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새로운 학문이다 주자(朱子)의 대학은 학문의 목적 세 가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첫째 덕을 밝히는 것이요, 둘째 인간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셋째 지극한 선에 이르는 것이라 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하늘의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인간의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유도되고 이는 다시 사회의 삼강오륜으로 전개된다. 하늘의 참다운 진리에서 인간의 온전한 삶이 유도되고 이는 다시 사회의 진보로 전개되는 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구하는 도리가 수학과 논리학이면 인간의 삶을 완성시키는 도리가 철학과 미학이고 널리 사회를 새롭게 하는 것이 과학 일반이다. 구조론이 이들을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체계 아래 통일시킨다. 구조론은 비반복성을 탐구한다 구조론은 새로운 학문이다. 수학이 수(數)에 관한 학문이듯이 구조론은 구조(構造)에 관한 학문이다. 수학이 자연의 반복성을 탐구한다면 구조학은 자연의 비반복성을 탐구한다. 수(數)는 쪼개지므로 반복되고 연속된다. 그리하여 질서를 이룬다. 구조는 쪼개지지 않으므로 반복되지 않고 연속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서로 얽힌다. 얽히므로 구조다. 구조는 얽혀서 무질서를 이룬다. 존재는 질서와 무질서의 논리로 크게 규명될 수 있다. 질서의 수(數)에 대해서는 충분히 탐구되었으나 무질서의 구조(構造)에 대해서는 탐구되지 않았으므로 이에 새로운 학문을 열어 존재의 한 측면인 비반복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구조학은 수학, 논리학, 철학, 미학과 같은 순수 추상에 속한다. 이 다섯이 모여 형이상학을 완성시킨다. 구조론은 특히 하늘의 진리를 탐구하는 수학, 논리학을 인간의 삶을 규명하는 철학, 미학과 연결한다. 과학은 실험하고 검증할 수 있는 분명한 대상이 있지만 수학과 논리학은 그 대상이 없다. 있다면 인간의 생각 속에 있다. 사유실험이 가능할 뿐이다. 철학과 미학도 본질에서는 그러하다. 수학은 반복성을 탐구하고 구조론은 비반복성을 탐구한다. 논리학은 의미를 탐구하고 철학은 가치를 탐구하며 미학은 완전성을 탐구한다. 이들은 과학 이전의 학문으로 모두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 수학의 반복과 구조의 비반복이 만나는 접점에서 논리학의 의미가 유도된다. 그 의미의 밀도에서 철학의 가치가 연역되며 이들의 연쇄적인 고리를 완성함으로써 새로운 소통의 지평을 여는 데 미학의 완성이 있다. 이 다섯이 모든 학문의 자궁이다. 오늘날 철학과 미학이 공허한 이유는 이 다섯 중 철학, 미학을 이에 선행하는 수학, 논리학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빠졌기 때문이다. 구조론이 그 잃어버린 고리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20세기 들어 새로 나온 학문이 있다. 현대성을 규정하는 네가지 학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생물학,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 심리학,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서 경제학,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사회과학이 나왔다. 다윈과 프로이드, 아담스미스와 마르크스는 하나의 론(論)을 제기했을 뿐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 학문으로 발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구조론은 구조와 시스템, 제어에 관한 학문으로 발전된다. 학문이 종교나 개인의 경험과 구분되는 지점은 재현성이다. 스승이 이룩한 성과를 제자가 실험실에서 재현하지 못하면 실패다. 스승이 뿌린 씨앗을 제자가 거름주어 가꾸고 수확하지 못하면 학문이 아니라 종교다. 학문은 소스가 개방되어 있어서 후학들에 의해 얼마든지 업그레이드 된다. 학문의 유전인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론(論)’이다. 론은 ‘~이면 ~이다’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방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이면’은 일치(一致), ‘~이다’는 연동(連動)이다. 일치와 연동의 방정식이 학문의 유전인자다. 모든 학문에는 이러한 근원의 유전인자가 숨어 있어서 후학들에 의해 업그레이드 되고 진화한다. 마르크스에게는 두 가지 론이 있다. 하나는 양질전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어긋나는 오류로 밝혀졌다. 이 이론에 연동되어 있는 마르크스 경제학은 실패다. 다른 하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연동이론이다. 이 이론은 옳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에서 실패한 것을 사회과학의 성과로 상당부분 만회하고 있는 것이다. 론은 하나의 일치와 연동의 방정식이다. 일치는 톱니의 맞물림이며 연동은 그 톱니의 맞물림에 의해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다. 더 많은 톱니바퀴들이 가세하여 거대한 메커니즘의 체계를 이루면 곧 하나의 학문이 형성된다. 구조론은 존재의 첫번째 톱니바퀴다. 다른 많은 학문분야들이 구조론이라는 최초의 톱니바퀴에 연동되어 작동한다. 20세기 들어 새로 확립된 네 가지 학문에 이어 구조론이 새로 가세함으로써 현대성이라는 문명의 엔진은 완성된다. 구조는 대상을 통제한다 구조의 핵심은 어떤 대상을 통제 혹은 제어하는 것이다. 어떻게 제어하지? 일치와 연동으로 제어할 수 있다. 구글검색이 이 방법을 쓴다. 먼저 검색어와 일치하는 단어들을 추출하고 다음 연동되어 있는 하위 링크를 검색한다. 제어는 주어진 상황을 통제하여 임무를 달성하는 방법으로 일을 수행한다. 일치와 연동을 얻어서 가능하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적용하여 일치를 얻고 인과율의 법칙을 적용하여 연동을 얻는다. 