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과 깨달음

 
구조론의 이해는 학습만으로 부족하고 깨달아야 한다. 자동차 운전을 배운다면 이론과 실기를 배워야 한다. 깨달음은 실기에 해당한다. 그 실기의 대상이 자신의 뇌일 때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사고방식을 바꾸고, 그 사유의 기준이 되는 관점을 바꾼다.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뇌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구조론의 중심은 존재론과 인식론이다.

 
인간은 인식론적으로 사유한다. 이를 존재론으로 바꾸어야 한다. 존재론은 툴이다. 수학공식처럼 외어야 한다. 그냥 생각해서 아이디어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쓰듯이 하는 것이다.

 
좌표를 그려놓고 빈 칸에 채우는 것이며, 모형을 만들어놓고 각각의 항목에 대입하는 방식을 쓴다. 문제의 파악이 중요하며 문제가 명확할 경우 1초만에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존재론은 에너지의 결을 따른다. 인식론은 사유의 결을 따른다. 인간이 잘못 판단하는 이유는 사유의 결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뇌구조가 원래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이며 상대의 반응을 보고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사유한다. 이때 댓구 쳐주는 상대가 없으면 곤란해진다. 일본 만담과 같다. 보케는 개그를 하고 츳코미가 받쳐준다.

 
보케가 김병만이면 츳코미는 류담이다. 이때 츳코미의 역할이 중요하며 츳코미가 적절하게 말대꾸를 해주지 않으면 보케는 관객을 웃기지 못한다. 인간의 뇌구조 자체가 이렇게 되어 있다.

 
이는 정치판도 비슷하다. 여당과 야당이 번갈아가며 보케와 츳코미의 역할을 한다. 보케는 엉뚱한 주장을 하고 츳코미는 이를 꼬집는다. 대개 여당이 보케면 야당이 츳코미가 된다.

 
정치는 자살골 넣기 시합이 된다. 야당 입장에 있는게 일단 유리하다. 이번 총선은 야당이 너무 일찍 뜨는 바람에 여야가 바뀐셈이 되어 반격포지션에 선 박근혜가 이득을 보았다.

 
나꼼수가 보케를 맡아 헛소리 하고 박근혜가 허점을 찌르는 츳코미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이겨서 다수당이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박근혜가 보케를 해야 한다. 일단 불리해졌다.

 
존재론과 인식론은 필자가 지은 구조론의 용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자 기준이다. 모든 인간의 오류는 여기서 헷갈리는 거다. 기준이 둘이므로 이중기준의 오류에 걸린다.

 
근대 과학의 출발점은 인과율이다. 인과는 사건을 구성한다. 사건은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를 두 개별적 사건이 아닌, 한 가지 사건의 기승전결로 보는 것이 깨달음이며 존재론이다.

 
사건의 원인측 위주로 보는 것이 존재론이요, 결과측 위주로 보는 것이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결과론이다. 인간은 원래 결과를 보고 단서를 얻어 거기에 추론을 더하여 인식을 조직한다.

 
소실점은 눈으로 보면 보이지만 지난 5천년간 동양인 중에서 소실점을 본 사람은 없다. 소실점을 못 보듯이 보여줘도 못 본다. 인간의 뇌와 언어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누가 츳코미를 해주는 상황에서만, 누군가가 말대꾸를 해주는 상황에서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며 그 상대가 없을 때는 자신이 츳코미가 된다. 즉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것이다.

 
시행착오 없이 처음부터 새로운 일에 도전하여 잘 해내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과감하게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이 오류를 시정하여 바른 판단을 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다.

 
인간의 뇌와 언어와 문법이 원초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작용과 시행착오을 통해서만 바른 판단을 하게 되어 있다. 깨달음이 아니고는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궁수가 활을 쏜다. 화살이 과녁에 맞는다. 두 사건이 기승전결로 연결되는 하나의 사건임을 인식하기다. 그러나 사람이 사건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화살이 과녁에 맞은 다음이다.

 
궁수가 쏘는 장면을 못 본다. 봐도 그게 과녁에 맞은 화살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궁수따로 과녁따로가 된다. 여기서 관점의 이동이 일어나며 그 때문에 상대성과 역설의 혼란에 빠진다.

 
문제는 기준이다. 하나의 기준에 맞춰 풀어야 한다. 원인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존재론이고, 결과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인식론이다. 훈련하면 모든 사건의 소실점, 센터, 기준점을 찾을 수 있다.

 
중요한건 우리가 항상 결과 위주로 사물을 바라보며 결과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점을 인식하기다. 민간인 사찰만 해도 사건의 원인은 모른다. 누가 지시했지? 명박이? 상득이? 영준이?

 
그런데 결과는 안다.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김제동, 김미화, 윤도현이다. 결과를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에러를 낳는다. 에너지의 결따라 원인측에 기준을 세워야 한다.

 
문제는 원인을 모르므로 원인에 기준 세울 수 없다는 점이다. 김용민과 김구라의 막말문제만 해도 결과만 판단되고 원인은 모른다. 8년전 인터넷 성인방송이 어떤 건지 그 배경을 모르는 거다.

 
이때의 인간의 방법은 경험을 원용하는 것이다. 경험있는 베테랑들은 통밥으로 때려잡는다. 보나마나 원인은 명박하다. 그런데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유형의 사건을 맞닥들인다면?

 
이 경우 인간의 거의 백 퍼센트 시행착오에 빠진다. 특히 정치판에는 항상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과거의 재현으로 착각한다. 새로운 현상을 과거 경험으로 해석하므로 오류가 일어난다.

 
구조론의 방법은 그 원인의 모형을 만드는 것이다. 모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세부적인 오류는 있으나 큰 틀에서는 정확하다. 계에 걸린 에너지가 강할수록 정확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식론으로 사유하며 그것이 오류이므로 이를 폐기하고 존재론으로 사유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식론은 귀납이고 존재론은 연역이다. 귀납법을 버리고 연역법을 취해야 한다.


중요한건 무지의 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의 사건을 둘로 나누어 본다는 사실 그 자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본다. 원래 그렇다. 작용과 반작용에서 반작용만 본다.


상부구조는 은폐되고 하부구조 위주로 본다.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못 보고 감기환자의 이마에 끓는 열은 본다. 배후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보지 못한다. 인식론의 병폐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하든 일단 스톱시키고 자신이 잘못본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강용석 사건이 대표적이다. 강용석 입장에서는 의심이 들겠지만 일단스톱-다시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존재론의 문제는 문장이 길어진다는 데 있다. 존재론은 에너지의 결따라 가는 것인데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를 일일이 지정해야 하므로 문장이 길어지고 뇌가 꼬인다. 그러므로 편하게 결과만 본다.

 
태양은 뜨지 않는다. 지구가 뜨는 거다. 이것을 정확하게 말하려 할수록 문장이 길어지고 진술이 복잡해지므로 인간은 편의로 인식론을 쓴다. 큰 문제는 없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답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자가 되면? 오만한 지식인이 되면? 무오류주의 환상에 빠져 상호작용없이 독단적으로 판단하게 되며 이 경우 백 퍼센트 오판한다. 인간은 강한 상대가 츳코미 해줄때문 정확하게 판단한다.


