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비관할 것인가? 좌파의 도박은 실패다. 경제성장과 침체 중에서 예견해 보라고 하면 좌파는 본능적으로 후자를 선택한다. 이유가 있다. 전자는 경제를 알아야 할 수 있는 말이고, 후자는 경제를 몰라도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장과 거리가 먼 강단에 둥지를 틀고 있으므로, 어차피 경제를 모르므로, 비판만 하는 것이 자기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역할을 좁은 범위로 한정시켜 놓고 있는 거다. 운신의 폭을 좁혀놓고 지는 게임을 벌이려 한다. 예견은 빗나가고, 주도권은 놓치고, 카리스마는 잃고, 세력은 위축되고, 선거에는 참패해도, 강고한 노선을 걷기만 하면 개인의 명성은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의 명성을 위해 동지를 죽인다. 비겁하다.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욕먹을 각오하고 과학에 입각하여 말해야 한다. 과학은 진보나 보수의 편이 아니다. 과학은 때로 불리한 진실을 보고한다. 다 감수하고 진도나가야 한다. 도박하지 말자는 거다. 문제는 이게 50대 50의 확률이 아니라는 데 있다. 경제성장의 확률이 높고 침체의 확률은 낮다. 더구나 한국처럼 좋은 인적자원을 가진 나라는. 비판도 중요하지만 ‘악역’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영리한 여우가 굴을 파더라도 여러 곳에 출구를 두듯이 한쪽에 올인하지 말고 이쪽 저쪽에 전단을 열어야 한다. 미국경제가 엎어지자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며 환호하는 꼴을 보라! “거 봐! 내 말이 맞았지. 내가 뭐랬어? 나는 무려 30년 전부터 신자유주의를 비판해 왔다구!” 이런 주장은 허무할 뿐이다. 30년 동안 계속 틀리다가 30년 만에 한 번 맞혔다는 거 아닌가. 좌파들은 레이건 시절부터 신자유주의를 비판해 왔지만 그들의 예견이 30년간 계속 빗나가니 아무도 그들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왜 재앙이 닥쳤을까? 시장이 그들의 경고를 묵살했기 때문이다. 왜 시장은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했을까? 그들이 30년 동안 틀리는 예측을 계속 내놓았기 때문이다. 냉전이후 제대로 된 예측은 하나도 없었다. 구소련의 몰락과 동유럽의 민주화를 예측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후로도 들어맞은 예측이 없었다. 틀린 예측을 계속 내놓아서 시장이 오류를 범하도록 방조한 그들에게도 경제위기의 책임이 있다. 무릇 지식인 집단은 사회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 눈과 귀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두뇌가 분별하지 못하니 몸이 두뇌를 믿지 않고, 눈과 귀의 경고를 믿지 않고 제멋대로 폭주한 결과 재앙에 직면하게 된 거다. 이명박경제가 추락하면서 아고라를 중심으로 개혁세력이 비관론을 펼쳐 재미를 봤지만, 한번 성공한 건수에 집착한다면 위험하다. 우연히 당첨된 로또에 대한 미련은 버려야 한다. 두 번 당첨의 기적은 없다. 반전은 반드시 일어난다. 경제는 생물이니까. 역사는 기본적으로 진보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진보와 보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진보편에 서는 것이 맞다. 마찬가지로 경제는 기본적으로 성장하게 세팅되어 있다. 성장쪽에 서는 것이 맞다. 경제가 성장궤도에 오르면 앞에 그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을 때,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하는 패턴이 있다. 장애물이 위험한 폭주를 막아주는 숨고르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IMF가 한국경제의 체질을 강화시켰듯이, 경제위기가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경제는 일정부분 정치와 상관없이 가는 경향이 있으며, 이명박이 경제를 망치면 오히려 경제가 더 잘될 수 있다는 역설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경제는 생물이고 시장은 역설적으로 작동한다. 정치측의 의도와는 항상 반대로 되는 경향이 있다. 경제를 살리려 하면 죽고, 죽이려 하면 오히려 살아나는 경향이 있다. 이명박을 궁지로 몰려고 하다가, 오히려 이명박을 도와주는 결과로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명박 때문에 한국경제가 망한다는 비관론에 올인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경제분석은 단편적인 사실을 근거로 해서 안 되고, 긴 호흡의 패턴을 분석해야 한다. 길게보면 조중동이 싫어하는 반시장적(?) 정책이 오히려 경제를 살린다. 