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마 싯다르타가 일체개고를 말했다지만 우습다. 소심한 녀석이 아닌가? 아프다면 아픈 건 아픔이지 내가 아픈 게 아니다. 아픈 것은 아픈 그것의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아프면 아픈 그것은 알아서 아프라고 하고 나는 빠지면 된다. 생각하자. 무엇이 문제인가? 패배가 문제다. 아픈 건 상관없는데 패배는 타격이 된다. 초등학교 때 불주사를 맞는다. 다들 겁에 질려 있다. 확실히 아프다. 벌에 쏘인 것에 비하면 약과지만. 그렇지만 주사기와 근육 사이의 일이 아닌가? 나와는 상관없다. 감정을 객관화하여 강 건너 불 보듯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 사건에 나를 개입시키는 게 이상한 거다.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는 게 아니라고 배웠지 않은가? 아픈 건 팔뚝의 소관이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야 한다. 해결하지 못하면 남들이 비웃는다. 비웃으라지. 남들이 비웃는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비웃는 것은 역시 비웃는 사람의 문제다. 창피하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무시하면 된다. 창피 그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나와는 상관없다. 나를 그 일에 끌어들이지 말라. 귀찮다. 문제는 왜 비웃는가다. 낙인이 찍힌다. 무리에서 배척된다. 그래서? 잘못된 궤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게 문제다. 고통의 순간은 짧다. 그 순간이 지나가면 그만이다. 인생이 괴로운 것은 고통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 내가 맞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당하면 두 번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로 방향이 정해진다. 궤도에 올라탄 거다. 한 번 매를 맞는 것은 상관없으나 그 일이 알려져서 적들이 나를 얕잡아보고 두 번 세 번 공격을 반복하므로 문제가 된다. 닭장에서 쪼이는 닭이 있다. 문제는 타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한 번 쪼이는 것은 상관없으나 맞대응하지 않으면 두 번 쪼인다. 닭들의 무리에서 쪼이는 닭으로 정해진다. 모든 닭이 일제히 그 닭만 노리고 쪼려 덤빈다. 쪼이는 닭이 되면 얼마 못 가서 죽는다. 그렇게 좌절하는 게 문제다. 인생의 고통도 그러하다. 고통은 지나가면 그만이다. 창피를 당해도 그 순간을 모면하면 그만이다. 잊어버리면 된다. 아픔은 아픔 그것이 알아서 할 문제고 창피는 창피 그것이 알아서 할 일이다. 진짜 문제는 집단 안에서 혹은 내 삶의 일관성 안에서 궤도를 타는 방향성의 문제다. 한 번 길이 나면 그쪽으로 쏠림이 일어난다. 일제히 내 한 사람을 노리고 사방에서 달려든다. 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번 잘못을 저지르면 두 번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이후 계속 잘못하게 된다. 그쪽으로 결이 나버리는 것이다. 도박에 빠지거나 음주에 빠지거나 범죄자 패거리에 가담하거나 한 번 나쁜 길로 들어서면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쁜 패거리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그 집단과 결별할 수 있다면? 주어진 환경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다면 상관없다. 아프면 아픈 그것의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에 내가 맞대응할 수 있는가다. 맞대응해야 한다. 가만있으면 적들이 떼로 몰려온다. 그러나 맞대응할 필요 없는 경우는? 똥 밟은 셈 치면 된다. 잊어버리면 된다. 범죄피해를 당했다면? 방범창을 교체하고 자물쇠를 수리하여 재범을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대응하여 이기는 것이 중요하며 1회성의 우발적 범죄피해라면 그냥 잊어버리면 된다.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인 것이다. 고통은 문제를 집단에 떠넘기라는 신호다. 집단에 어떻게 떠넘겨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이 심하다. 봉건시대라면 동네방네 사람들아 하고 하소연할 텐데. 요즘은 점잖은 사람인 양 체면 차리느라 혼자서 끙끙 앓는다. 그러므로 매뉴얼을 정해야 한다. 1회성 고통은 잊어버려라.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라. 대응해야 하는 상황은 맞대응해서 이겨라. 집단에 떠넘길 일이라면 인터넷에 올려라. 내부자 고발을 해야 할 일도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을 이용할 수도 있다. 시민단체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통과 같은 단순한 고통은 남의 일이므로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치과의사가 골치를 앓을 일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남의 고민을 고민하고 있다. 도둑질을 당했다면 진짜 고민해야 할 사람은 그 도둑이다. 남들은 멀쩡하게 사는데 도둑이 되어 밤이슬을 맞고 있으니 문제발생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나쁜 사람이 있다. 가해자들이 있다. 고민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들이다. 문제는 엉뚱하게 피해자들이 고통받는 데 있다. 왜 피해자가 고통받을까? 집단에 도움을 구하라는 무의식의 명령이다. 성범죄 피해자는 재범을 저지른다. 집단에 알려야 한다. 그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대응할 일은 대응하고 무시할 일은 무시하면 된다. 한창 키가 클 때는 1년에 9센티나 컸는데 내가 키가 큰 줄을 모르고 문지방을 지나다가 인방에 이마를 들이받았다. 한두 번이 아니다. 잘못은 반복된다. 아픔이 아픈 이유는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려는 것이다. 반복하지 않으된다. 어떻게든 대응하면 되는 거다. 인생에 진짜는 하나뿐이다. 하나는 내 인생의 방해자다.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자가 있다. 군대서 나쁜 고참을 만난 경우다. 이탈할 수 없다. 탈영할 수 없다. 어떻게든 2년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 또 하나는 분노다. 