인식론의 문제는 바운더리 지정의 어려움이다. 사건이 정확히 어디서 일어났는지 모르기 때문에 오류에 빠져버린다. 불이 났는데 호롱불이 났는지 라이터불이 났는지 담뱃불이 났는지 모른다.

 
불이 난건 확실하다. 결과는 보이니까. 그러나 전모를 보지 못한다. 보이는 부분만 보는 것이다. 존재론은 바운더리를 먼저 지정하는 것이다. 산불인지 집이 불탄 것인지 담배 피우는 건지 확인한다.

 
다행히 담뱃불이라면 인식론으로 가도 별 문제는 없다. 불행히 산불이라면 인식론의 방법은 재앙이 된다. 바늘을 잃었는데 그냥 찾으면 된다. 결과만 쫓아가도 답을 얻을 수 있다.

 
바늘을 찾기 위하여 자석을 가져오고 계산기를 두들기고 나침반으로 방향과 위치를 파악할 필요는 없다. 바운더리를 몰라도 된다. 근데 바늘이 백만 개라면? 별수없이 존재론을 해야 한다. 그게 구조론이다.


작은 규모, 소소한 일은 인식론의 방법으로 상대방과 상호작용하며 조금씩 찾아가도 된다. 그러나 우주탐험에 나서는 과학자가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대사를 그르치고 만다. 존재론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동차의 조립과 작동은 순서가 반대다. 조립은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지만, 작동은 전체의 기능이 부분에 집약된다. 자동차 전체가 작동에 관여하지만 바퀴 한 부분으로 표현된다.

 

  ◎ 자동차의 조립 – 부분 > 전체
  ◎ 자동차의 작동 – 전체 > 부분

 

  인간의 인식과 행동도 같다. 인식은 눈, 코, 귀, 입, 몸이라는 신체의 말단부에서 오는 정보가 뇌에 모여서 전체의 인격을 형성한다. 행동은 반대로 전체의 인격이 손과 발의 몸짓으로 나타난다.
 
  ‘세팅’과 ‘작동’이라는 두 근본이 있다. 순서는 반대다. 인간의 모든 오류는 이 모순 때문에 일어난다. 이 모순 때문에 인간은 원래 세상을 잘못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 인간의 인식 – 부분(개인) ≫ 전체(공동체)
  ◎ 인간의 행동 – 전체(공동체) ≫ 부분(개인)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멀쩡하게 사는 것은 인간이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체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다. 공동체가 인간 행동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
 
  인간은 개인의 이기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걸려있는 집단의 스트레스가 개인의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개인의 모순을 공동체에 전가하고 빠져나간다.

 

  공동체는 세팅과정이 없이 원래부터 존재하여 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국가도 있고 가족도 있었다. 그러므로 세팅과정이 생략된다. 이에 인간은 세팅과 작동의 모순을 피해갈 수 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의지를 자기 행동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이 어떤 판단과 결정을 내렸다면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소속된 공동체의 명령을 실행한 것이다.

 

  사이비 종교의 인지부조화 행동을 통해 이를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의 잘못된 행동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행동을 정해놓고 필요한 인식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 인지부조화 – 정해진 행위에 맞추어 필요한 인식을 조달한다.
 
  주사파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인식이 잘못되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행동을 정해놓고 거기에 필요한 인식만 조달한다. 잘못임을 알지만 행동을 바꿀 용기가 없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늑대가 사슴을 막다른 길로 유도해도 어쩔수없이 그 쪽으로 달려간다. 이미 가속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연속된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첫 단추를 잘못꿰어버린 이상 계속 그리로 달려갈  뿐이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작동원리 때문이다. 전체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어쩔수 없이 리세팅을 해야하는 경우다. 가족이 없는 고아로 태어났다면 자기 가족을 정해야 한다. 가족을 상실했다면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

 

  인간은 행동에 돌입한 상황에서 방향을 바꾸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바꾸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이혼했다면, 파산했다면, 실직했다면, 질병에 걸렸다면 어쩔수없이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리세팅을 해야 한다. 국가도 정기적으로 리세팅을 한다. 선거다. 정부가 새로 들어선다. 사람도 리세팅을 한다. 연애다. 가족을 새로 맞는다. 이때 인간은 세팅과 작동의 모순에 고통을 겪는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공동체에 소속되며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삼아 세팅과 작동의 모순을 피해가지만 운명적인 리세팅에 직면하여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국가라면 정부가 새로 들어서는 절차가 있고 가족이라면 부부가 새로 맺어지는 절차가 있다. 이때 세팅과정과 작동과정은 반대다. 세팅모드에서 작동모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어렵다.

 

  소통해야 한다. 공동체는 언어에 의해 기능한다. 문제는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다는데 있다. 언어로는 충분한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 소통할 수 없다. 언어는 세팅원리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약속이며 사전에 약속된 범위 안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세팅원리가 아닌 작동원리로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작동원리로 나타나는 것이 미학이다.

 

  미학이 소통을 보완한다. 미학은 양식학이다. 양식은 문화다. 개인의 미학은 스타일이고 집단의 미학은 문화이며 공통되는 바는 양식이고, 양식에는 표준이 있으며 그 표준이 소통의 코드가 된다.
 
  미학은 윤리, 도덕, 관습, 패션의 유행, 문학작품의 히트, 영화의 흥행, 유행어의 탄생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상된다. 변화하고 발전한다. 사회의 진보는 끝없이 새로운 소통의 표준을 세우는데 있다.
 
  미학원리는 세팅원리가 아닌 작동원리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세팅원리다. 학교는 자동차의 조립을 알려줄 뿐 작동은 알려주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을 알려줄 뿐 사랑은 알려주지 않는다.

 

  자동차 운전학원은 있어도 남녀 사랑학원은 없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인간은 기존의 소속을 잃고 새로운 자기 소속을 찾아야 할 때 이러한 번뇌에 빠져든다.

 

  모든 것은 부분에서 전체로 세팅된다. 국가든 개인이든 자연이든 인간이든 마찬가지다. 이 방향은 플러스 방향이고 역방향이다. 모든 것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작동한다. 마이너스 방향이 순방향이다.
 
  ◎ 순방향 작동 – 전체 ≫ 부분
  ◎ 역방향 세팅 – 부분 ≫ 전체
 
  두 방향은 충돌한다. 남녀간의 연애라도 그렇다. 서로를 알아가는 인식과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실천과정은 상반된다. 연애는 손부터 잡고 키스로 가서 섹스로 전개하는 역방향으로 진행한다.
 
  사랑은 반대로 그 사람의 전체를 보고 부분에 접촉한다. 손을 잡았다 해도 손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전체에 관심이 있다. 입술을 마주쳤다고 해서 상대방의 입술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섹스를 했다고 해도 실은 상대방의 인생 전체에 진지한 관심이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생겨난 오해가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흔히 볼수 있는 남녀 사이에 미의 기준이 다르다는 이야기들이다.

