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구조
자연의 진화와 인간의 진보는 본질에서 같다. 다윈의 진화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으로 발전했고 사회진화론은 마르크스주의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사회진화론은 극우주의로 나아갔고 나치의 인종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가 틀렸거나 아니면 둘 다 틀렸다.
사회진화론이 과학적 진실이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만큼 진화론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진화와 진보가 본질에서 같다는 착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조론이 이 문제를 해소한다. 사회의 진보와 자연의 진화는 같다. 별의 탄생과 생물의 탄생은 같다. 소립자의 구성원리와 인간 사회의 작동원리는 같다.
● 생물은 진화되었다.
● 물질은 구성되었다.
● 사회는 진보되었다.
사람이 길을 가더라도 왼발과 오른발이 교차하면서 밸런스의 문제에 직면한다. 모든 진보하는 것, 발전하는 것, 성장하는 것은 동일한 문제에 봉착된다.
진보해야 살아남지만 그 과정은 위험하다. 진보하지 않으면 밀려나고 진보를 시도하면 위험해진다. 그러므로 제어가 필요하고 밸런스가 필요하다.
시장의 발전, 조직의 발달, 국가의 건설, 태풍의 진로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모든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은 동일한 제어-밸런스 원리에 직면한다.
새로운 토대 위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화론과 원자론, 시장이론, 사회의 진보이론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구조론으로 가능하다.
진화론은 생장구조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힘과 투쟁의 논리는 구조론이 말하는 가치와 미와 소통의 논리로 보완되어야 한다.
진보주의는 지나치게 힘과 질서와 능률과 과학에 의존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능률적이고 과학적이며 질서있고 힘이 있다는 거다.
강한 과학적 사회주의가 그 과학의 강한 힘으로 모순에 가득찬 허약한 자본주의를 이긴다고 말하면 진화론이 말하는 약육강식의 논리 그대로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틀렸다. 약육강식은 약자를 동정하는 인간의 정서일 뿐 자연의 생태계는 강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되고 끌려가지 않는다.
젊은 숫사자 역시 늙은 숫사자에게 물려죽는다. 허기진 사자가 배부른 사슴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는 인간 위주의 정치적 관점이 개입해 있다.
자연에는 강자와 약자의 존재 이전에 생태계 환경이 있다. 생태계 환경은 정교한 제어장치에 의해 밸런스를 유지하며 강자와 약자를 동시에 통제한다.
과학과 힘과 질서를 앞세우는 좌파의 논리는 녹색당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진보주의 경향과 다르다. 지난 시대의 가치일 뿐 21세기의 강조점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와 다윈은 동시대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명백히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는 태생적으로 극우로 변질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진보 지식인들이 도덕적 양심에 따라 그 점을 감추려 애쓴데 비해 스펜서는 뻔뻔스럽게도 그 점을 노골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과 힘과 질서와 권력과 능률에 주목했을 뿐 그 반대편에서 그 힘과 그 과학을 제어하고 통제하며 보완하는 개념이 없다.
과학의 능률에 감탄했을 뿐 인간의 가치에 소홀했다. 소외를 말하여 자신의 단점을 보완했으나 그 소외를 극복하게 하는 소통을 말하지 않아서 실패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물적토대와 상부구조로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변혁이론은 물리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다윈의 생존경쟁이론과 비슷하다.
사회는 힘과 투쟁에 의해서도 변화하지만 가치와 소통에 의해서 더 크게 변화한다. 힘과 가치 사이에 밸런스를 얻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와 공동체적 소통 노력이 마르크스주의가 강조하는 과학의 힘과 기계적 질서의 폭주가능성을 경계하고 제어해야 한다.