국가도 경제의 한 주체라는 사실을 조중동은 모른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만 시장 참여자고 국가는 시장의 주체가 아니라는 발상은 어린아이의 순진한 생각이다. 분명히 말하면 국가도 시장참여자이며 그 역할은 막중하다. 시장에서 깽판치는 자는 국가가 제지해야 한다. 진보는 항상 국가의 역할을 강조해왔다. 작은 정부가 아닌 큰 정부를 주장해왔다. 강만수의 잘못된 개입이 잘못된 거지 국가의 개입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적절히 개입해야 한다. 박정희는 20년간 계속 경제를 망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성장으로 나타났다. 박정희가 경제망치는 것이 뻔히 눈에 보인다고 해서 한국경제가 반드시 망한다고 예견하면 안 된다. 70년대에 김대중이 집권했다면 지금 두 배로 성장했을 것이다. 박정희임에도 불구하고 성장한 것이다. 이 경우 바른 판단은 ‘성장했는가 침체했는가’로 기준해서 안 된다. 원래 성장하도록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시대 성장을 남미나 필리핀과 비교해서 안 되고, 북한과 비교해서 안 되듯이 박정희경제를 논하려면 일본, 대만, 홍콩과 비교해야 한다. 박정희때 한국은 대만보다 못했고 노무현때 한국은 대만을 앞질렀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잘못했고 노무현은 잘했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단위로 판단하지만 실제로 시장은 동아시아 혹은 글로벌경제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잘못해도 대한민국은 잘되도록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이 삽질해도 경제는 언젠가 살아나게 되어 있다. 세팅된 구조로 보아야 한다. 지정학적 구조가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유럽 한 귀퉁이에 붙어있다면 지금 국민소득이 6만불을 넘었을 것이다. 남미에 붙어있다면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비슷하게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에 있다면 볼것도 없다. 경제는 주변환경과 같이 가도록 세팅되어 있었으므로 70년대 한국경제는 무조건 성장하게 되어 있었다. 경제라는 생물이 미국, 일본을 거쳐 한국에 상륙해서 그 영역을 슬금슬금 확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일본경제는 멈추게 되어 있다. 엔고는 금본위제로 되돌아간 효과를 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원리에 따라 양화가 된 엔화는 시장에서 퇴장하는 효과가 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다. 모두들 좋은 엔을 금고에 감추고 나쁜 원을 타인에게 주려고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이유가 있다. 도시의 성장공식에 비유할 수 있다. 성장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대도시에 자본이 집중된다. 박정희가 그린벨트를 두어 위성도시를 키운 것은 인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고 가만 두면 서울만 계속 성장한다. 인재도 서울로 몰리고 돈도 서울로 몰린다.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고 지방은 피폐해진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서울은 슬럼화되고 지방에 부도심이 성장한다. 지구 전체로 봤을 때, 혹은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경제단위로 봤을때 일본은 동아시아의 서울 역할을 한 것이다. 아시아의 서울이라할 일본에 돈과 인재가 몰렸다가 어떤 한계를 넘어서 이제는 슬럼화 되는 단계에 진입했다. 이때 도시의 주변부가 서서히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부도심이 팽창한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서서히 커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교통이 좋고 멀리 떨어진 외곽지역에 새로운 여러 개의 도심이 생겨난다. 이는 하나를 바꾸면 전부 바꾸어야 하는 구조의 양식화 원리에 따른 필연법칙이다. 동아시아는 이 단계에 도달했다. 일본경제는 필연적으로 정체된다. 미국경제도 마찬가지다. 세계경제가 낮은 레벨에 머물러 있는데 미국 혼자 독주하려고 하니 무리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거품이 터지는 것이다. 경제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리듬이 있다. 함께 간다고 해서 모두가 균일하게 함께 가지는 않는다. 거점식으로 가는 것이다. 생물이기 때문이다. 큰 나무가 씨앗을 퍼뜨릴 때 그러하다. 큰 나무가 무제한으로 자라나지 않는다. 고목이 되면 썩는다. 이때 나무는 주변으로 점점 세력을 키우는게 아니라 먼거리에 씨앗을 날려보내 자라게 한다. 