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성의 법칙 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효율을 생산한다. 구조의 효율성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여가는 근원의 엔진이라 하겠다. 구조는 엮인다는 것이며 엮이면 둘이 하나를 공유한다. 둘이 하나를 공유하면 1로 2를 상대하므로 효율적이다. 공유자동차와 같다. 두 사람이 자동차 한 대를 공유한다. 거기에 이익이 있다. 우버와 타다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게 그렇다. 그들에게 효율성의 힘이 있다. 한국이 최초로 세계 1위를 석권한 상품은 컨테이너로 알려져 있다. 이전에 가발사업이 있었다지만 제대로 된 공업제품으로 보면 컨테이너가 최초다. 컨테이너야말로 획기적이다. 헨리 포드의 포드시스템에 버금가는 발명이 된다. 어떤 미국사람이 트럭으로 운송사업을 하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려 컨테이너를 발명했으나 한동안 부두노조의 저항에 직면하여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부두노조와 맞장 뜰 간 큰 나라가 없어서 컨테이너를 보급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월남전 때문에 살아났다. 전시상황이라 쓰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 부두에 하역해놓은 화물을 베트콩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부대까지 운반하려면 컨테이너는 필수다. 선박에서 내린 컨테이너를 트럭에 싣고 부대까지 그대로 진입한 것이다. 부두노조는 쇠퇴하게 되었다. 월남전에 개입한 한국이 한동안 세계의 컨테이너 사업을 독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포드시스템이든 컨테이너시스템이든 공유자동차든 따릉이든 결국 하나를 여럿이 공유하는 것이다. 부두노동자의 손을 거칠 필요가 없다. 공유에 효율이 있으며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우리는 바둑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있다. 흑들과 백돌을 쥐고 서로 효율적인 곳을 차지하려고 한다. 우리는 장사꾼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다. 이윤을 남기려고 목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목 좋은 자리는 구조적인 자리다. 두 길이 사거리에서 만나면 1이 2를 상대한다. 우리는 같은 원리로 축구시합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있다. 최적의 포메이션을 구사하여 보다 효율적인 패스를 하려고 한다. 우리는 같은 원리로 생명이 어떻게 진화할지 알 수 있고 또 문명이 어떻게 진보할지도 알 수 있다. 누가 이길지도 알고 누가 지는지도 훤히 알게 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구조의 효율성이다. 효율은 점차 감소한다. 이를 무질서도의 증가라고 한다. 그런데 왜 효율성의 감소라고 하지 않고 무질서도의 증가라고 할까? 효율성의 감소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으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뭐든 반복하면 인기가 줄어드는 것이다. 코미디언도 같은 개그를 여러 번 반복하면 인기가 줄어든다. 가수도 같은 노래를 계속 부르면 인기가 떨어진다. 뭐든 오래 묵으면 조금씩 망한다. 아름다운 것도 익숙하면 흥미를 잃는다. 가치는 로그곡선을 그리며 갈수록 줄어든다. 거지가 10만 원을 얻으면 매우 가치가 있다. 부자의 십만 원은 가치가 없다. 사건은 여러 단계를 거치며 단계를 거칠 때 가치가 줄어든다. 맨손으로 먹다가 숟가락으로 먹으면 맛이 줄어든다. 직접 운전하다가 조수석에 앉으면 재미가 덜하다. 발가벗고 만나다가 옷 입고 만나면 분위기가 덜하다. 뭐든 방해자가 개입한다. 단계가 많아지고 방해자가 많아져서 가치는 줄어든다. 처음 듣는 곡은 귀로 듣지만 두 번 듣는 곡은 뇌의 기억을 불러낸다. 단계를 거치므로 가치가 덜하다. 첫 키스는 입술로 하지만 두 번째 키스는 뇌로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당연히 쾌감은 감소해 있다. 뭐든 감소하게 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엔트로피 증가를 무수히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효율의 감소라고 하면 쉽게 알 텐데 왜 엔트로피 증가라고 꼬아서 말할까? 모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엔트로피 증가는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간접화되어 멀어지는 것이다. 사건 안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단계가 있고 량으로 갈수록 효율성은 감소하게 된다. 직접에서 간접으로 가게 된다. 맨손으로 쓰다듬다가 장갑 끼고 쓰다듬게 된다. 우리는 점점 멀어지고 간접화되고 효율을 손실하게 된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점점 에너지 낙차는 감소한다. |
감솨요.
사건이 일어나려면 전제로서 닫힌계가 성립될 수 있어야 한다.
닫힌 관계는 딱딱한 의미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닫힘을 다른 말로 하면 대칭이다.