다윈의 생존경쟁이론은 또 극우적인 시장만능주의와 통한다. 생태계에서의 생존경쟁이 시장에서의 경쟁 그리고 국가간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생태계의 경쟁이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일은 절대로 없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어 사슴이 바닥났을 때 사자도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장에서의 경쟁 역시 무한경쟁으로 폭주되어서 안 된다. 국가간의 전쟁 역시 공동체의 소통노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가 질서에 주목할 뿐 가치에 소홀함은 우파들이 능률에 주목할 뿐 공동체적 소통에 소홀함과 같다. 그런데 오늘날 진보주의는 반대로 가고 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환경운동과 생태적 삶의 강조, 전원에서의 느리고 조화로운 삶의 추구는 마르크스의 도시-노동자-투쟁-혁명과 다르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질적인 진보는 점차 마르크스에서 멀어지고 있다. 지금 녹색당은 딜렘마에 빠져 있다. 물리력을 앞세운 환경운동은 정당한가?
간디와 소로는 마르크스의 적인가 동지인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은 진보인가 수구인가? 소로의 웰빙주의와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노선은 옳지 않은가?
분명히 말하면 힘과 투쟁이 사회를 바꾸는 만큼 가치와 소통도 사회를 바꾼다. 간디와 소로와 킹 목사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조론은 질서와 경쟁과 능률과 시장의 논리를 전면부정하지 않는다. 진화론, 원자론, 시장이론, 진보주의의 성취를 전면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되 기존의 이론에서 빠진 부분을 보강한다. 경쟁+밸런스다. 변혁+제어다. 능률+소통이다. 부족한 나머지 절반을 채워간다.
밸런스를 잃은 경쟁은 실패한다. 제어에 실패한 변혁, 소통이 없는 능률은 실패한다. 좌파든 우파든 지금은 존재의 절반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쟁하면서 밸런스를 잃지 말아야 하고 변혁을 추구하면서 제어에 성공해야 하고 능률을 지향하면서 공동체적 소통에도 성공해야 한다.
조직의 생산성이 1 증가할 때 조직 내에서 정보의 소통도 1 증가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정보의 쌍방향적 소통을 희생시킨다.
그러다 망하는게 자본주의다. 경쟁이 1 증가할 때 그 경쟁의 장을 제공하는 시장도 1 성숙해야 한다. 시장환경의 성숙없는 무한경쟁은 재앙을 낳는다.
사회의 진보, 생물의 진화, 물질의 구조, 시장의 발달, 국가의 발전을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서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구조를 이해하고 그 구조가 낳는 밸런스를 이해하고 그 밸런스가 낳는 제어를 이해하고 공동체적 소통과 그 소통의 수단인 미학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
구조의 탄생
태초에 두 우주가 충돌하여 빅뱅을 일으키며 밀도가 탄생했다. 밀도가 증가하자 공간의 약한 부분이 찌그러져서 별이 탄생했다.
별은 공간의 상처다. 우유를 막대로 휘저으면 버터가 생긴다. 별의 탄생도 이와 같다. 빅뱅에 의해 공간은 크게 휘저어졌다.
풍선을 물속 깊이 가져가면 쪼그라든다. 탁구공만큼 작아질 수도 있다. 풍선 속의 입자들은 수심이 깊어질수록 더 적은 자유도를 누리게 된다.
자유도를 잃은 만큼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공간이용의 효율성은 둘이 하나를 공유함으로써 가능하다. 2가 1을 공유할 때 효율이 얻어진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두 어린이가 하나의 책상을 공유하는 것과 같다. 빅뱅에 의해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제된 것이 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때 하나의 책상이 두 사람의 행동반경을 통제한다. 통제자와 통제대상이 구분된다. 책상이 벼리면 두 어린이는 갈피다. 벼리가 갈피를 통제한다.
흥부아들 두 사람이 하나의 옷을 공유함과 같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화장실을 가면 다른 사람도 함께 화장실을 가야한다. 2인 삼각 달리기와 같다.
닫힌계에 밀도가 부여되면 내부의 구성인자들은 구조적으로 최적화된다. 그 최적화의 방법은 2가 1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때 1이 2를 통제한다.
