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어떤 게시판에서 답글로 씌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역사적 배경부터 충실히 살펴야 한다. 허투루 꾸며낸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내용만 가지고 전모를 다 알 수는 없고 일단 보이는 부분만 살펴하기로 하면..

임제가 황벽에게 사직을 고하였다. 그러자 황벽이 말했다.

 "딴 곳으로 갈 필요가 없느니라. 가서 대우스님을 찾아뵈어라. 너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임제가 대우스님께 이르자, 대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황벽에서 왔습니다."
 "황벽이 뭐라 하던?"
 "저는 세번 불법의 대의를 여쭈었는데, 세번 다 얻어 맞았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걸 아직 모르겠습니다."
 "황벽이 그렇게 어린 아이를 보살피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너를 고해로부터 건지기 위해 철두철미 배려를 게을리하지 않았거늘, 이놈아, 그래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잘못이 있냐 없냐를 물어?"

임제는 바로 이 말에 크게 깨닫는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황벽의 불법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만, 개뿔도 아니었군."

대우가 임제의 목덜미를 잡고 닦아세운다.

"뭐라고? 빨리 말해봐, 빨리!"

 이에 임제가 주먹으로 대우의 갈비를 세번 갈기니 대우가 말한다.

 "이놈아, 네놈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아니다."

 위에서 『황벽의 불법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만, 개뿔도 아니었군』은 『元來黃檗佛法無多子』 를 내 식으로 풀이한 것이다. 도올은 『황벽의 불법은 원래 구질구질한 대목이 없었다 』로 풀이했다.

도올의 해석이 그런대로 50점은 줄만하다. 『황벽의 불법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만, 개뿔도 아니었군』하는 풀이는 일반적인 해석이긴 하나 좋지 않다. 『황벽의 법은 간단하군.』.. 이 정도가 적당하다. 원문을 다시 검토해 보면.

"저는 세번 불법의 대의를 여쭈었는데, 세번 다 얻어 맞았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걸 아직 모르겠습니다."

임제의 질문과 답변요구는 곧 분별심을 의미한다. 그러니 얻어맞아야 한다.

 "황벽이 그렇게 어린 아이를 보살피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너를 고해로부터 건지기 위해 철두철미 배려를 게을리하지 않았거늘, 이놈아, 그래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잘못이 있냐 없냐를 물어?"

 잔소리가 많다. 역시 분별심 탓이다 대우도 맞아야 한다.

 임제는 바로 이 말에 대오한다. 그리고 포효한다.
"황벽의 불법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만, 개뿔도 아니었군."

좋지 않은 해석이다. 의미가 왜곡되고 있다.

대우가 임제의 목덜미를 잡고 닦아세운다.
 "뭐라고? 빨리 말해봐, 빨리!"

대우의 헛소리다. 이쁘지 않다. 또한 뒈지게 맞아야 한다.

이에 임제는 주먹으로 대우의 갈비를 세번 갈긴다.

앞에서 임제가 元來黃檗佛法無多子라고 말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이 역시 분별심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로 하지 않고 주먹으로 한다.

 대우가 말한다.
 "이놈아, 네놈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아니다."

역시 대우는 100방 맞고 500방을 더 맞아야 한다. 이런 경우를 두고 매를 번다고 한다.

이상의 이야기를 검토해 보면 황벽이 그런대로 단수가 높고, 대우는 한수 아래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즉 대우는 여전히 말로 줏어섬기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저는 세번 불법의 대의를 여쭈었는데, 세번 다 얻어 맞았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걸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건 분별심에 가득찬 내용으로 500방을 맞아야 할 소리다. 그러나 뒈지게 맞아도 깨닫지 못할 위인이니 대우가 말로 해설해주고 있다. 그런데 역시 좋지 않다.  

 "황벽이 그렇게 어린 아이를 보살피는 심정으로 간절 하게 너를 고해로부터 건지기 위해 철두철미 배려를 게을리하지 않았거늘, 이놈아, 그래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잘못이 있냐 없냐를 물어?"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황벽의 본뜻과는 맞지 않다.  

“元來黃檗佛法無多子”

임제가 대오했으나 이 말은 좋지 않다. 그래서 대우의 반격이 들어간다.

 "뭐라고? 빨리 말해봐, 빨리!"

최악이다. 물론 임제가 먼저 헛소리를 지껄였으므로 임제부터 100방을 맞아야겠지만 대우의 반격이 황당했기 때문에 임제가 딱 세방만 먹인다.