약자가 강자를 지배하는 경우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경우다. 부당함을 당하는 경우다. 나보다 못한 자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경우다. 이명박근혜에 부시에 트럼프라면 환장할 일이다. 그런 구조적 모순과는 싸워야 한다. 앞길을 막는 방해자는 제거하고 나쁜 환경은 이탈하고 스쳐 지나가는 고통은 잊어버려야 한다. 아픔을 아파해봤자 아픔 그 녀석만 신난다. 나는 아픔을 태연하게 무시하는 방법으로 아픔 그 녀석을 당황하게 만들어줄 참이다. 약올려준다. 세상에 심한 고통이 있나? 흔히 화생방 훈련 때 가스실의 고통을 말하지만 그거 어린애 장난이더라. 출산의 고통이 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치통보다 심한 정도다. 대단한 고통은 세상에 없다. 만약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강도가 센 통증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함이다. 고통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게 문제다. 약한 통증이 계속된다면 괴롭다. 가려움이 그렇다. 아토피야말로 진정한 고통이 아닐까?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고통이다. 어떻게든 대응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집단에 떠넘기고 병원에 떠넘기고 국가에 떠넘겨야 하며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다. 내 잘못이면 해결해야 하고 내 잘못이 아니면 자신을 벌할 이유가 없다. 감정에 굴복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단순한 고통은 강 건너 불이다. - 당하고만 있으면 쪼이는 닭이 된다.-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된다. - 방해자가 있으면 제거하거나 그 환경을 이탈해야 한다. - 나보다 어리석은 사람의 지배를 받는 모순은 극복해야 한다. - 피해자는 그 정보를 집단에 알려야 하고 고민은 가해자가 해야 한다. - 맞대응하여 이기는 것이 중요하며 고통이든 창피든 무시하면 된다.
매뉴얼을 정해놓고 매뉴얼대로 대응하면 된다. 무의식이 어떻게든 대응하라고 독려하므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대응하면 된다. 갑자기 키가 컸으니 문지방을 들이받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다니면 된다. 불가항력이면 집단에 떠넘기면 된다. 벌에 쏘인다든가 하는 단순한 고통은 잊어버리면 된다. 지속적인 통증은 호흡을 교란하여 잊지 못하게 한다. 해보자는 거냐? 역시 방해자에 대응해야 한다. 타인이 나의 방해자라면 대응해야 하듯이 고통이 방해자라면 대응해야 한다. 치료를 하는 방법도 있고 참아버리는 방법도 있다. 이겨버리면 된다. 나는 아픔을 색깔로 여기는 훈련을 했다. 매우 아프면 매우 빨간색이다. 고통이 지속되면 빨간 강물이 계속 흘러가는 거다. 고통에 대응하는 나의 방법이다.
좋은 것도 마찬가지다. 좋아봤자 좋은 그것이 좋은 것이지 나하고 상관없다. 칸트는 귀부인에게 고백을 받고 결혼하는 게 좋을까 그렇지 않은 게 좋을까 7년을 고민하며 결혼하는 게 낫다는 354가지 이유와 결혼하지 않는 게 낫다는 350가지 이유를 비교한 끝에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상대는 이미 결혼한 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말이다. 왜 좋은 것을 찾는 거지? 좋아서 뭣하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중에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칸트의 견해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시험을 백 점 맞으면 엄마의 기대치만 높아진다. 현명하다면 점수를 약간 낮추어야 한다. 좋은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다. 좋은 것보다는 강한 것을 선택해야 할 때가 많다. 인상적인 것을 선택해야 할 때가 더 많다. 좋은 것은 이득을 주지만 강한 것은 방향을 깨닫게 한다. 좋은 것을 찾다가 완벽주의자가 되면 강박증에 걸리게 된다. 칸트는 모든 것을 미리 정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증 환자였다.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나야 하고 옷은 어떤 것을 입어야 하고 시시콜콜 정해 놓았다. 바보 같은 짓이다. 좋은 것보다는 밀도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에너지 문제다. 상호작용이 긴밀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좋은 사람보다는 강한 사람이 더 나을 때가 많다. 인상적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더 현명할 때가 많다. 희소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할 일이다. 요란한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좋은 것보다는 좋지 않더라도 확률을 높이는 것을 선택해야 하며 그러려면 좋지 않더라도 골고루 구색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어놓고 합리적으로 대응하면 되는 것이며 자력으로 대응할 수 없다면 고발하여 집단에 문제를 떠넘기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잊어버리면 된다. 그것을 풍경으로 삼아 외곽에 배치하면 된다.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액땜한 셈이니 내 인생에 일어날 나쁜 확률을 그만큼 소비시킨 셈으로 치면 된다. |
- 단순한 고통은 강 건너 불이다.
- 당하고만 있으면 쪼이는 닭이 된다.
-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된다.
- 방해자가 있으면 제거하거나 그 환경을 이탈해야 한다.
- 나보다 어리석은 사람의 지배를 받는 모순은 극복해야 한다.
- 피해자는 그 정보를 집단에 알려야 하고 고민은 가해자가 해야 한다.
- 맞대응하여 이기는 것이 중요하며 고통이든 창피든 무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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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잘 해도 심리상담 필요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