 

  여자가 ‘예쁘다’고 말하는 것과 남자가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다르다고 한다. 남녀사이에 미의 기준이 다른가? 아니다. 미의 기준은 같다. 남자에게 예쁜건 여자에게도 예쁘다. 그렇다면 왜?

 

  남자는 여자의 전체를 보려고 한다. 여자는 연출된 부분만 보여주려 한다. 남녀 사이에 미의 기준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의도의 차이가 있다. 남자는 여자의 숨겨진 부분을 알아내고자 한다.

 

  여자에게 예쁜건 남자에게도 예쁘다. 단 관심없다. 남자는 예쁜것보다 다른 많은 것에 관심이 있다. 여자의 지능이나 성격까지 알아내고자 한다. 특히 자신에게 우호적인지 알아내려고 한다.

 

  남자의 ‘예쁘다’는 말에는 단순한 시각정보 이상의 많은 의미가 들어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소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남자든 여자든 의도와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세팅과 작동, 인식과 행동 두 기준이 있지만 둘은 다시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된다. 우주는 작동이 중심이며 인간은 행동이 중심이다. 세팅의 기준과 인식의 기준은 그림자다.

 

  ◎ 세팅과 작동 두 가지 기준이 있다.
  ◎ 두 기준은 다시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되며 그것은 작동이다.

 

  세상의 작동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므로 전체가 중요하다. 세팅보다는 작동, 인식보다는 행동이 중심이다. 세팅과정도 하나의 작동과정이며 인식과정도 하나의 행동과정이기 때문이다.

 

  세팅은 기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세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식은 기준이 될 수 없다. 아직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며 불완전하므로 기준이 될 수 없다.
 
  전체를 기준으로, 행동을 기준으로, 작동을 기준으로, 공동체를 기준으로, 존엄을 기준으로, 완전성을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전체는 우주론이다. 우주의 모습에 따라 개인의 인격이 결정된다.
 
  그 인격에서 동기부여 하여 개인의 행동이 촉발된다. 인격은 공동체 안에서의 자기 포지션이다.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다면 공동체의 규모가 작다. 그 사람의 인격도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집단의 리더가 되면 공동체의 규모가 크다. 그 사람의 인격도 그만큼 커진다. 인격은 공동체 안에서 자기가 찾아낸 포지션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며 인간의 행동은 포지션에 의해 결정된다.

 

  인식과 행동의 모순에 따라 인간은 원래 세상을 잘못 알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으면 이를 공동체에 위임하도록 되어 있다. 전체에 떠넘기는 것이다.

 

  세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므로 부분의 모순을 부분에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집단에 문제를 떠넘긴다. 아이는 울도록 되어 있다. 약자는 비명을 지른다. 철부지는 어리광을 부린다.

 

  용사라도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있다. 인간은 눈물, 비명, 어리광, 스트레스로 문제를 집단에 떠넘긴다. 이에 따라 무의식중에 집단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집단의 의지에 조종된다.

 

  어리광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변인물을 자기편이라고 여기는 태도이다. 이는 사건에 임하여 집단을 특정해 내는 절차다. 인간은 국가, 부족, 가족, 동료 등 여러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이때 자신의 소속집단을 불러내는 절차가 어리광이다. 어리광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얻은 공동체적 생존전략이다. 어린이는 자신이 잘못을 했어도 선생님은 자기편을 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본능이다. 머리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아도 본능의 명령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린다. 저절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무조건 자신이 억울하다고 말하게 된다. 억울하다는 말은 선생님이 당연히 내편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는 이유없는 본능적 당위다. 판단해야할 사실관계와 무관하다. 호르몬의 명령이다.

 

  이때 자신의 잘못이 클수록 오히려 선생님이 더 강하게 내편을 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잘못이 크다면 중대한 사건이며 중요한 사건은 공동체를 개입시켜 해결을 위임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어린이라면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무조건 내편을 만드는게 더 생존에 유리하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도 이런 철부지 짓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자기와 피부색이 다르거나 무엇 하나라도 다른 점을 찾아내기만 하면 곧 적대행동을 하며 주변사람들이 당연히 자기편을 들어야 한다고 믿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바로 행동에 돌입한다.

 

  옳고 그름에는 무관심하다. 어떻게든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사건에 공동체의 관심을 집중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에서 공동체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센세이션 자체가 목적이 된다. 문제해결에는 관심없다.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소집훈련을 해야 위기때 작동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행위가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건수만 발견하면 비상을 건다.

 

  외부의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적대행동에 돌입하고 울면서 비명을 질러 공동체의 개입을 요청하는 식으로 어리광을 부린다. 이러한 철부지 행동은 주변사람 모두를 곤란하게 만든다.

 

  자신이 집단의 리더가 되었을 때 깨닫게 된다. 부하들이 어리광을 부리며 사고를 쳐놓고 자신의 개입을 요청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센세이션을 억누르고 문제해결에 집중하게 된다.

 

  부하가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러놓고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애원하며 ‘내가 사고친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한번 뭉쳤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오면 용서할 수 없게 된다. 부하의 어리광을 중지시키게 된다.

 

  어리광은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어 문제해결을 용이하게 한다. 다만 의도적으로 문제를 만들어낸다. 일체의 차별과 편견은 센세이션을 일으킬 목적의 어리광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은 과거부터 해오던 관성에 따라 집단의 행동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필요한 인식을 짜맞추기로 조달한다. 그런데 개인 차원의 사소한 일은 그냥 개인 차원에서 알아서 해결한다.

 

  그러나 이 때도 개인 전체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개인 전체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섭한다. 인간은 무의식 중에 과거를 감안하고 미래까지 계산하며 자기 행동의 바운더리를 의식해서 행동한다.

 

  이때 문제해결보다 문제의 규정이 더 중요하다. 경마장에 온 경마꾼은 문제해결 곧 경마로 돈을 따는 일보다 문제규정 곧 자신이 참된 경마꾼인가에 더 관심이 있다. 공동체에 소속되고자 한다.

 

  돈을 따서 이익을 얻는 베팅이 아니라 경마장이라는 낯선 공간에 확실한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베팅을 한다. 자신의 어리광 행동이 자연스럽게 경마장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게 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경마꾼이 되는 베팅을 하면 돈을 몽땅 잃는다.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도 돈을 버는 투자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주식꾼이 되는 투자를 한다. 어리광 투자를 하면 당연히 거지가 된다.

 

  어리광 투자는 경마꾼이 무의식중에 경마장이 자기편이라고 믿거나 주식꾼이 무의식중에 증권시장이 자기편이라고 믿는 것이다. 크게 잃어야만 그룹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문제는 자기규정이다. 범죄자는 남의 돈을 훔쳐서 이익을 얻는 목적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범죄자가 되는 범죄를 저지른다. 자신을 범죄자로 자기규정 하는 것이다.

 

  도둑이 필요한 돈을 훔쳐서 재기하는 경우는 없다. 범죄자는 범죄자로서의 자기규정 때문에 결국 상습법이 되어 감옥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는 수구꼴통이나 좌파꼴통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기는 승부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파로, 혹은 좌파로 자기규정하는데만 관심이 있다. 좌파 혹은 우파를 자신의 소속으로 여기고 집단 안에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패배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조치는
 
  첫째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완전성에 대한 이해다. 우주, 세상, 진리, 문명, 공동체 전체에 대한 감각을 얻어야 한다. 모든 판단의 기준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 물론 사소한 문제라면 상관없다.

