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진정한 관용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글 ‘민주주의와 관용과 상대주의’, ‘관용은 용서와 다릅니다.’ 등에 언급된 ‘관용’에 주목할 일이다. 왜 갑자기 관용을 말씀하실까? 표면이 있으면 이면이 있다. 보이지 않는 저쪽에 무엇이? ### 말씀하신대로 관용은 용서가 아니다. 프랑스인의 tolerance가 그러하다. 어원을 찾아보면 ‘무거운 것을 들고 견딘다.’ ‘(상대편의 배려없는 방자함을) 견디며 허용한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무거운 것이 ‘들려있다(tolerate)’. 곧 ‘짐이 지워져 있다’는 뜻이다. 두 어깨에 지구를 짊어진 그리스신화의 거신 아틀라스(Atlas)를 떠올릴 수 있다. 아틀라스의 어원도 tolerate다. 관용을 정치 슬로건으로 써먹은 이는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왜 관용을 주장했을까? 로마는 게르만을 정복했지만 역으로 게르만족 일부가 로마시민권을 얻어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관용은 로마가 게르만족을 포용하는 것이다. 목욕을 안 해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바르바로이(로마에 800개의 목욕탕이 있었을 정도로 로마인은 청결했다.)들이 텁수룩한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나서 ‘나 게르만 부족장으로 이번에 원로원의원으로 선출되었소. 그런데 원로원 가는 길은 어디요?’ 하고 길을 묻는 꼴불견이라니. 그런 못볼 꼴을 보고 견디는 것이 프랑스인의 똘레랑스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다. 카이사르는 원래 도시국가로 출발한 로마의 국가개념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원래 부족개념이 강한 도시국가를 넘어, 또 민족국가를 넘어, 세계국가를 지향하고 또 그것을 초월하여 더 높은 이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는 개별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정신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문명권’을 뜻하게 된 것이다. 물론 모든 로마인이 그러한 카이사르의 정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겠으나. 시민권 개념이 특히 중요하다. 우리가 아는 ‘국민’ 개념은 ‘세금 내고 대신 국가의 보호를 받는 자’를 의미한다.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관념이다. 로마의 시민권 개념은 주주가 주식지분을 가지고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듯이, 게르만 부족장이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로마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참여함을 뜻한다. 의미가 다르다. 그 의미가 넓혀진 새로운 시민권 개념에 의해 로마는 국가 단위를 넘어선 초국가적 패권그룹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중요하다. 먼저 안목을 높이고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카이사르 이전에 알렉산더가 있었다. 알렉산더 역시 동서세계의 통합을 꿈꾸었다. 마케도니아 족장 출신으로 정복하여 그리스를 관통하고 페르시아를 넘어 이집트와 인도를 아울렀다. 가슴에는 그리스인의 이상을 품었지만 산악국가 그리스의 폐쇄성을 극복했다. 국가개념을 초월하여 문명단위로 사고한 최초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민족국가 단위의 좁은 관념에 붙잡혀있는 사람이 관용을 이해함은 불능이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의 눈높이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홍세화가 소개하는 오늘날 프랑스인의 관용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수준이다. 프랑스인의 관용은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알제리인이나, 수업시간 교실에서도 히잡을 벗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아랍인, 혹은 터키인이나 유태인 등을 두루 포용하자는 것이다. 그 이면에 철저한 프랑스 중심주의, 드골식 대국주의, 백인-기독교문화권의 배타적 우월주의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중국인들에게도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관용의 사상이 있다. 그 바탕에 철저한 중화주의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진정한 관용이 아니다. 가짜다. 국가개념을 초월하여 문명단위로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작은 국민을 졸업하고 너른 시민의 바다로 입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극적으로 세금내고 보호받을 궁리를 넘어, 확고한 자기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지구촌 인류운명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적극 참여하여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서- ‘현대성’의 개념이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현대성의 본질은 인류문명의 확대, 전파, 그리고 진보에 있다. 그것은 좌파의 사회주의와 다른 개념이다. 진정한 진보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20세기의 한계에 붙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고 사고하며 인류문명의 진보를 주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대성’은 21세기에 느닷없이 요청된 사상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탄생기, 성장기, 청년기, 장년기, 완숙기로 펼쳐지는 에너지 순환 일 사이클의 전개에 따라 여러 형태의 현대성이 존재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쓰며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낡은 봉건잔재라니-우상의 시대를 끝막고 이성의 시대를 주장했을 때 이미 현대성의 개념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 르네상스는 부활 혹은 재생을 의미했지만 실제로는 흘러간 그리스 구문명의 재발견이 아니라, 밝아오는 근대의 여명기 그 신문명의 힘찬 도전이었다. 