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나라떼의 최면술 한나라당 토론자들은 상체를 젖혀 의자 등받이에 목을 기대고 느릿느릿한 말투와 몽롱한 표정으로 시청자들에게 최면을 건다. 토론은 항상 우리편의 승리로 끝나지만 의미없다. 논객의 말에 표면적으로 수긍한 사람들도 내심으로는 승복하지 않는 수가 많다. 그 주장을 수용하고 사실관계를 받아들일 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전혀 심복하지 않는다. 왜? 인간은 원래 자기 행동을 바꾸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의 원초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참고로.. ‘설득의 경제학’이라는 책이 있는데 왜 이름이 그런가 하면.. 인간은 원래 서른살 넘어가면 표면적으로 수긍해도, 하던 행동을 바꾸지는 않으려고 하므로 옆에 붙어앉아서 진득하게 설득해야 한다는 거다. 인식과 행동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표면의 인식을 바꾸기는 쉬워도, 그로부터 실질적인 행동을 끌어내기는 어렵다. 건성으로 대답만 ‘네네. 그렇지요.’ 할뿐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도루묵이다. 인간은 원래 목표를 따라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목표는 서른살 이전에 결정된다. 한번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을 자기 인생의 정체성으로 삼아 일관성을 지키려 든다. 한나라당 주장이 액면 그대로는 틀렸지만(아니 그들은 뚜렷한 주장이 없다. 그들은 토론에 관심없다. 단지 눈 게슴츠레하게 치켜뜨고 몽롱한 표정으로 최면술을 구사할 뿐.)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맞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생각하라. ‘옳다 그르다’는 것이 무엇이지? 진리는 또 무엇이고? 그것이 과연 수백만년 진화의 산물인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인가? 인간은 진리의 존재인가? 옳아봤자 그 옳음을 쳐준다는 지식인들에게나 옳을 뿐인것 아닌가? 그래서? 어쩌라고? 인식이 곧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그 사이에 하나가 더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그 무언가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주장으로 이기고, 사실로 이기고, 증거로 이기고, 논쟁으로 이기고, 말로 이길 것이 아니라 문화로 이기고, 양식으로 이기고, 삶의 형태로 이겨야 진짜다.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진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학으로 보자. 인간은 어쩌다 사회를 만들었고 문명을 만들었지만 과연 그것이 아담과 이브 시대로부터의 본성인가? 인간은 원래 들판을 뛰어다니며 몽둥이로 사슴이나 때려잡아먹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맞지 않는가? 어떤 인류학자가 아마존 정글에서 소녀를 데려와 영국에서 현대식 교육을 시켰다. 어엿한 영국숙녀가 되었다. 수 십년 후 결혼하여 자식도 둔 30대 주부가 된 여인은 혼자 아마존 정글로 되돌아갔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왜? 왜 호주의 오리진들은 아직도 문명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가 있다. 모든 인디언 부족들에게는 평생 원수로 지내는 적대부족이 존재한다. 인디언이 몰락한 이유는 백인들이 그들에게 총을 주었기 때문이다. 원수 부족을 만나면 그자리에서 죽인다. 인디언끼리 서로 죽인 것이다. 그들이 머리에 다는 독수리깃은 적대부족과의 싸움에 출전하여 첫 타격을 성공시켰을 때 훈장으로 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원수진 가문이 있었다. 그것이 마치 대단한 유산이라도 되는 듯이 조상대대로 물려지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위신이 서지 않아서 행세할 수 없다는 격이었다. 70년대 초까지도 이웃마을을 지나가려면 마을 입구에 지키고 서 있는 젊은이와 실랑이를 해야했다. 모든 인간은 원래 원수, 혹은 적대세력을 가지고 싶어한다. 왜? 그것으로 자기 행동의 기준을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 결정을 내려야할때, 자기 생각으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편한 방법이 있다. 무조건 적이 가는 반대로만 돌면 된다. 적이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간다는 식이다. 적이 없으면 아무나 만만한 넘 잡고 집요하게 갈궈서 적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만들어낼 수도 없으면? 이야기로 지어낸다. 미국영화에 흔히 나오는 슈퍼맨과 겨루는 악당 말이다. 그게 있어야 안심이 된다. 인간에게 가장 불안한 것은 그 적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적이 어디쯤 잠입해 와 있을까?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으니 땅굴을 찾는다고 설비 동원해서 휴전선 근처를 돌아다닌다. 적은 눈에 띄는 곳에 있어야 한다. 사회에서 적은 소수자로 결정되는 예가 많다.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유태인과 집시, 이교도가 적이었다. 마녀사냥도 그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일어나는 왕따나 이지메가 인간의 본능임을 알아야 한다. 적극적인 교육으로만 퇴치될 수 있다. 특별히 나쁜 아이가 특별히 나쁜 왕따짓을 하는게 아니고 인간은 원래 왕따짓을 하게되어 있으므로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아도 적극 예방하고 교육해야 한다. 