즉 도출된 대칭을 기준으로 서로에 대하여 대칭된 두 닫힌계의 성립이다.
두 닫힌계는 서로에 대하여 성립하는 바 둘은 서로에 대하여 외부라는 관계이다.
이렇듯 밖이라는 개념은 대칭된 쌍이라는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사건 1싸이클에서 이러한 대칭-닫힌계 를 낳는 전제에 해당하는 언어가 중첩이다.
사건을 추적해보면 먼저 닫힌계에 대한 외력의 작용이 촉발되어야 한다.
하지만 외력은 닫힌계 외부에서 내부로의 침투를 말하기 위한 관점이며 실제로는 없다.
사실 닫힌계 외부와 내부는 대칭이 성립하기 전까진 서로 중첩되어 있었다고 유추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한 중첩에서 스스로 대칭을 이용한 풀림으로의 방향성이 외력의 정확한 표현이다.
이러한 중첩된 상태가 스스로 대칭을 세워 서로에 대하여 외부인 두 쌍으로 서는 사건이 벌어지려면, 그 이전에 또 한번 중첩된 계에 대한 외력이 작용해야 하므로 전제의 전제의 전제가 끝이 없다.
허나 끝이 있다. 바로 전제로 향해가는 즉,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로의 포함관계라는 방향성이다.
즉 중첩이 우선하며 중첩의 해체가 나중한다.
그러므로 비로소 한 싸이클로 떼어서 사유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대칭이라는 말에 이미 서로에 닫혀있는 두 계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중첩=3->대칭1+(쌍1+1)
더 나아가 중첩과 중첩을 낳은 상부구조로까지의 관계인 한싸이클=5->1+(쌍3+1) 이다.
외부는 상부구조의 대칭이며 내부는 쌍 중에서 하나에 해당하는 하부구조이다.
하부구조 둘은 상부구조 하나로 통제되므로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구조이다.
사건은 상부구조에서 하부구조로만 복제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로 복제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치려고 해봤자 원리적으로 당근 게임이 되지 않는다.
생각을 거꾸로 한번 짚어보았습니다.
위에서 든 숫자에서 5를 불균일, 3을 균일의 위상으로 보면 맞을까요?
그림을 그려야 전달이 될듯한데 여러 지점에 무리한 부분이 있는듯 합니다.
제가 쓰지 않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면 곤란합니다.
여러 부분에서 귀납어를 쓰고 있는듯 한데 대칭은 에너지가 작용하는 순간 도출되는 거지
원래 없습니다. 남북한의 대칭, 여야의 대칭, 팔다리의 대칭은 같은 일이 반복된 흔적이 남은 거지
원래 에너지로 보면 그런게 없습니다.
원래 없는 것을 없다고 보는게 연역이고 눈에 보이니까 있다고 믿는게 귀납인데
눈에 보이는 것은 근거가 안 됩니다.
원래는 아무 것도 없고 에너지의 작용만 있는데
사실 균일하지도 않지만 에너지의 작용에 따라 균일한 걸로 치는 겁니다.
균일한 만큼만 반응하니까 반응하지 않는 부분은 논외로 치는 거.
일단 사건이 일어났다면 반응이 시작된 거니깐 반응한 부분은 균일한 부분이며
그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외국인이나 강아지는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논외가 되고
반응하는 한국인들은 균일하다고 치는 거지요.
잘 살펴보면 정신병자나 사망자나 사망직전이나 등등 반응하지 않는 자들이 꽤 있겠지만 논외고
반응하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차별성이 일어나 그 부분만 닫힌계로 잡는 겁니다.
반작용이 시작되는 시작점을 중심으로 닫힌계 내부에서 대칭을 찾는 것이며
대칭을 닫힌계 밖에서 찾으면 귀납이 되어 전제의 전제의 전제로 산만해지며 그게 확산인데
확산방향이면 아 논리가 잘못 전개되고 있구나 하고 파악해야 하며
무조건 수렴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합니다.
사건은 무조건 수렴입니다.
대칭은 예컨대 북한이 남침했을 때 여야의 대칭이지 북한과 대칭이 아닙니다.
북한과 남한의 대칭은 국제사회에서 벌어진 다른 사건입니다.
무조건 수렴방향으로만 논리를 전개해야합니다.
즉 범위를 좁혀가야 한다는 거지요.
범위를 키워가므로 헷갈리는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구조의 효율성이야말로 세상을움직여가는 근원의 엔진이라 하겠다."
열 번째 단락, 거칠거칠 때 -> 거칠 때
마지막 단락, 시건 ->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