여기서 밸런스가 성립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1이 2를 통제하면서 방향성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통제는 구조가 크게 성장해도 그대로 이어진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물 종은 암컷과 수컷의 수정과정에서 두 세포핵이 하나의 세포벽을 공유하는 통제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의 모든 경쟁자들은 시장원리라는 통제자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시장 그 자체를 확대하지 않는 한 시장 안에서의 성장은 한계가 있다.
일본경제가 최근 주춤한 이유는 시장을 확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이라는 파이가 커지지 않는 한 내부경쟁은 제로섬게임이 될 뿐이다.
구조는 1에 의한 2의 통제다. 지구상의 모든 건축은 중력이라는 통제자에 지배된다. 그러한 통제과정에서 질서가 성립한다. 세상은 질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통제구조가 질적으로 고도화 된 것이 ‘질’이다. 존재의 구조는 질≫입자≫힘≫운동≫량의 5가지 갈피에 의해 단계적으로 고도화 된다.
여기서 질에 갈수록 집적되며 량에 갈수록 계는 해체된다.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통제자와 통제대상의 상호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 벼리 1 - 통제자
● 갈피 2 - 통제대상
하나의 운동이 두 양을 통제한다. 하나의 힘이 두 운동을 통제한다. 하나의 입자가 두 힘을 통제한다. 하나의 질이 두 입자를 통제한다.
질이 벼리면 입자가 갈피다. 입자가 벼리면 힘이 갈피다. 힘이 벼리면 운동이 갈피다. 운동이 벼리면 양이 갈피다. 벼리는 항상 1이고 갈피는 항상 2다.
● 벼리(통제자) ≪≫ 갈피(통제대상)
● 질≫입자≫힘≫운동≫량
콜더의 모빌과 같다. 수직 벼리면 수평이 갈피다. 수직구조 하나에 수평막대 둘로 정렬한다. 천칭저울과도 같다. 축 하나에 접시 둘이 밸런스를 이룬다.
⊥로 나타낼 수 있다. 수직 1이 좌우로 나누어진 수평 2를 통제하고 있다. 하나의 벼리와 두 갈피가 하나의 모듈을 이룬다. 존재는 모듈의 집적이다.
기존의 이론에서 존재의 구조를 설명할 때 쉽게 동원되는 것이 원자와 힘이다. 그러나 원자는 근거가 없는 가설에 불과함이 증명되고 있다.
반면 힘은 확실히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대신 모호하다. 원자는 뚜렷하나 근거가 불명하고 힘은 확실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질은 입자도 아니고 힘도 아니다. 물질은 벼리와 갈피로 되어 있다. 벼리는 입자의 성질을 드러내고 갈피는 파동의 성질을 나타낸다.
존재는 모듈이며 하나의 모듈 안에 둘이 공존한다. 하나의 질 안에 두 입자가 있고 하나의 입자 안에 두 힘이 있고 하나의 힘 안에 두 운동이 있다.
물리학에서 입자를 위주로 한 입론은 양자이론, 초끈이론에 의하여 거의 붕괴되어 가고 있다. 입자관념은 인간의 눈이 만들어낸 착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힘을 위주로 한 입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를 인력과 척력, 원심력과 구심력, 강력과 약력 등으로 나누어 설명함은 타당하지 않다.
그 힘들은 하나의 벼리에 붙잡힌 두 갈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그래서 뉴튼은 만유인력이라고 했다.
끌어당기는 힘으로서의 인력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구조론으로 볼 때 논리적 모순이다. 끌어당긴다는 말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다.
풍선이 물에 뜨는 이유는 수압이 풍선을 밀어내기 때문이지 수면이 풍선을 잡아당겨서가 아니다. 잡아당긴다는 표현은 잡다+당기다로 너무 복잡하다.