 

  중요한 일에 직면해서, 리더가 되었을 때,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상실에 직면해서, 죽음과 이혼과 실직과 패배 앞에서는 바운더리 전체, 과거-현재-미래 전체를 통짜덩어리로 인식해야 한다.

 

  둘째 언어의 부조리를 인식해야 한다. 깨달음을 말하는 사람이 ‘모른다’를 선언하며 인식의 한계를 넘을 것을 주장하곤 하지만 그 ‘모른다’는 말에 집착하는 것도 역시 언어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떤 단어로도 깨달음은 나타낼 수 없다. 미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어는 지극히 작은 부분이고 인간은 윤리와 도덕과 패션과 관습과 유행과 문화와 차 한잔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낸다.

 

  셋째 공동체를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소속한 가족, 집단, 교회, 국가, 인류의 집단적 의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반드시 조종되고 만다. 원래 그렇다. 이는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얻은 본성이다.

 

  개인의 행동이 공동체에 센세이션을 일으켜 타인을 사건에 개입하게 하기 위한 어리광임을 인식하고 극복해야 한다. 이는 중간단계가 아닌 최고단계의 자기 소속을 찾음으로써 가능하다.

 

  넷째 감성을 훈련해야 한다. 스트레스와 유머에 민감해져야 한다. 스트레스와 유머는 집단 안에서 개인의 위상 곧 포지션을 나타낸다. 누가 갑이고 을인지 누가 주고 종인지 상호관계로 나타난다.
 
  집단에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도 자신이 전혀 스트레스 받고 있지 않다면 자신의 포지션이 낮은 것이다. 또 문제가 있을때 유머로 다독이지 않고 바로 스트레스를 발산하면 역시 지위가 낮다.

 

  최고의 리더는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리광으로 나타내지 않고 유머의 통쾌함으로 극복해내는 사람이다. 집단의 스트레스를 능동적으로 제어해낸다.

 

  이에 민감해져야 하고 훈련되어야 한다. 예술이나 패션이나 유행이나 문학은 이를 조율한다. 갑을관계, 주종관계, 상하관계로 인하여 일어나는 내부의 마찰을 해소하고 그 긴장을 전달한다.
 
  다섯째 시대의 미션을 실천해야 한다. 인간이 공부를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돈을 버는 것은 세팅이지 작동이 아니다. 공부하여 인격을, 연애하여 공동체를, 돈을 벌어 미션을 작동하는 것이 진짜다.
 
  세팅만 하고 작동은 못한다면 자동차를 제작하기만 하고 타고가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대부분이 그렇다. 인생 헛살은 거다. 유명해져도 출세해도 성공해도 세팅의 성공은 진짜가 아니다.
 
  보수주의로는 성공해봤자 시대의 미션과 다른 역주행이므로 실패다. 이는 축사의 돼지가 살쪄봤자 실패고, 서커스단의 원숭이가 곡예해봤자 실패인 것과 같다. 도둑이 범죄를 성공해봤자 실패다.
 
  시대가 가는 방향, 인류가 가는 방향, 진리가 가는 방향, 공동체가 가는 방향으로 정주행 해야 한다. 작동을 해야하며 세팅만 계속한다면 곤란하다. 사랑을 해야 하며 미팅만 계속하면 곤란하다.

 

  깨달음은 존재의 이해, 언어의 이해, 공동체의 이해, 미학의 이해, 미션의 이해이며 이를 세팅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시키는 것이다. 진리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함께 연주하는 것이다.
 
  스님들이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행하지 않고 말할 뿐이다. 실패다. 무사가 칼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벼리기만 한다. 선비가 글을 쓰지는 못하고 먹만 갈고 있다. 종교의 한계 안에서는 이미 실패다.
 
  진정한 길로 가야 한다. 깨달음은 21세기에 우리가 세계를 리드하며 먹고살 양식이다. 물려받은 자산이다. 모든 아이디어와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그것은 세팅에서 작동으로 확 바꾸는 것이다.
 
  언어의 난삽함을 버리고 미학적 양식의 명쾌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스타일과 안목을 모두가 부러워하고 따라해야 한다. 그러러면 우리가 가장 앞서있어야 한다. 정치에서도 산업에서도.
 
  구조론은 몰라도 된다. 그러나 구조론적인 마인드와 사고와 룰은 지켜야 한다. 구조론적인 삶의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 구조론적인 자연스러움 안에 있을 때 깨닫지 못해도 이미 깨달은 거다.
 
  반면 역주행을 한다면 아는 것이 있어도 안 쳐준다. 보수는 근본 세상에 대한 안티이므로 배제된다. 보수인데 깨달았다는 따위는 성립될 수 없다. 진리의 역주행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안티다.
 

부처님이 심심해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온 것도 아니오.

2500년 전에 살았던 어떤 아저씨도 아니오.
그것은 우리가 함께 가야하는 큰 길이오.

알고 가든 모르고 가든 결국 그리로 가게 되어 있소.
역주행을 하든 순방향으로 가든 결국 모두가 가게 되어 있소.

우리는 이미 부처라는 큰 생명체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이 되어 있소.
당신이 부처의 발가락이든 손톱이든 혹은 손톱 밑의 때든 상관은 없소.

왜냐하면 어차피 구조는 전체에서 부분의 한 방향으로 작동하므로
당신이 어디에 위치하여 있든 당신을 거쳐갈 것이기 때문이오.

부처는 반드시 당신의 눈앞으로 지나가게 되어 있소.
그때 미소를 짓든 혹은 인상을 쓰든

당신은 이미 스틸컷 안에 있으며 
그것은 순전히 당신의 몫이오.

 
묻고 싶다. 진정한 깨달음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의도가 있다. 자신의 행동을 정해놓고 필요한 인식을 조달하려 한다. ‘내게 필요한 말을 해줘!’ 하는 식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다. 자신의 수요를 정해놓고 필요한 공급을 요청한다면 사절이다. 대개 고통의 짐을 덜어내는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이미 환자다. 환자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어렵다.

 

  ‘인생은 고(苦)’라고 정해놓고 ‘나의 고통을 덜어줘’ 하는 식은 곤란하다. 고통을 덜어내려면 병원을 알아보는게 낫다. 석가가 ‘인생은 고’라고 한 것은 그때만 해도 병원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위에 맞추어 인식을 조달한다. 그러므로 행위를 정해주면 좋아한다. 그것이 쉬운 목표이면 더욱 좋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고 행동을 명령해주면 책이 100만 부나 팔려나간다.

 

  행동에 옮기기 쉽기 때문이다. 갓바위 부처님 앞에서 3천배를 해라고 하면 다들 좋아한다. 부적을 갖고 다녀라고 하면 얼씨구나다. 사이비 집단은 당장 실천하기 쉬운 행동강령을 내놓는다.