그래서 현대성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현대성 개념의 요지는 ‘21세기 문명의 해석'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의 임무다. 우리에게 21세기란 무엇인가? 우리가 21세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8세기의 계몽, 19세기의 산업, 20세기의 혁명으로 펼쳐지는 그 맥락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다. 고대가 문명의 탄생기, 봉건이 문명의 성장기, 근대가 문명의 청년기라면 21세기는 문명의 장년기 혹은 완숙기가 되겠다. 이 시대가 문명의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가는 전환기라면 그 진보한 수준에 걸맞는 새로운 삶의 양식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이상주의라는 종착지를 가진다. 문명단위로 사고한다 함은 결국 이상주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르네상스 정신이 그렇듯이 근원의 이상주의로 돌아갈 때 국가단위, 민족단위를 넘어 문명단위로 사고하게 하는데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상대론적 관점을 버려야 한다. 지배(피지배)계급이 이렇게 하면, 사용자(노동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여당(야당)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북한(미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경상도(전라도)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거기에 대응하여 나는 이렇게 응수하겠다는 소아적인 관점을 버리고, 떨치고 일어나 더 높은 레벨에서 문명의 코디네이션에 나서는 것이다. 어떤 이상주의가 있었는가? 예수의 유토피아는 천국 개념이다. 석가의 유토피아는 극락이거나 혹은 열반 개념이다. 공자의 유토피아는 요순시대의 이상향 개념이다. 노자의 유토피아가 무위자연 개념이라면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는 사회주의 개념이다. 당신이 어느 줄에 가서 서든, 그것은 남들이 세워놓은 줄 뒤에 가서 서는 짓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유토피아관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유토피아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재앙은 시작된다. 나와 다른 타인의 유토피아관을 허용하는 것이 관용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똘레랑스는 카이사르의 정적들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프랑스인의 외국인에 대한 허용이 아니라 너와 나의 수평적 ‘공존’을 의미한다. 공존이 관용이다. 그것은 타인의 이상주의가 나의 이상주의와 조화하여 더 높은 차원의 이상주의를 연출하는 것이다. 외부세력에 대한 소극적 허용이 아니라 문명의 진보에 대한 적극적 도전이다. 떨쳐 일어남이다. 그것이 우리가 21세기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 방법으로 변방에서 불명한 존재였던 우리가 기세좋게 중앙으로 치고나가 태풍처럼 몰아쳐서 그 중앙을 접수하고 우리의 존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방법이다. 프랑스인의 관용 개념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태도에 불과하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중앙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변방의 떨거지들도 구색맞추기 수준에서 동아리에 끼워주고 틈새시장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변방의 우리가 그들 기독교문명권의 본질을 칠 때 그들은 돌연 얼굴이 붉어져서 정색하며 태도를 바꾼다. 진정한 관용은 문명의 지평을 열어가는 리더가 문화지체의 지진아들을 격려하며 함께 진도나가주는 것이다. 참된 그것은 21세기를 해석하여 그에 걸맞는 문명을 디자인하고, 코디하고, 연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각자의 다양한 이상주의를 제각기 제 위치에서 완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에게 무대를 세팅해주고 그에게 파트너를 찾아주고 그에게 포지션을 지정해주고 그에게 걸맞는 임무를 주어 서로 조화되게 배치하는데서 온갖 새로운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며.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일을 풀어가는 것이다. 적을 제압하거나 혹은 외부의 공격에 맞서 응전하는 식의 수동적인 대응이 아니라. 주어진 온갖 방법들 중에서 순간순간 판단하고 선택하여, 각자에게 걸맞는 이름과 무대와 파트너와 포지션과 임무를 주고 또 서로 충돌하거나 어긋나지 않게 조율함으로써 최고의 역동성과 최선의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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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말하는 이는 많아도
- 내부에서의 교착을 타개하고 바깥에서 새로 길을 열어 진도나가는 -
그것을 하층민에 대한 계몽에서 찾아야 할지
그것을 발명과 모험, 신천지의 개척에서 찾아야 할지
아니면 세력을 모아 조직을 건설하며 적을 제압하고 투쟁하는 데서 찾아야 할지
그냥 앉아서 눈물짓고 기도나 하며 오지도 않을 구세주를 기다려야 할지
걍 자기 일이나 하며 밥이나 먹고 살아야 할지
바르게 가닥을 잡아주는 이는 없었소.
