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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28 vote 0 2024.05.18 (20:01:33)

    신라의 무덤에서 화려한 부장품이 쏟아져서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왜 그 시대에 다른 무덤에는 그만한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 문제는 그 시기가 신라가 가장 약했을 때라는 점이다. 기록으로만 보면 신라 초기의 강역은 초라하다. 영토는 경주 일대에 불과하다.
   

  서봉총에서 금관이 나왔지만 고구려 연호로 추정되는 연수 원년이라고 쓰인 은제 함이 나왔다. 고구려 속국 주제에 화려한 금관이라니. 신라의 고분 시대는 150년 정도로 짧게 끝난다. 이후 무덤이 외곽으로 옮겨가고 작아지며 대단한 유물이 나와주지 않는다.


    대가야 전성기에 신라는 가야보다 크지 않았다. 포항까지 고구려군이 내려와 있었고 대가야는 무주, 진안, 장수 찍고 서해안 가야포에 진출해서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 대가야에도 큰 무덤이 있지만 신라와 견줄만한 부장품은 없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있다.    


    조공을 바치면 속민이고 인질을 보내면 신민이다. 당시 국제정세로 보면 백제와 신라가 왜에 인질을 보낼만한 사정이 있었다. 왜는 신라를 침략할 이유가 있었고 실제로 여러 번 침략했다. 당시의 항해술로 신라가 해안을 봉쇄하면 왜는 무역을 할 수가 없었다. 


    고대국가는 무역 없이 존립할 수 없다. 세금을 걷을 방법이 없으므로 무역이 세금 대신 국가 유지 수단이다. 조선시대라면 관리를 보내서 직접 지배하지만 당시는 왕이 위세품을 촌주에게 내려주고 필요한 물자를 받는 교환방식이다. 전제군주제가 아닌 것이다.


    백제는 신라의 대중국 외교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고 신라는 왜의 대백제 교역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서로 목에 가시가 되어 있다. 백제는 신라를 공격할 이유가 없고 그럴 힘도 없다. 당장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 이미 임진강 일대를 고구려에 뺏겼다. 


    가야는 왜와 무역을 해야하므로 왜와 친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라 공격의 주체는 왜다. 왜는 신라를 치지 않고 생존이 불가능하다. 일본 열도 안에 여러 경쟁세력이 있고 신라를 쳐서 무역로를 확보하는 자가 열도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라 전쟁은 필연이다.


    신라의 볼모외교는 내물왕 때부터 시작된다. 신묘년 기사는 광개토대왕의 백제 관미성 곧 오두산성 공격 기록이다. 내물왕은 김씨로 박씨, 석씨 신라와 정통성 문제가 있다. 정통성 확보를 위해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사위가 왕이 된다는 것이 약점이 될 수 있다. 


    박씨와 석씨의 일부가 왜로 도망쳤다면 전쟁이 일어날 만하다. 백제와 신라가 왜에 인질을 보냈으면 광개토대왕비가 신민이라고 기록할 근거가 된다. 고구려는 백제 공격의 정당화를 위해 왜를 빌런으로 키워야 한다. 왜, 백제, 가야 삼국연대는 자연스러운 거다.


    왜가 백제와 가야, 신라를 지배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은 고대국가 관습상 자연스러운 뻥튀기다. 백제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 신라가 백제 속국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고 왜의 허풍도 심하다. 중국에 책봉 받으려고 진한, 모한 등 사라진 나라 이름들까지 끌어들였다. 


    광개토대왕 역시 허풍을 친다. 공자의 춘추필법을 배웠을 리 없다. 수수께끼는 그 시기에 신라 거대고분이 집중적으로 시가지에 조성되는 점이다. 신라의 고분기는 1천 년 역사 중에 150년에 불과하다. 이후 고분이 산밑으로 옮겨간다. 왜 로만그라스가 나오나?


    시내 한가운데 대형고분을 조성하고 황금이 아깝지 않다는 듯 금관과 유리제품을 잔뜩 묻는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전까지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내물왕 시기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얻었다고 봐야 한다. 왜가 탐냈을 무언가가 있었다.


    이후 갑자기 대가야가 백여 년간 대형 고분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신라가 유행시킨 고분시대에 가야가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가야가 갑자기 강해진 것은 백제가 장수왕에게 털리고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으로 되면서 대가야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틈에 대가야가 서해안까지 진출한다. 결론적으로 신라가 어떤 이유로 막대한 황금을 손에 넣은 것이 왜가 신라를 침략하고 백제가 가야와 동맹하여 왜에 가담하고 고구려가 남하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장수왕의 남하를 촉발한 것은 신라의 황금이었던 거다.


    그 정도의 황금이 있다면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날 만하다. 가난한 신라에 왜가 뭐 얻어먹으려고 침략하겠는가 말이다. 침략해서 얻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침략한 것이며 그 무언가에 의해 신라는 크게 발전했고 그 무언가에 끌려 장수왕이 남하했던 것이다. 