 

  그따위 난삽한거 말고 진정한 깨달음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계속 읽어도 좋다. 나는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권한다. 여기서 ‘깨달음’이라는 말을 종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종교인들은 깨달음을 무슨 초능력 슈퍼파워로 여기는 까닭이다. 깨달음은 철학 개념이다. 다만 그것을 안다고 하지 않고 깨닫는다고 하는게 다를 뿐이다. 앎은 인식의 세팅이고 깨달음은 작동이다.

 

  ◎ 앎 – 세팅, 인식
  ◎ 깨달음 – 작동, 행동

 

  앎과 깨달음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피아노를 안다는 것과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다르다. 자동차를 안다는 것과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다르다. 아는 것은 다른 것과 구분할줄 아는 것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구분할줄 안다는 것이다. 자동차와 비행기를 구분할줄 안다는 것이다. 연주할 수 있어야 진짜다. 운전할 수 있어야 깨달음이다. 대상을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진짜다.

 

  인간은 망원경으로 관찰하여 별을 알 수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다. 다룰 수는 없다. 바깥을 맴돌 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의 뇌와 마음은 알 수도 있고 다룰 수도 있다.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낙담하는 사람이 많다. 깨달음이 너무 쉽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고고한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가까운 동네 뒷산이었다는 거다. 환상 깨진다. 그러나 오히려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누구든 쉽게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깨닫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내가 이미 깨달았으므로 여러분은 깨닫지 않아도 무방하다. 운전자가 있으면 승객이라도 무방하다.

 

  앞서간 사람이 이미 바둑을 발명했는데 여러분이 또다른 바둑을 발명할 필요는 없다. 여러분은 그저 바둑을 두기만 하면 된다. 내가 이미 피아노를 만들었으므로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누구나 이미 깨달은 거다. 단지 구조론적인 사고방식과 스타일만 얻으면 된다. 단지 세상을 구조로 보는 눈을 얻기만 하면 된다.

 

  세상을 바라보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아니라 좋은 포지션과 나쁜 포지션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을 포지션으로 본다는 것은 재벌회장이 높다 해도 야구장 안에서는 감독이 더 높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높다해도 투표할 때는 유권자가 갑이라는 거다. 대통령도 수술받을 때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스티브 잡스라고 해서 순순히 의사의 명령을 듣지 않다가는 죽음을 맞을 뿐이다.

 

  이런 것을 알면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어떤 강한 상대도 제압할 찬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둑한 배짱과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길 수 있다. 제 풀에 쫄지 않는다. 그것이 존엄이다. 

 

  세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작동에서 세팅으로 간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통해서 얻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앎을 채워넣는다. 행함이 먼저다. 깨달음은 전체를 본다. 완전성을 본다.

 

  그럴 때 마음의 불안에서 치유된다. 존엄을 얻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행동의 시발점인 전체를 잘못 구획한데 따른 것이다. 포지션은 공동체 전체에서 얻어지는 바 포지션 상실 때문이다.

 

  축구는 팀을 갖추어야 포지션을 얻고, 야구라도 아홉명을 모아야 포지션이 생긴다. 항상 전체가 먼저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잘못된 포지션 설정에 따라 일의 출발점을 잘못 찍은데 따른 것이다.

 

  그것은 안티하려는 태도이다. 인간은 포지션을 얻기 위하여 안티를 저지른다. 상대방이 자신의 도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본 다음 거기서 정보를 얻어 2차적으로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사건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데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므로 자신이 일의 출발점을 찍지 못하기 때문이다. 항상 시작은 상대방이 해줘야 한다. 선제공격은 못하고 되치기만 노리게 된다.

 

  그러나 안티하면 종속되고 종속되면 존엄하지 않다. 불행해진다. 전체가 가는 방향을 읽으면 포지션은 저절로 얻어진다. 그럴 때 불행은 없다. 결따라 가는 것이다. 완전성의 이해로 가능하다.

 

  왜 깨달음을 권하는가? 깨달음은 중독성이 있다. 깨달음은 난삽한 언어로 사유하지 않고 계에 걸린 스트레스의 총량을 읽는다. 에너지 총량을 읽는다. 그냥 보고 안다. 팽팽한 긴장이 걸려있다.

 

  깨달음은 마약과 같다. 뇌를 활성화 시킨다. 상쾌한 마음을 얻는다. 집단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유머로 조율한다. 집단에 떠넘기는 어리광의 마음을 버리고 집단을 대표하는 존엄의 마음을 얻는다.

 

  부분이 아닌 전체 포지션에 서기 때문이다. 개인전체, 가족전체, 집단전체, 국가전체, 인류전체, 우주전체의 마음, 대표자로서의 마음, 신의 마음을 얻는다. 전체의 마음을 얻어야 편안해진다.

 

행동이 먼저다. 행동은 전체에서 나온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도 전체 안에서의 자기 포지션을 따른다. 내가 10원을 더 챙기려고 이기적인 행동을 해도 실제로는 가족의 존재를 의식한 거다.

 

내가 10원을 챙기지 못하면 가족이 곤란하다. 가족 안에서 내 포지션이 정해지므로 불행하다. 전체 포지션에 서면 기승전결의 전략이 선다. 가족은 많다. 첫째 아니라도 둘째가 있다. 편안하다.

 

  운전이 서투른 사람도 자신이 핸들을 잡아야 편안해 한다. 인간의 불행은 고난 때문이 아니라 고난에 대응할 다음 단계의 행동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핸들을 잡음으로써 고난은 극복된다.

 

  그냥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마약주사 한번 맞은 것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건 양식이다. 깨달음의 스타일과 문화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 깨달음은 작동이므로 작동시켜야 한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처럼 가장 쉬운 행동목표를 정해주면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런데 가짜다. 깨달음이 요구하는 행동은 진리가 가는, 역사가 가는, 인류가 가는 방향에 서는 것이다.

 

  깨달음을 논하면 ‘그러는 너는 깨달았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법하다. 잘못된 질문이다. 깨달음은 명사다. ‘깨닫다’ 하는 동사와 다른 개념이다. ‘깨닫다’는 동사이므로 반드시 앞에 주어가 있다.

 

  무언가를 깨닫는 것이다. 이미 틀렸다. 깨달음은 세팅에서 작동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인식에서 행동으로의 방향전환이다. 명사로 이해해야 하고 철학개념으로 이해해여 한다. 동사는 곤란하다.

 

  깨달은 사람이 ‘나는 깨달았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면 그것보다 한심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깨달은 사람이 할 일이 없어서 불편하게 방문객 앞에서 그런 얼굴을 전시하여 놓고 있겠는가?

 

  ‘깨달았느냐?’고 묻는다거나 혹은 깨달은 사람의 행동이나 포즈를 기대한다면 이미 사이비 집단을 찾는 거다.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면 피아니스트다. 그런데 어린아이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

 

  심지어 강아지도 피아노를 칠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 자격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를 친다는 것과 건반을 누른다는 것은 다르다. 음과 음들 사이에서 어떤 통일성을 담아내야 한다.