이에 임제는 주먹으로 대우의 갈비를 세번 갈긴다.
 대우가 말한다.
 "이놈아, 네놈 스승은 황벽이니 (내가 나설일이) 아니다."

역시 똥통같은 소리다.

그런데 이상의 해석은 물론 잘못 전해진 엉터리 해석이니 이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 안된다. 원래 임제는 대우를 두들겨 패고 온 것이 아니라, 실은 대우에게 뒈지게 맞고 다시 황벽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뒷 이야기가 더 있다.

임제가 대우에게 하직하고 황벽에게 돌아왔다. 황벽이 임제가 오는 것을 보고 묻는다.

  "이놈이 번잡게 왔다갔다 하는구나. 그래 어떤 성취가 있었느냐?"
  "다만 스님의 노파심절(老婆心切) 때문입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대우스님께 갔다 오는 길입니다."
  "대우가 뭐라고 하던가?"

임제가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자, 황벽이 말했다.

"뭣이라고! 대우 이 멍청한 놈이 오면 몽둥이로 스무 방을 때려야겠구만."

그러자 임제가 말했다.

"기다릴거 뭐 있습니까. 지금 맞아 보십시오."

하면서 황벽의 뺨을 후려쳤다. 황벽이 말한다.

"이 미친 놈이 호랑이 수염을 뽑으려 드는구나!"

임제가 갑자기 고함을 쳐 할(喝)을 하니 황벽이 말한다.

"시자야, 이 미친 놈을 끌어내라."

이후 임제는 화북으로 달아나 임제의 할을 유행시켰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중 일부는 공안으로 삼기에는 상당히 수준이 떨어진다. 임제가 대우를 두들겨 패고 황벽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는 내용은 임제가 화북으로 진출한 후 임제의 후학들이 임제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황벽과 대우를 깔아뭉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로 말하면 황벽이 임제를 두들겨 팼는데도 인간이 깨닫지를 못하니, 대우에게 보냈고, 대우가 방으로 임제를 두들겨 패서 깨닫게 한 것이다. 임제는 황벽과 대우에게 배웠는데, 임제가 누구에게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임제의 후학들에게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인 고로 임제가 황벽과 대우를 두들겨 팼다고 허투루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어쨌든 임제가 황벽과 대우에게 두들겨 맞은 것은 노파심절(老婆心切) 때문이니 또한 이를 엿보도록 하자.

덕산은 본래 금강경에 능통하였다. 당시 남방에서 선종의 무리가 창궐한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하여  금강경소초를 짊어지고 떠났다. 점심 때가 되어 길가에서 떡 파는 노파를 만났다. 덕산님이 노파에게 말했다.

 "점심을 먹으려하니 떡 한접시 주시오."

 이에 노파가 응수한다.

 "내 묻는 말에 대답하면 떡을 줄것이지만 대답을 못하면 떡을 주지 않겠다"

하고 노파가 묻는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수?"
  "금강경 소초가 있소."
  "그러면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하는 말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을 하시려는 것이오?"

  덕산은 아무 말도 못하고 노파에게 물었다.

  "이 근방에 큰 스님이 어디 계시오?"
  "이리로 가면 용담원에 선사가 계시오."

  덕산은 떡도 못얻어먹고 용담을 찾아 갔다.

  "내 전부터 용담(龍潭)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

  하니 용담이 말했다.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만."

 덕산이 할말을 잃고 용담의 수하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다. 하루는 공부를 하다가 밤이 되어 촛불을 켜려고 찾고 있는데 이때 용담이 초에 불을 켜서 주니 덕산이 받으려고 하자, 용담이 입으로 훅 불어서 촛불을 꺼버렸다. 덕산이 깨쳤다. 다음날 덕산은 금강경소초를 불태워 버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멋진 대목은

  "내 전부터 용담(龍潭)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만."

이 대목이다. 용(龍)과 담(潭)은 물론 분별이다. 용과 담이 없다는 것은 분별이 없다는 뜻이니 요 대목이 절창이라 할 만하다.

깨달음의 목적은 소통에 있다. 소통의 최고경지는 이심전심이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소통의 장애물이다. 언어가 참된 소통의 장애가 되는 것은 분별습관 때문이다. 분별을 넘어서 이심전심에 이를 때 소통이 열린다.

길은 본래 서로 통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우리가 만나는 길은 늘 갈림길이다. 통하게 하기 위하여 만든 길이 도리어 갈라지게 하는 원인이 되니 그것을 뛰어넘게 하기 위하여 깨달음이 소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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