큰 나무 그늘에서는 어린 나무가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원리의 이런 측면을 잘 살펴보면 좌파의 이념과 합치하는 점이 크다. 물론 배치되는 점도 있다. 세계경제는 궁극적으로 함게 가야 한다. 유럽이 대략 함께 가듯이. 일방의 독주는 한계에 부닥친다. 이웃이 가난한데 혼자 잘살기는 잠시 가능할 뿐이다. 물론 잠시는 가능하다. 잠시는 경제원리가 좌파의 기대를 배반한다. 경제는 거점성장을 하므로 특정한 거점만 부유해지고 주변은 피폐해진다. 그러나 계속 거점만 잘살려고 하면 총체적으로 붕괴한다. 강남만 잘살겠다고 하면 대한민국은 질식한다. 어느 단계를 지나면 주변부로 확산되어 외곽에 새로운 거점이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상승한다. 그러다가 다시 거점에 집중되는 순환패턴을 가진다. 60년대에 서울만 성장했다가 70년대에 지방으로 확산되었다가, 2000년대에 IT경제가 대두되면서 다시 서울에 집중되는 현상이 생겼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방으로 확산되는 순환패턴을 가진다. 이런 순환구조는 국가간에도 나타난다. 일본, 미국이 잘 나가다가 멈추는 이유도 같다. 게가 허물을 벗듯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멈추어야 한다. 인터넷기업이 처음에는 인재가 많은 서울에서 창업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면 환경이 좋은 외곽으로 빠져나간다. 이 단계에는 이미 성장해 있으므로 본사가 외곽에 있어도 인재가 그쪽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노조가 파업하면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향상된다. 환경을 강조하고 규제와 감시를 까다롭게 하면 오히려 기업체질이 강화된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이 아니다. 경제원리에 그런 측면도 있다는 거다. 무조건 파업하고 감시할 것이 아니라, 맹아기에는 씨앗이 뿌리를 잘 내리도록 지원하는게 맞고, 어느 정도 자라면 솎아주기와 가치치기를 하듯이 규제와 감시를 하는 것이 맞다. 여기에도 규칙이 있다. 무조건 비료만 팍팍 주면 웃자라게 되고, 작은 바람에도 대가 부러져 죽는다. 조중동의 '재벌에게 비료주기'가 경제를 죽인다. 이런 점을 종합해보면 경제원리가 좌파의 주장에 합치되는 측면이 상당하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은 우파, 비판과 감시는 좌파 식으로 도식화 되면 좌파에 불리하다. 지혜있는 여우가 두 개의 출입구를 만들듯이 성장측면과 감시측면에 동시에 대응하는 것이 맞다. 진리 앞에서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으로 보면 좌파에 불리한 측면과 유리한 측면이 공존한다. 자기편에 유리한 쪽만 보고 그쪽에 올인하며 진실을 왜곡하려 들다가는 낭패를 본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경제는 생물이므로 움츠리면 더 멀리 뛴다. 장애물을 만나면 움츠렸다가 높게 도약한다. 경제위기는 한국경제를 움츠리게 했다. 그러므로 얼마 후에 더 높이 도약하게 된다. 좌파의 묻지마 비판은 재도약의 공을 이명박에게 몰아주는 결과로 된다. 이명박의 정책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온통 경제죽이기 일색인데도 글로벌 경제가 살아나는 바람에 이명박이 경제 살린 것처럼 보여진다면? 경제는 적절히 쉬어가야 하고 호흡조절을 해야 한다. 과속해도 되는 것은 시장화가 되어있지 않은 중국 뿐이다. 경제가 시장화 단계를 지나면 조중동이 반대하는 반시장적 정책이 오히려 거시경제를 살린다. 실정이 이러하니 경제죽인 박정희와, 죽이고 있는 이명박은 칭찬을 듣고 경제 살린 김대중과 노무현은 욕먹는 잘못된 평가가 나온다. 문제는 그 잘못된 평가에 좌파의 기여도 크다는 점이다. 경제가 망하는 이유는 더 큰 원인이 있다. 정치불안, 교육실패, 인프라 부재, 외교고립 등이다. 외교가 가장 중요하다. 동유럽, 러시아, 중국과 수교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는가? 마찬가지로 북한과 잘 되면 훨씬 나아진다. 그 외에는 한번 성장궤도에 올랐을 경우 경제정책을 잘못하면 잘못해서 오히려 더 잘되고, 잘하면 잘해서 더 경제를 망치는 역설이 일어난다. 예컨대 경제가 잘 되어 그 잘 되는 쪽에서 인재를 싹쓸이 하면? 재앙이다. 빌 게이츠가 싹쓸이한 세계의 천재들이 MS에서 지금 뭐하고 있을까? 공기업이 싹쓸이한 한국의 인재들 지금 거기서 뭣하고 있을까? 경제는 좋은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것이며 좋지 않은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일 때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위정자가 경제 잘못해서 나라가 결딴난다는 식의 비판은 매우 위험하다. 새옹지마와 같다. 잘못했는데도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는 일은 흔하다. 종합적 안목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긴호흡으로 패턴분석을 하면 올바른 예측을 할 수 있다. 