인력은 끌어당기는 것이다. 먼저 상대를 붙잡아서 고정시켜 놓고 다음 거기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여 그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 과정의 복잡함이 문제로 된다. 인력은 정지시키기+방향성을 부여하기+진행시키기의 세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붙잡는 것은 벼리다. 벼리 하나에 갈피 둘이 있으므로 어떤 것을 붙잡기 위해서는 미는 힘과 당기는 힘 사이의 교착이 성립해야 한다.
인력이 성립하려면 먼저 붙잡아야 하고 붙잡으려면 미는힘과 당기는 힘을 교착시켜야 하는데 이를 당기는 힘 하나로 설명하면 벌써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만유인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힘은 당기는 힘이 아니다. 닫힌계 안에 밀도가 증가하여 구성소들이 공간이용의 효율성을 찾는 것이 만유인력이다.
지구가 달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달이 지구 주위의 나선형 회전궤도를 선택할 때 가장 최적화된 공간이용의 효율성이 달성되는 것이다.
만원버스 안에서 승객은 되도록 벽쪽으로 붙으려 한다. 가운데 있으면 양쪽에서 압박을 받지만 벽에 기대서면 한쪽으로만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이때 승객은 갈피가 되고 버스의 벽이나 손잡이는 벼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달은 지구주위의 회전궤도를 따라갈 때 가장 압박을 덜 받는다.
벨로드롬을 도는 사이클이 비탈을 올라탈 때 훨씬 더 먼 거리를 돌지만 역학적으로는 최적화된 코스다. 오히려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누가 사이클 선수를 잡아당겨서 벨로드롬을 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에너지 이용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길이기 때문에 비스듬한 경사를 타는 것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시켜서 설명해야 한다. 인력은 붙잡기, 방향지시, 당기기의 3단계 구조로 되어있어서 너무 복잡하다. 더 쉬운 논리로 설명해야 한다.
태양과 지구가 서로 잡아당기는 이유는 인력 때문이 아니라 공간에 밀도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입자들이 한곳에 모이지 않으면 안되는 속사정이 있었다.
팽이가 회전할 때 축을 중심으로 구심력이 성립하는 이유는 몸체의 회전반경이 짧을수록 에너지 이용의 효율성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팽이가 비틀비틀 쓰러지지 않고 발딱 일어서서 중심을 잡는 것이 더 효율적인 운동인 것이다. 그리고 중력의 압박이 그 효율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하나가 둘을 공유하는 벼리와 갈피의 원리에 의해 지름길을 가는 특성을 발휘한 결과 구심력이 성립하고 있다. 원심력은 구심력의 반작용에 불과하다.
공간이용의 효율성이 돌아가는 팽이의 벼리가 된다면 원심력과 구심력은 갈피다. 두 갈피는 서로 교착되어 팽이의 비틀거림을 차단한다.
● 원심력과 구심력의 교착에 의해 팽이의 비틀거림 중지
● 중력에 의해 축을 중심으로 지구중심을 향하여 방향성 획득
● 팽이의 촉부분이 팽이전체를 대표하여 지구와 결합
“사과가 왜 떨어지지?”
“그야 사과가 무겁기 때문이지.”
“아 그렇군. 잘 알겠어.”
그러나 과연 이해한 것일까? 뉴튼이 만유인력이라는 한 마디로 해결함은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는 질문에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고 대답함과 같다.
사과는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만유인력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거움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해야 한다.
물 속의 풍선은 쪼그라든다. 수압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풍선이 쪼그라든다는 것은 풍선 안에 있는 공기 입자들 사이의 간격이 좁혀진다는 것이다.
수압에 의해 자유도가 줄어든 입자들은 자신이 차지한 공간을 조금씩 손실한다. 이때 손실당하지 않는 방법은? 그것은 풍선의 표면에 달라붙는 것이다.
만원버스의 가장자리에 서는 것이 안전한 것과 같다. 가운데 있으면 양쪽으로 밀리지만 가장자리에 있으면 한쪽으로만 밀린다. 그만큼 이득이다.