일치는 기하학이 한 점에 선과 각과 입체와 밀도가 동시에 맞물리는 구조에서 기점 1을 유도하는 것이며, 연동은 그 기하가 얻어낸 기점 1 다음에 2.3.4.5..로 전개하여 대수학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기하의 일치는 1을 정의하고 대수의 연동은 2와 3으로 발전시킨다. 여기서 대수가 발전시킨 2와 3의 정의는 기하가 찾아낸 1의 정의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그러므로 기하가 대수에 앞선다. 일치가 연동에 앞선다. 일치는 존재의 비반복성, 비순환성, 불연속성, 비가역성, 비분할성에서 얻어진다. 이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 확인된다. 연동은 그 반대편의 반복성, 연속성, 순환성, 가역성, 분할성에서 얻어지며 질량보존의 법칙을 성립시킨다. 구조론은 하나의 론(論)이며 그 핵심은 일치와 연동이다. 곧 제어 개념이다. 이러한 일치와 연동의 론이 없다면 애초에 학문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철학이나 미학 등 다른 모든 학문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의학의 경험방과 같다. 동의보감 이전의 한의학은 단지 약재의 목록을 모아놓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의 경험을 수집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래서는 민간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학문으로 서지 않는다. 동의보감에 이르러 오행설이 반영되어 비로소 학문처럼 보여지게 되었다. 오행설이 한의학의 론(論)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론이 부실했기 때문에 사상의설을 고안하여 땜질하고 있다. 역시 이론적으로 부실하다. 론이 없으면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21세기 이 문명한 시대에 철학이나 미학은 한의학과 마찬가지로 론이 불투명하다.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이 그러하다. 니체나 샤르트르 개인의 경험을 주장함에 불과하다. 그 음악이 듣기에 좋더라거나 그 그림이 보기에 좋더라는 식으로 개인의 경험을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그 그림이 어색한 이유는 원근법에 어긋나기 때문이고 그 그림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원근법에 맞기 때문이다. 학문은 주어진 대상을 통제하는데 성공해야 한다. 일률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철학은 철학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학은 확실히 수학 자신을 통제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명백히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와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는 많이 나와 있지만 이들은 통제되지 않고 있다. 중구난방으로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이들의 목록을 수집하고 이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규명하여 질서를 찾아내어야 한다. 구조주의는 이미 나와 있는데 그 구조주의의 근거가 될 구조론이 없다. 연주자는 있고 또 실제로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악보가 없다면 이상하다. 치료는 되는데 수 많은 약재들 중 어떤 성분이 작용했는지 모른다면 이상하다. 악보가 있어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느 성분이 작용했는지 인과의 고리를 풀어야 신약이 발명된다. 비로소 학문으로 인정될 수 있다. 구조론이 구조주의 철학의 악보 역할을 한다. 구조란 무엇인가? 어원으로 보면 구(構)는 목재를 정(井)자 모양으로 켜켜이 쌓아올린 것이고, 조(造)는 감독이 노동자들에게 알려서(告) 일을 진행한다(辶)는 뜻이다. 즉 구조는 켜켜이 쌓아서 짓는 것이며 그 짓기를 진행하는 것이다. 구조(構造)는 재료를 하나씩 쌓으면서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과연 진행할 수 있느냐가 문제로 된다. 쌓을 수 있어야 진행할 수 있다. 모래성은 쌓을 수 없다. 쌓으려 해도 더 이상 진행이 안 된다. 원자론에서 원자의 의미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쪼갠다는 개념이 문제로 되는가? 만약 쪼개진다면 쌓을 수 없다. 쌓아올린 건축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쪼개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쪼개지지 않는다면 그래도 역시 쌓을 수 없다. 큰 바위나 큰 나무를 작은 벽돌이나 작은 목재로 쪼개야만 쌓을 수 있다. 쪼개져도 쌓을 수 없고 쪼개지지 않아도 쌓을 수 없다. 구조란 쪼개지면서 동시에 쪼개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쌓을 수 있다. 그렇다. 이 세상은, 이 우주는, 존재는 쪼개지면서도 동시에 쪼개지지 않는 것으로 건축되어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구조다. 수(數)는 자연의 쪼개짐을 탐구하고 구조(構造)는 쪼개지지 않음을 탐구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쪼개지지 않는 것은 존재의 비반복성, 비순환성, 불연속성, 비가역성, 비분할성이다. 쪼개지지 않으므로 얽혀서 구조를 이룬다. 존재의 뼈대가 된다. 만약 쪼개진다면 얽히지 않고 따라서 버틸 수 없다. 쌓을 수 없다. 그 쪼개지는 성질은 반복성, 연속성, 순환성, 가역성, 분할성이다. ● 질서(수).. 연속성, 반복성, 분할성, 순환성, 가역성 쪼개지는 성질이 질서라면 쪼개지지 않는 성질이 무질서다. 각각 질량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성립시킨다. 쪼개지므로 우주는 자신을 건축할 재료를 조달할 수 있고 쪼개지지 않으므로 우주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