완성하면 통하는 법
각자 자기 내부에서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찾아
자기다움의 이름으로 계를 완성할 때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오.
사실 이 정도의 아이디어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한때 포스트모더니즘담론이 유행했으나
유행이 유행으로 그치고 만 것은 그 안을 채울 콘텐츠가 없었기 때문이오.
나는 대량생산-생산양식이 현대의 본질은 아니라고 보오.
그러므로 그 반대편에서 대량생산-집단주의를 해체하고 조롱하고 풍자하고 패러디하는 것이 역시
현대성의 본질은 아니라고 보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담론은 애초에 출발이 잘못된 것이오.
그것은 초딩들의 반사놀이와 같소.
저쪽에서 대량생산-집단주의를 고함쳐 외치니
이쪽에선 소량해체-개인주의로 맞서려고 하오.
저쪽에서 군대를 조직해 공세를 전개하면
이쪽에서 유격대를 조직해서 맞서는 식이라고나 할까.
그건 거의 본능수준의 단순한 대응.
벌레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소.
현대의 본질은 깨달음-완전성에 있다고 보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현대가 19세기나 20세기에 발명된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
1만년 전에도 현대는 있었소.
1만년 후에도 현대는 있소.
그러나 우리가 현대를 규정할 때 떠올리는 포드시스템은
1930년대에 디트로이트 어느 공장 작업장에서 포드아저씨가 혼자서 도면 그리고 만든 것이오.
포드가 현대를 발명한 것은 전혀 아니오.
그러므로 탈현대(탈근대)가 대량생산에 맞서서 각이 서는 것은 전혀 아니오.
오히려 우리는 현대성 그 자체의 본질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되오.
대량생산-집단주의가 현대의 정체라는 관념은 초딩아저씨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오.
그 역시 깨뜨려져야 할 우상에 불과하오.
진정한 현대는 르네상스시대 화가가
원근법을 이용하여 실물과 닮은 그림을 그렸을 때
인간이 자연에 질서를 불어넣어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사실에서 시작되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에서 우상을 대신할 이성이 찾아진 것이오.
현대성은 그 이성을 제각기 완성하여
네트워크를 이룸으로써 거기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 것이오.
그렇소.
현대성은 포드아저씨가 콘베이어 벨트를 조립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세잔이 형태를 그렸을 때 이미 스위치가 켜지고 불이 들어온 것이오.
현대는 세잔이 발명하고 바우하우스와 앤디워홀이 퍼뜨린 것이오.
당신이 입은 옷, 사는 집, 쓰는 사무실 집기
그 디자인과 생활양식의 출처는 근본 예술가들이 만든 것이지
건희아저씨나 몽구형이 만든 것이 아니오.
부디 현대를 사유하기를 바라오.
리얼 아티스트 두현님 방가방가요~
완숙기로 펼쳐되는 --> 펼쳐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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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에 전혀 만우스럽잖은 좋은 글을 만났네요.
"문명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기에 성공하는 것"에 동참합니다.
톨러런스?
똘레랑스?
....
보다는
관용이라는 어감이 훨씬 격에 어울리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앙상한 가지들에 눈송이들이 소복소복 달려소.
이번 주말쯤에는 이지역에 폭설(?)이 예상되오.
스노타이어는 필요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