청소년은 원래 존재불안을 겪는다. 그래서 화랑도와 같은 청소년 집단이 생겨나는데, 고대 로마에도 있었고 세계적으로 비슷한 것이 다 있다. 패거리지어 몰려다니며 무언가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냥 모인다는 것은 이상하다. 목표가 있어야 한다. 누구를 적대하기로 하면 친목은 쉽게 결성된다. 반복되면 헤어나지 못한다. 좀 논다는 고등학생들은 주로 이웃마을 혹은 이웃학교 패거리와 경쟁상태가 된다. ‘뭐라고? 옆마을 개박이 패거리가 겁도없이 우리동네 빵집으로 진출했다고? 이놈의 자슥들이 감히 우리 구역을 넘보다니 참을 수 없구나. 가자!’ 우르르 몰려가는 격이다. 이유는 없다. 괜히 그런다. 적대관계는 주로 민속놀이로 표현된다. 고싸움이나 차전놀이는 고나 차전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게 구조적으로 승부가 잘 안나게 되어 있다. 원래는 주먹으로 때려서 제압하는 것이었다. 고싸움이나 차전을 보면 수십인이 고나 차전을 잡지 않고 팔짱을 끼고 앞에 도열하는데, 원래 그들의 역할은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싸움인 것이다. 일종의 연극과도 같다. 승부는 사전에 정해져 있거나 요식행위고 실제로는 패싸움이다. 줄다리기도 그렇다.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갈래줄을 말뚝에 묶어놓으므로 아무리 당겨도 줄은 조금도 당겨지지 않는다. 줄을 당기면 줄이 끌려온다고 믿는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젊은이들이 파견되어 저쪽편으로 넘어가서 말뚝을 뽑고 격투를 벌이는 것이다. 잠입도 있고 탈출도 있으며 전술도 있다. 복잡하다. 대가리 깨지고 팔 부러진다. 몇 명 다치고 쓰러지면 노인들이 신호를 보내고 승부가 결정된다. 그 줄 만드는데 보름씩 걸린다. 만약 줄을 당겨서만 승부가 난다면 금방 승부가 나므로 재미가 없다. 보름씩 고생한게 뭐야? 구한말 만리동 고개 돌싸움에는 갓 쓰고 도포입은 양반들도 참여하고 부녀들도 참가해서 무려 5만명이나 합세했다는데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규모가 되면 한 두명 죽는다고 끝나는 게임이 아니게 된다. 축구와 같은 스포츠도 원래 영국에서 탄생할 무렵에는 주먹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경기장은 4키로나 혹은 8키로쯤 떨어진 두 마을 사이다. 공은 언덕을 넘어가기도 하고 혹은 지하터널로 운반되기도 하였다. 보다못한 여왕이 어명을 내려서 주먹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경기장을 축소시켜 놓은 것이 오늘날의 축구다. 여왕의 법을 무시하고 옛날방식으로 반쯤 되돌아간 것이 미식축구다. 미국에는 금지시킬 여왕이 없으니. 중국에서는 향당이 말썽을 일으켰다. 중국 남쪽의 양씨가문과 조씨가문이 각각 가병 수십만을 조직하여 거하게 한판 붙는다는 식인데 조상대대로 내려오면서 원수갚음을 하는 것이었다. 청조말기 태평천국의 난 때 1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인구가 죽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가문전쟁이 어지간한 국가전쟁보다 규모가 컸다. 왜 이런 바보짓을 하는가? 인간은 원래 그래왔다. 반드시 바깥에 적대부족이 있어야 하고, 내부에도 이지메 대상이 되는 유태인, 집시, 장애인, 이교도, 백정, 마녀, 특정지역과 같은 소수자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없는 경우는 없다. 없으면 불안해한다. 그들이 안밖으로 끊임없이 긴장을 조성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명확히 알게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표를 잃어버린다. 평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바보짓을 하게 된다. 조선말기라 치자. 백범 선생이 간척농장 관리인이 되었다. 고용된 노동자 수십명이 전부 노름으로 재산을 말아먹는 광경을 보게 된다. 보통 농장주가 마름을 사주하여 교묘한 방법으로 노름을 시키게 되는데 이유가 있다. 70년대 건설현장 노동자들은 임금을 주면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당으로 준 전표를 조폭 노름꾼을 시켜 전량 회수한다. 지금도 남미쪽으로 가면 주급을 준 다음날은 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농민이나 노동자가 정상적으로 노동해서 저축을 모아 자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70년대만 해도 마을마다 노름쟁이, 아편쟁이, 오입쟁이, 한량질이 있어서 탕진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화폐경제? 생소한 거다. 적응불능. 적대관계를 통한 긴장의 유지가 공동체의 존립기반이었다. 요즘은 TV도 있고, 인터넷도 있고, 스포츠도 있고, 오락도 많아서 세상이 그나마 잘 돌아가고 있지만 예전에는 해만 넘어가면 마을은 깜깜했다. 동기도 없고 목표도 없고 희망도 없다. 교회가 역할하면 겨우 통제되는 격이었다. 바깥에 적대세력의 존재와 내부에 이지메 대상인 정치적 소수자의 존재가 공동체의 기반이었던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란 이 정도의 존재다. 뉘라서 부인할 것인가? 딴나라 논객들은 최면을 건다. 그들은 토론에 승리하는데 관심이 없다. 증거도 불필요 논박도 불필요. 그저 의자를 뒤로 젖히고 기대앉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몽롱한 표정과 느릿한 말투로 암시를 건다. ‘바로 저 자들이 바깥의 적대세력이야.’, ‘저자들이 내부의 이지메 대상이야.’ 이렇게 암시만 걸어주면 끝. 나머지는 저절로 돌아간다. 토론에 져도 표는 나온다. 인간은 원래 약한 존재이니까. 문명이란 진보란 생소한 거니까. 인간이 약하지 않다면 왜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교회가 재벌이 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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