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ews.v.daum.net/v/20190603112537157?d=y 흔히 계급배반 투표라고 한다. 천만에. 계급의 이익에 맞는 투표다. 영화 기생충이 묘사하듯이 지하족과 지상족이 담합하여 중간족을 협살로 죽이는 게 맞다. 왕과 평민이 담합하여 귀족을 친다. 혹은 귀족과 농노가 담합하여 부르주아 계급을 친다. 혹은 대통령과 국민이 단결하여 기득권 세력을 친다. 의회도 타깃이 된다. 돈을 중심으로 부자와 빈자로 나누면 간단하지만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다. 복잡하다. 권력이라는 또 다른 중심이 있다. 세상이 돈의 논리 하나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회의 의제설정 권력은 엘리트 지식인에게 있다. 정의당은 빈자의 편이라고 우기지만 빈자가 보기에는 엘리트 권력의 독점을 꾀하는 인맥놀음 정당이다. 부자는 돈을 챙겼으니 삶의 질을 생각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게 맞고, 빈자는 돈이 없으니 대신 권력이라도 챙기려고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소수자를 차별하는 자한당을 지지한다. 기득권을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지극히 당연한 건데 무슨 역설이라고라? 상식적으로 빈민을 하루아침에 부자로 만들어 준다면 믿겠는가? 경상도를 전라도 위에 올려준다고 하면 믿는다. 남한을 북한 위에 올리고, 남자를 여자 위에 올리고, 다수자를 소수자 위에 올린다고 하면 일베충은 그 말을 믿는다. 일본을 한국 위에 올린다고 해도 그들은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에 가본 적이 없어서 현실감이 없다. 미국이 일본의 위고 일본이 한국의 위라면? 자기네들이 여자 위에 혹은 전라도 위에 혹은 소수자 위에 올라갈 근거가 되기 때문에 환영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위에 올라가고 싶기 때문에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는 치욕도 감수하는 것이다. 원래 부끄러움을 모르는 견자들이라서 그러한 점도 있겠다. 진정한 진보라면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 사회의 게임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돈 하나로 설명한다면 단세포다.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겠다는 말은 당신은 을이고 나는 갑이다로 읽힌다. 엘리트가 갑질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다. 위하여는 가짜다. 노동자를 위하여, 농민을 위하여는 당연히 가짜다. 박정희 패거리들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는 가짜다. 본능적으로 안다. 1초 만에 안다. 트럼프가 이를 악용한다. 트럼프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겠다는 플러스가 아니라 당신을 해치는 누군가를 조지겠다는 마이너스로 말한다. 이 수법이 먹힌다. 진실이니까. 중국 때리고 멕시코 때리는 것은 일단 거짓말이 아니다. 그래서 성공하는지 또 지속가능 한지는 별개로 말이다. 이익을 주겠다는 말은 믿기 어렵지만 누구를 패겠다는 말은 믿을 수 있다. 이익을 주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두들겨 패기는 쉽기 때문이다. 진보도 마이너스 통제로 프레임을 갈아타야 한다. 친일파를 제거하고 조중동을 제거하고 특권과 부정부패를 제거하며 시스템의 방해자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그것이 에너지를 통제하는 바른 방법이다. 국민 모두가 에너지의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국민은 결코 졸이 아니다. 국민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비뚤어진 시선을 들키면 안 된다. 무엇을 해주겠다? 그게 바로 국민을 남으로 치는 것이다. 이득이 되는 무엇인가를 해준다고 하면 국민들은 소외감을 느낀다. 주는 자의 맞은편에 받는 자가 있다. 주겠다는데 받으려면 숙여야 한다. 감사해야 한다. 졸지에 계급이 내려갔다. 무언가를 준다는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 불쾌한 말이다. 숙여야 받다는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전라도에 숙이고 여자에게 숙이고 성소수자에게 숙이고 다문화에 숙여야 되나? 이렇게 된다. 그렇다면 정답은? '함께 가자!'고 부르러 오면 좋아한다. 일을 벌여놓고 멤버에 끼워주면 좋아한다. 그런데 말이다. 함께 금광을 찾으러 가자는 말보다 함께 누군가를 패자는 말이 쉽다. 금이 나오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PC통신 금광으로 떴고, 노무현은 인터넷 금광으로 떴고, 문재인은 스마트 금광으로 떴다. 그런 금광은 드물게 터진다. 남북통일이 대박금광인데 안 터지고 있다. 어쨌든 터져야 진보가 산다. 터질 금광이 터지지 않아서 보수에 정권을 뺏기는 것이다. 북한을 밟아주자는 자한당 선동이 먹힌다. 중요한 것은 이득을 챙겨주겠다는 제안보다 '함께 가자'는 부르러 오기가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정답이라는 말이다. 진보는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불렀는가? 촛불 때 한 번 불러주고 땡인가? 그동안 우리가 민중을 부르러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국민은 혜택을 챙겨주는 정당보다는 자기를 부르러 와주는 정당을 찍는다. 부를 수 있는 찬스를 발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무현이 탄핵당할 때 국민들을 불렀다. 노무현이 낮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낮은 곳으로 부르기는 쉽고 높은 곳으로 부르기는 어렵다. 국민을 가르치려 드는 정의당 행동은 광야에서 부르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특히 환경이슈는 에베레스트 꼭대기에서 부르는 무리수로 비칠 수 있다. 교만하다. 그들은 엘리트의 지식권력을 휘둘러 무식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희망인가? 영화 기생충은 희망이 없는 듯이 보인다. 비밀을 아는 것이 희망이다. 구조의 진실을 아는 것이 희망이다. 알면 변화에 대응할 수 있고 기회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아야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권선징악은 곤란하다. 일본이 나쁘다고 혹은 북한이 나쁘고 외노자가 나쁘다고 말한다. 나쁜 사람 몇만 제거하면 좋아진다는 식의 낡은 논리에 우리는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고약한 것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구조다. 나쁜 환경이다. 아니다. 구조가 나쁘고 환경이 나쁜 게 아니라 그 은폐된 내밀한 구조를 모르는 무지가 나쁜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된다. 환경은 파괴되지 않는다. 사람이 바뀔 뿐이다. 희망은 나쁜 사람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환경을 개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구조를 간파하는 데 있다. 알면 대응할 수 있고 대응하면 나쁜 구조도 좋은 구조가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집 안 구석구석을 파악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아는 것이 희망이다. 어쩌면 구들장 밑에 무언가 수상한 것이 있다. |
"희망은 나쁜 사람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환경을 개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구조를 간파하는데 있다. 알면 대응할 수 있고 대응하면 나쁜 구조도 좋은 구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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