 

  깨달음은 누가 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게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등단을 해야 시인이 되고 신춘문예를 통과해야 소설가도 되고 한국기원 인가를 받아야 바둑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상주의 그림을 그리면 인상파다. 자신은 인상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인상파 화가도 있다. 상관없다. 강아지라도 말을 한다면 사람 대접을 받는다. 농부라도 글자를 안다면 선비 대접을 받는다.

 

  깨달은 사람과 소통하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다.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인상주의 안에서 활동하면 곧 인상파이듯이 깨달음의 문화와 그 바운더리 안에서 활동하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양식이고 양식은 동조되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깨달음이 죽은 것은 깨달음의 문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문화가 이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신통한 것을 새로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건을 내놓아야 한다. 인터넷을 아느냐고 묻지 않는다. 인터넷을 하느냐고 묻는다. 인터넷을 하는데 인터넷을 아느냐고 물을 이유가 없다.

 

  깨달음이 구체적인 물건을 내놓을 때 깨달았느냐는 물음은 사라진다. ‘깨달았다’는 선언도 사라지고 ‘깨달았느냐’는 물음도 사라져야 진짜다. 그러자면 구체적인 물건을 내놓아야 한다.

 

  건축과 음악과 회화와 패션에 깨달음이 반영되어야 한다. 조선시대의 건축과 의복과 삶의 양식은 그 시대의 깨달음이 반영된 것이다. 아이폰의 디자인은 스티브 잡스의 깨달음이 반영된 것이다.

 

  산업의 시대가 가고 양식의 시대가 온다. 우리가 최고의 디자인을 내놓아야 하고 그것이 21세기의 정신과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전체를 총괄하기 때문이다.

 

  삼성은 스마트폰 안의 기계만 보았고 애플은 그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의 행동까지 보았다. 애플이 전체를 들여다 볼 때 삼성은 부분을 본 것이다. 디자인은 반드시 전체를 꿰어야 이루어진다.

 

  TV를 디자인한다면 TV시대의 삶의 양식은 어떠한가를 묻고 거기에 맏추어 디자인하는 것이다. 물론 몽구 아저씨는 모르고 마구잡이로 디자인하지만 원래 그렇다. 양식은 전체에서 출발한다. 

 

  전체는 행동이다. 인식에 행동이 따르는게 아니고 행동이 앞서가며 그 시행착오를 인식으로 메꾼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한만큼 안다. 행은 내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로부터 촉발된다.

 

진리의 행동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인식은 저절로 채워진다. 나는 알고자 하지 않았다. 단지 분노했고 슬퍼했고 반응했을 뿐이다. 이에 커다란 낙차가 만들어졌고 필요한 것은 저절로 채워졌다.

 

  인상주의 이전에도 인상주의는 있었지만 누가 인상주의라고 말해주기 전에는 그 의미를 몰랐다. 깨달음은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 있지만 체계화 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수학은 못되고 산술은 된다.

 

  ‘내가 깨달아야 한다’는건 소승적인 생각이다. 깨달음은 팀플레이다. 팀의 일원으로 가담하는 것이 대승이다. 이미 팀이 출범했으므로 가담하면 된다. 모르고 혼자 가던 길을 알고 함께 가는 거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권할 뿐 ‘수행하여 깨달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전체가 먼저다. 행동이 먼저다. 내가 이미 축구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함께 하다보면 저절로 축구가 되는 거다.

 

  행함이 먼저다. 한 사람이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인상주의도 처음 한 사람이 하던 것을 나중 모두가 하게 된 것이며 처음 그것을 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하다보니 중독되고 길이 있으니 그 길로 계속가게 된 것이다. 그리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중독되어야 하고 미끌어져 들어가야 한다. 수행하여 깨닫겠다면 이미 틀렸다.

   
 깨달음은 되는게 아니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미션을 행할때 이미 깨달음의 세계 안에서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초대하는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면 그 뿐
수행하여 무엇을 깨닫고 따위는 없습니다. 
리얼리즘 문학의 개척자 발자크는 스스로 보수를 자처했고
살바드로 달리도 마찬가지이나 이는 개인의 성격일 뿐
그들은 강렬한 진보의 바운더리 안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시대의 호흡 안에서 격렬하게 반응했던 사람입니다.
마네는 인상주의를 부인하며 그들을 멀리했으나
젊은 추종자들이 몰려들어 떠받드는 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이 가는 길에 들어서 버리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행함에서 비롯되며 인식은 가짜입니다.
진보주의도 마찬가지로 행함이 먼저입니다.
인식으로 진보를 논한다면 가짜입니다.
무엇보다 깨달음의 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오라.
 

◎ 앎과 깨달음이 있다.
◎ 앎은 세팅하고 깨달음은 작동한다.
◎ 앎은 인식하고 깨달음은 행동한다.
◎ 앎은 귀납하고 깨달음은 연역한다.
◎ 앎은 피아노와 오르간을 구분하고 깨달음은 그 피아노를 연주한다.
◎ 앎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고 깨달음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 깨달음, 작동, 행동, 연역, 전체가 자연의 본모습이고 그 반대쪽은 그림자다. ◎ 앎은 불완전하고 깨달음이 완전하다.

◎ 자연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데 인간의 인식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므로 인간은 원래 세상을 잘못 알게 되어 있다.
◎ 깨달음은 앎을 깨달음으로, 부분을 전체로, 세팅을 작동으로, 귀납을 연역으로, 인식을 행동으로, 불완전을 완전으로 바꾸어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다. ◎ 깨달음은 그 둘 사이에서 단지 방향만 바꾼다.

◎ 인간의 전체는 공동체다.
◎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공동체의 지배를 받는다.
◎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도 실제로는 가족, 집단, 인류를 의식하고 그 바운더리 안에서 좋은 포지션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 인간의 모든 실패는 어떤 사건이 시작되는 시발점을 찾지 못한데 따른 자기 포지션 지정의 실패 때문이다.
◎ 가장 큰 바운더리가 되는 공동체 전체를 기준으로, 완전성을 기준으로 삼아 그 바운더리 안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을 때 인간은 평온해진다.
◎ 전체를 기준으로 볼 때 개별적인 사건의 성공과 실패는 기승전결로 이어져 가는 전체과정의 일부이며 그 전개과정에 용해된다.
◎ 성공이든 실패든 축구시합 중의 패스 하나에 불과하며 전체의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부담없이 각자의 삶을 즐길 수 있다.

◎ 개인이 소승적 깨달음은 의미없고 전체의 대승적 방향성이 중요하다.
◎ 개인이 깨달았느냐 못깨달았느냐는 바보같은 소리고 대승적으로 깨달음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 김기덕
고흐
천상병
권정생
이상
소로
칼릴 지브란
파울로 코엘료
오스카 와일드
아멜리노통브
낸시랭
한비야
등은 우리쪽 사람이다.
인상주의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개척한 사람, 삶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우리편이다.
 
열거한 이름들 중에는 반쪽짜리도 있을 수 있다. 오해된 인물도 있을 수 있고 나중 변절할 인물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우리편이 있다는 거다.
 
우리가 가는 길이 있다.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완전성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열심히 하지만 쭉정이인 경우도 있다.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 우리편이고 남 눈치 보며 역할을 찾으면 쭉정이다.
 