    그것은 보나마나 노다지다. 일본이 강해진 것은 구리대박, 은광대박, 황금대박 때문이었다. 대박은 도쿠가와 막부시절에 터졌다. 무령왕 때 백제가 강해진 것은 철광대박 덕이었다. 신라 역시 알천에서 사금대박이 터졌다. 유럽 유물이 경주에서 출토되는 이유다.


    우리는 그냥 그리스와 트로이가 전쟁했다고 배우지만 키프로스의 구리가 아니었으면 전쟁이 일어날 리 없다. 은광이 터지지 않으면 아테네가 강해질 수 없다. 모든 역사의 배후에 광물자원이 있다. 아랍이 강해진 이유도 인도의 우수한 철을 무역했기 때문이다.


    남인도의 철이 바이킹의 수중에 흘러 들어갔다. 문제는 이런 시시콜콜한 부분을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국이 강해진 것은 화약 원료인 새똥 덕분이고 스페인이 강해진 것은 은광 덕분이다. 고구려의 주력 수출품은 모피였다. 다 무언가 있는 거다.


    제갈량은 군사적으로 성공한 적이 없다. 제갈량의 명성은 천연가스 이용과 구리광산 개발에 따른 경제발전 덕이다. 맹획을 사로잡은 칠종칠금? 구리광산을 빼앗으러 간 것이다. 아니면 왜 잡았다가 도로 풀어주겠는가? 광산 노동자로 부려먹으려고 풀어줬지. 


[레벨:30]솔숲길

2024.05.19 (08:03:06)

진시황도 철광대박 터졌다고.

군사들을 모두 철기로 무장시켰다고.

고구려도 만주지역에서 철광대박 났다고.

중국보다 화살촉이 더 크고 길었다고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24.05.19 (19: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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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라는 경주 일대를 겨우 장악하고 있었고 나중 팽창된 대가야 세력권보다 영토가 작았다. 이렇게 작은 신라와 가야가 왜에 털리는건 정상이고 백제는 당장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야 해서 왜의 도움이 필요했다. 왜는 무역로를 막고 있는 신라를 쳐야 일본열도를 통제할 수 있었으므로 올인할 수 밖에 없다. 관미성 전투는 392년, 경주 금성 공방전은 393년. 광개토대왕의 신라 지원은 400년, 미사흔이 일본에 볼모로 간 것은 402년이다. 광개토대왕이 왜를 축출했는데도 볼모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사후 414년에 건립되었다. 짧게는 14년 전이고 길게는 20년 전 일의 기록이다.   


고구려가 관미성(오두산성)만 넘으면 서해안의 밀물을 타고 만조 때 바로 수군을 끌고 바로 풍납토성을 칠 수 있다. 백제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왜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며 왜는 그 댓가로 신라를 먹으려고 했다. 백제는 진작부터 신라와 가야가 모두 백제의 속국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도 애매한 관계다. 우리 교과서는 말갈을 그냥 지워버리지만 가야처럼 반독립 상태로 봐야 한다. 가야는 백제가 군대를 보내라고 하면 보내야 하는 관계였다. 고구려와 말갈도 그런 관계. 그 정도면 속국이라고 기록할 수 있다. 역사는 다 뻥튀기니까.


위 지도에는 침미다례를 써놨지만 백제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즉 범백제 세력과 신라는 게임이 안 된다는 거. 그러므로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는 신라는 백제 속국이라고 우긴다는 거. 그건 거짓말이 아니고 원래 그렇게 하는 거. 이 시기 지도로 보면 범백제권은 신라의 5배~10배는 된다. 문제는 이렇게 신라가 백제의 1/5 밖에 안 되는 동네국가 시절에 황금이 무더기로 쏟아진다는 거. 신라가 커지면서 오히려 부장품이 없어짐. 왜? 그 비싼 금을 왜 파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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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24.05.19 (19:27:09)

더 놀라운 것은 경주 중심부의 거대왕릉 다수는 사실 왕릉이 아니라는 거. 즉 황금이 쏟아진 무덤 중에 왕릉도 있지만 금관총의 이사지왕이 왕인지는 불분명, 갈문왕일수도 있고 차칠왕일 수도 있고. 부인 무덤도 있고. 금령총은 왕자 무덤일 것 같고. 즉 경주시내 중심지 왕릉급 고분은 150년 정도 사이에 조성되었으며 그 사이에 왕이 다섯명 정도인데 진평왕이 졸라 장수했으니까. 5명의 왕에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리잔이 수십개씩 있으면 유리그릇만 경주시내 중심부에 200개는 있을 것. 백년 사이에 유리그릇 200개를 파묻고 왕관만 금이 1.6킬로인데 수백킬로 황금을 파묻었다면?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24.05.19 (20:37:27)

신라의 고분시대(경주시내에 왕릉이 조성되던 시기)는 17대 내물왕에서 22대 지증왕까지 

23대 법흥왕은 산밑으로 무덤이 옮겨간다. 법을 정하면서 대규모 왕릉조성을 금지한듯. 

350년부터 500년까지 15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13대 미추왕 284년부터일수도 있다. 이 경우 220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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