야 하는데 다리가 하나 모자라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행동을 관찰하다가 거기서 자기 행동의 근거를 조달하려 한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남이 무언가를 망치면 뒤늦게 나서서 주워 먹으려고 한다. 회의 때는 발언하지 않고 가만있다가 누가 발언하면 꼬투리를 잡고 반격하는 보수꼴통의 수법을 쓴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자체 에너지가 없다는 말이다. 어린이는 당연히 자체 에너지가 없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어린이의 태도를 믿음이라고 포장하면 안 된다. 믿음은 들러리 없이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
"믿는다는 것은 단순화 하고 통제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다음 단계로 연결하는 것이다. 미리 에너지를 처리하는 시스템을 준비해야 계를 마이너스로 통제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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