올바른 예측을 해서 우리가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지금처럼 도박을 계속하면 결국 잃는다. 우파가 무조건 성장에 건다고 해서 좌파는 보지도 않고 무조건 침체에 걸면 낭패다. 구조적 접근을 해야 한다. 예컨대 노조가 성장에 도움을 준다고 말했지만 항상은 아니다.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조중동이 필요이상으로 노조를 공격하는 배경이 무엇인가이다. ‘노조를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원인이 있다. 바로 그것을 지적하자는 거다. 왜 그들은 좌절감에 빠졌을까? 왜 그들은 자기네의 능력으로는 노조를 설득하지 못한다고 생각할까? 왜 그들은 자신을 노조도 설득하지 못하는 바보멍청이로 여길까? 이유가 있다. 하나는 노조와 적대관계를 맺는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둘은 자신이 부도덕한 집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부도덕한 집단은 원래 약점이 많다. 약점이 많으므로 대화하면 약점을 찔린다. 회사가 노조와 대화하면 노조가 회사측의 비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러므로 대화가 아니라 물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현대자동차노조만 해도 그렇다. 몽구는 뭔가 약점잡힌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니 약점이 많은 조중동은 노조와 적대관계를 맺는 것이 편하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을 때는 덩치를 키워서 세력을 동원해야 한다. 세력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를 타겟으로 찍어서 괴롭히는 이지메술책을 써야 한다. 비열한 마녀사냥을 벌이는 것이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기만 하면 ‘좌빨이네’ 하는 수법을 쓴다. 이지메 전술을 계속 써먹기 위해서는 적대관계를 유지하며 ‘적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질러 공포를 조장하고 그 빌미로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구조는 좌파진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좌파들은 원래 지식인집단으로서 사회의 눈과 귀가 되고 두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계속 틀린 예측을 내놓아서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신뢰를 잃었으니 대화로 이기지 못한다. 대화에 밀릴 때는 세력을 동원해야 한다. 세력화를 위해 반대편과 적대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수구떼가 노조를 적대하듯이 경제 그 자체를 적대하는 술책을 쓴다. ‘경제는 나쁜 것이여. 돈은 더러운 것이여. 전원생활은 좋은 것이여.’ 무엇인가? 좌파들도 좌절감에 빠져 있다. 말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돈을 딸 자신감을 잃은 도박꾼처럼 운에 맡기고 아무데나 올인한다. ‘경제망한다’에 올인한 결과 성장의 과실을 이명박이 독식할 판이다. 과학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그러나 진보가 먼저다. 과학은 새로운 지식을 내놓는다. 새로운 지식은 신대륙과 같다. 누가 신대륙에 먼저 가는가? 과학자가 먼저가고, 탐험가가 먼저 가고, 자유주의자가 먼저 간다. 먼저 간 진보가 신대륙을 개척하여 사람이 살 수 있을만큼 기초를 닦아놓으면 뒤늦게 무법자가 오고, 조중동이 오고 수구꼴통이 와서 인디언을 학살하고 깽판을 친다. 항상 그런 식이다. 과학은 중립이지만 역사는 진보의 편이다. 왜? 역사는 먼저 가서 터를 닦은 사람의 업적을 기록할 뿐 뒤에 와서 깽판을 친 무법자의 행동은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과학은 우리편에 불리한 진실도 보고하지만 결국 우리편이다. 조중동의 발호는 잠시다. 미국과 일본의 독주도 잠시다. 시장이 통합된 EU가 균등해졌듯이 글로벌경제는 거점성장을 거쳐 균등해지는 방향으로 간다. 백년 후를 생각해보라. 지금 EU에 적용되고 있는 모델이 세계 전체에 적용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낙후한 중국 때문에 미국, 일본이 앞에서 끄는 기관차 노릇을 했지만 백년 후에는 전차처럼 기관차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세팅되어 있다. 최후의 승리자는 우리가 된다. 왜? 우리가 저들보다 더 머리가 좋으니까. 저들보다 더 눈과 귀가 밝고 두뇌의 분별이 명석하니까. 최후의 승리는 돈이 아닌 문화에 돌아가니까. ∑ |
질문이 아닌 물음이니 답하는 짓이 모자란 것이나,
아마도 저 머저리들은 그들의 그 알량한 쪽박이 산산히 부서질 때까지 비관하지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