스님들 중에는 우리편이 거의 없다. 승복 입고 머리 깎은 자체로 이미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는 것이며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났다. 종교나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자연스러움의 길을 가면 우리편이다.
 
삶에 있어서 자기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 그 스타일을 완성해야 한다. 목적이나 의도에 치이면 실패다. 잘 먹고 잘 살고 잘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인생 안에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있어야 하고 일관된 주제가 있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않고 말로 그림을 그렸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말로 그린 사람은 반드시 설명이 들어간다. 설명 들어가면 이미 가짜다.
 
자기다운 삶의 스타일을 완성하고 그 스타일을 과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그 스타일은 창의적이어야 하며, 시대의 흐름과 맞는 것이어야 하며, 팀플레이 안에서 명확한 포지션을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
 
인상주의 이전의 그림과 조선시대 민화의 공통점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의미가 있으므로 설명 들어간다. 이것은 복을 받으라는 뜻이고 이것은 과거 급제하란 뜻이라고 설명되면 이미 틀렸다.
 
이건 비너스 신이고 이건 아폴로 신이라고 설명 들어가면 꽝이다.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집, 보기 좋은 집은 좋은 건축이 아니다. 이미 설명 들어갔고 의미 들어갔기 때문에 조미료 넣은 요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작품이 아니다.
 
앎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고 깨달음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다. 먼저 자동차를 만들고 난 다음에 자동차를 운전해야 한다고 믿지만 이는 착각이다. 진정한 자동차는 팀이다. 팀 안에서 활동해야 자기 포지션이 찾아진다.
 
운전해야 알아진다. 자기스타일을 만들어야 깨달음은 이루어진다. 태어날때부터 인류호는 출범했고 팀은 꾸려져 있다. 팀플레이 해야 한다. 인류의 행함 안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아 행할 때 앎은 이루어진다.
 
진리의 행함 안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아 행할 때 앎은 얻어진다. 깨달음은 그릇이고 행할 때 앎은 저절로 채워진다.
 
인간의 삶이 괴로운 것은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왜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고 모르는 이유는 그 이유가 원래 개인 안에는 없기 때문이다. 답은 공동체 안에 있다. 자기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자기 포지션을 얻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괴로운 것은 인류호라는 팀 안에서 자신이 공격수인지 수비수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팀플레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료의 패스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행해야 알아진다. 알아야 괴로움은 사라진다.
 
깨달음 안에서 인생의 실패는 없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합은 기승전결로 이어지며 여전히 진행중이고 내가 한 일은 그 시합 안에서 하나의 패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합에 출전한 사실 자체가 이미 성공이다.
 
당신이 오늘 100만원을 잃었다면 당신이 일생동안 벌어들일 총 수입규모 5억원 혹은 10억원 안에서 잃은 것이다. 오늘의 100만원으로 보면 실패지만 전체의 5억원으로 보면 오늘의 경험치로 다음번 투자의 성공확률이 올라갔을 수 있다.
 
전체로 보면 성공도 실패도 없다. 그러나 피아구분은 있다. 우리편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해야 한다. 적에게 패스하면 곤란하다. 우리편 골대가 어딘지 알아야 자기 포지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의 방향성을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의 좌표를 읽으면 마음은 평온해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전체를 개입시키는 장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화가 났다면 혹은 우울하다면 이는 공동체 전체를 의식하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당신에게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슬프다면 전체를 보라. 외롭다면 전체를 찾아라. 화가 났다면 전체를 찾아라. 작은 슬픔이면 가족 전체를 찾고, 큰 슬픔이면 나라 전체를 찾고, 더욱 큰 슬픔이면 우주 전체를 찾아라. 그 전체가 당신을 통과하여 지나갔음을 포착하라.
 
내가 깨닫는다는 소승의 마음을 버리고 팀에 가담한다는 대승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대승은 큰 수레요 큰 팀이다. 팀 안에서는 포지션이 요구된다. 자기 스타일의 완성이 요청된다. 그것을 얻었을 때 마음은 평온해진다.
 
그것을 얻은 사람이 눈은 빛난다. 그것이 얻어야 할 존엄이다.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는 영역보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더 많은 것을 결정합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는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타격받고 난 후에 당신은 그 사람이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 포지션이 분명해져야만 인간은 무엇이든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릴없이 빈둥대는 시간에 당신의 본능은
당신과 주변인물과의 거리를 명확히 계산하여 목록을 뽑아놓고 있습니다.

 
생각하라.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이라고 대답하기 쉽지만 거짓되다.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술꾼은 비싼 양주가 행복이고 도박꾼은 잭팟이 행복이고 경마꾼은 999가 행복이다.
 
단 하나로 압축되어야 한다. 그것은 존엄이다. 무엇인가?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여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왕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알아야 한다. 왕자가 왕보다 높다는 사실을.
 
더 멋진 것은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신분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은 원래부터 왕자로 태어난 사람임을 무리로부터 확인받는 것이다. 원래의 고귀함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칭송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로부터 납득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평가된다면 이미 틀렸다. 왕은 타국의 왕과 비교되고 평가되지만 왕자 혹은 공주는 평가되지도 비교되지도 않는다.
 
인간은 행복을 원하는게 아니다. 불행한 자나 행복을 찾을 뿐이다. 인간은 존엄을 원한다. 왜인가? 유전자의 명령에 의해 원래 그렇게 세팅되어 있다. 이유는 없다. 인간의 본 모습이 그러니까 그런 거다.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다. 공동체가 먼저고 개인은 나중이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상부구조가 먼저다. 인간은 언제라도 공동체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연어가 고향으로 회귀하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공동체에서 개인이 나왔으니 공동체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본성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존엄이다. 원래 그러니까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부분보다 전체가 먼저고, 인식보다 행동이 먼저고, 행복보다 존엄이 먼저다.
 
문제는 당신이 왕자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왕궁이 없기 때문이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다고 해서 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왕자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군주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왕궁은 어디에 있나? 공동체의 중심에 있다. 인간은 자궁에서 나왔으므로 자궁으로 회귀하려고 하고 왕궁에서 나왔으므로 왕궁으로 회귀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공동체의 중심이 없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것을 만들어야 하고 바로 그것을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지배해야 한다. 실천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바다.
 
말로는 돈을 원한다거나 혹은 출세를 원한다거나 혹은 성공을 원한다거나 하지만 그것은 열등감의 표현일 뿐이다. 돈이 없으니까 돈을 원하는 거다. 출세를 못했으니까 출세를 원하는 거다. 이런건 신기루다.
 
원시시대에는 돈도 없고 출세도 없고 성공도 없었다. 벌거벗고 초원을 뛰어다녔다. 그때 그시절에도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배기다. 그때도 존엄은 있었다. 공동체의 중심은 있었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봤자 결국 남에게 준다. 화폐라는 것은 원래 남에게 주도록 되어 있는 물건이다. 자신이 그것을 쥐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화폐는 시장에 있어야 화폐다. 지갑에 갇혔을 때 그것은 종이다.
 
인간이 버는 수익의 90퍼센트는 타인에게 준다. 혹은 타인을 위해 쓴다. 혹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쓴다. 벌어들인 월급의 1/4은 국가에 주고 1/4는 집주인에게 주고 나머지는 부인과 자녀에게 준다.
 
순수하게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 자신의 소비다. 좋은 옷을 입어도 그것을 봐주는 것은 타인이다. 좋은 차를 몰아도 그것을 부러워 해주는 것은 타인이다. 인간은 결국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남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자신이 실제로 얻는 것은 음식과 배설 밖에 없다. 그 음식 또한 제것은 아니다. 남을 위해 일하기 위한 칼로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실한 것은 사회적 포지션 밖에 없다. 인간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줄 수 있는 포지션을 원한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조금이라도 공동체의 중심과 가깝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이 왕궁이기 때문이다. 정작 돈을 손에 쥐게 되면 은행창구에 줘버리거나 가게의 점원에게 줘버린다. 들어오는 속도로 빠져나간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존엄이며 그것은 높은 자리다. 그 자리는 공동체 내의 모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 자리에서 인간이 하는 일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일이다. 바로 그 자리가 왕자의 자리다.
 
인간은 누구나 왕자로 태어나기를 원하지만 이미 태어났으므로 태어날 수 없다. 왕궁이 없으므로 왕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 뿐이다. 첫째 왕궁을 지어야 한다. 둘째 매 순간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어떻게 왕궁을 지을 수 있는가? 전위에 섬으로써 가능하다. 공동체의 중심이 왕궁이다. 문제는 그 중심이 변한다는데 있다. 날아가는 화살의 무게중심은 가운데보다 약간 앞에 있다.
 
그곳이 전위다. 그곳이 왕궁이다. 그곳에 서야 한다. 그 중심은 변한다. 왜냐하면 중심은 환경과 상호작용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배의 중심은 키다. 키는 배의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배와 파도 사이의 가운데다.
 
배와 바다와 둘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의 변화와 그 변화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곳이 왕궁이다. 정답은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해야 하며 그 상호작용의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은 왕자이다.
 
사람이 두 발을 교대로 앞으로 내딛으며 걸어가듯이 상호작용의 중심은 전진을 촉발한다. 가만이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상호작용이 없다. 무조건 발을 앞으로 내밀어 전진해야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은 필연적으로 진보를 낳는다. 그것은 생물의 진화, 조직의 확대, 자본의 팽창으로 나타난다. 진화하지 않는 생물, 확장되지 않은 조직, 팽창하지 않는 자본, 진보하지 않는 역사는 왕궁이 없다.
 
인간은 무엇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기를 원한다. 된다는 것은 열등감의 보상심리에 불과하다. 한다는 것은 악기가 소리내어 연주하듯이 제 안에 들어차 있는 것을 토해낸다는 거다. 상호작용이다.
 
인간은 피아노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피아노인 채로 곡을 연주하기를 원한다. 자기 안의 가능성을 펼쳐내기를 원한다. 왕궁은 그 안에 있다. 왕자와 공주도 그 안에 있다. 고귀함이 그 안에 있다.
 
인간은 바닥에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하여 신분상승을 이루어 정상에 올라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정상에서 태어나 잠시 아랫동네를 여행하여 정상의 자리를 비웠지만 곧 제 자리로 찾아가기 원한다.
 
상호작용의 모든 것의 중심이다. 반응하지 않을 때 인간은 죽는다. 팔팔하게 살아있어야 한다. 인간이 도박이나 경마에 빠지는 것은 도박의 현장에서 특히 상호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왕궁이라고 치기 편하다.
 
인간이 음악에 빠지는 것은 음악이 가장 상호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과 건반의 상호작용이 매우 민첩하다. 왕궁은 그 안에 있다. 인간이 패션의 유행에 빠지는 것도 그러하다.
 
한국인들이 특히 정치뉴스에 민감한 것도 그러하다. 사람들이 강남에 입성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그곳에 활발한 상호작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곳에 존엄이 있고 왕궁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엄하다는 것은 어떤 일의 첫 번째 원인이 된다는 것이며, 큰 흐름의 대열에서 가장 앞서있다는 것이며 무리를 이끌고 나아간다는 것이며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는 것이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둔감한 자, 상호작용하지 않는 자, 보수적인 자, 안티를 하는 자, 선수가 아닌 심판이 되겠다는 자, 타인과 비교하는 자, 열등감의 보상을 바라는 자,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자, 고립으로 만족하는 자는 존엄이 없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신과 밀접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정보가 자기를 통과해 가며 모든 무대가 자신을 위해 연출되고 모든 결정을 자기가 내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뇌가 원래 그렇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원리에 의해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그렇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노력하여 어떻게 되는 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다.
 
원래 깨달아서 태어나는 것이 진짜다. 이미 태어나 버렸으므로 원래 깨달아서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새로 태어나는 수 밖에 없다. 그 방법은 계속해서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방법 밖에 없다.
 
새로운 유행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음악이 태어나고, 새로운 회화가 창조되고, 새로운 스타일이 완성되고,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될 때 인간은 새로 태어나며 그 중심에 설 때 인간은 공주 혹은 왕자로 태어난다.
 
그럴 때 인간의 뇌는 마약과도 같은 쾌락물질을 분비한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중독된다. 이미 중독되어 있다. 아기때 재롱을 부려 가족의 주인공이 되었듯이 죽을때까지 인간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태어날 때 인간은 모두의 관심을 받고 주인공이 되며 평생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길을 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실천할 때 인간은 자부심을 얻는다. 세상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된다는 자부심이다.
 
그것은 완전성이다. 미추를 가려보는 눈을 얻었을 때 얻는 자신감이다. 엄마품의 아기가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듯이 세상이 만만해 보이는 거다. 그것은 호연지기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선을 얻는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사건의 출발점을 찍을 수 있다. 그럴 때 마음은 태산처럼 의연하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대응할 카드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방향성이 있으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과가 한쪽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좌절하는 것은 성공하거나 실패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가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 흩어진 것을 주워모으는데 에너지가 손실되기 때문이다. 결과가 한 쪽으로 모인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다.
 
열 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으면 열한 번 찍으면 된다. 나무는 쓰러지지 않았어도 데미지는 누적되어 카운트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방향성이다. 방향을 얻을 때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마음은 태연하다.
 
전위에 서야 전체가 가는 방향성을 얻을 수 있고, 결과를 한 쪽으로 모을 수 있다. 진보에 서야 하고, 첨단에 서야 하고, 정상에 서야 하고, 가장 민감한 곳에 자리잡아야 하고 격렬하게 상호작용해야 한다.
 
그곳이 왕궁이고 그곳에 서는 자가 공주이고 왕자이고 주인공이다. 왕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매 순간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매 순간 우주를 새로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전자가 그렇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결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그러한 임무를 주기 때문이다. 인류가 그렇게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렇게 이룩되었다.
 
한 숟갈의 밥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만 배고플 때 까지다. 인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것은 세상의 중심과, 그 중심의 진보와 매순간 격렬히 반응하고 새로운 상호작용을 끌어하는 것이다. 세상을 연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