풍선의 혹은 만원버스의 가장자리부터 차곡차곡 정렬한다. 정렬하면서 2가 1을 공유할 때 얻어지는 차익에 의해 공간사용의 효율성을 달성한다.
먼저 버스의 벽이 벼리가 되고 벽에 기대서는 사람이 갈피가 된다. 다음 먼저 정렬한 가장자리 사람이 벼리가 되고 그 안쪽 사람이 갈피가 된다.
이러한 질서화 과정은 맞은편에서 진행되는 질서와 버스 가운데서 마주칠 때 까지 반복된다. 2가 1을 공유하는 이득들이 수렴되어 질서가 성립한다.
처음 입자들은 풍선 안에서 차지한 넉넉한 공간의 자유도에 의해 자유로왔지만 다음에는 질서화된 상태에서 외부의 압박에 대응하여 자유로와진다.
처음 버스의 승객들은 넉넉한 공간에 의해 자유로왔지만 다음 만원버스의 승객들은 그러한 차곡차곡 정렬됨에 의해 버스 자체의 흔들림에서 자유로와진다.
개인이 가진 자유를 반납하고 그 반납된 자유들이 수렴되어 그 집단 전체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성이 있다. 그것이 구조다.
● 개별입자의 자유도 - 버스의 승객은 차내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 집단전체의 자유도 - 만원버스의 승객들은 버스가 흔들려도 안전하다.
질서는 반드시 방향성을 가진다. 벼리가 갈피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는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사회의 진보 역시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생태계는 제멋대로 진화한 것이 아니며 역사는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 때는 개인이 자유로왔지만 지금은 인류전체가 자유로워야 한다.
역사는 개인의 자유에서 가족의 자유, 시민의 자유, 국가의 자유, 인류전체의 자유로 나아가며 스스로를 재질서화 하고 그 질서의 질을 고도화 한다.
시골사람은 자유롭지만 그 가꾸어진 정원 안에서 자유로울 뿐이다. 도시에서는 자유가 없지만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다. 여기에 방향성이 있다.
국가의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함도 아니고 개인의 자유를 위해 국가의 자유를 희생함도 아니다. 피드백에 의해 양자간에 밸런스를 이룬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길을 내었다면 그 옆에 집을 짓는 사람은 이미 닦여있는 길을 이용하므로 이득을 본다. 여기서 질서의 방향성이 성립한다.
나중 집을 짓는 사람은 그 먼저 닦은 길의 이용이라는 벼리에 잡혀버리는 것이다. 그 이득을 쫓다가 자기도 모르게 제어당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지으면서 담장을 둘러쳤다면 그 옆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한쪽에는 담장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이익을 본다. 이익 때문에 길들여진다.
이득을 포기하고 넓은 공터에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이득을 취하여 이미 지어진 집 옆에 집을 지을 것인가 사이에 밸런스를 추구함이 역사의 진보다.
풍선에 밀도가 걸려 풍선이 쪼그라들면 모두가 이득을 보려고 하므로 질서가 생긴다. 이렇게 이득의 연속성이 쭉 이어지는 것이 동식물의 생장이다.
한 인간의 몸은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된다고 한다. 이득을 꾀하다가 100조 명의 시민이 모여 거대한 세계를 구축한 것이 인간이다.
생물의 진화 역시 이러한 밸런스의 원리에 의해 일어났다. 그것이 유전정보의 집이다. 밸런스는 유전정보를 통제하는 3D게임의 저작툴이다.
3D가 2D보다 제작하기 쉽다. 이득을 제공하는 세포벽(풍선의 벽, 버스의 벽, 건물의 담장)이 통제자로 벼리가 되어 공간이용의 효율성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벼리와 갈피 사이에 방향성이 있다. 벼리 1과 갈피 2의 모듈에 공간이용의 효율성이 있다. 먼저온 자가 나중온 자를 통제하며 연쇄적으로 성장한다.
그것이 구조다. 통제자와 통제대상의 지배종속 관계가 성립하면서 질서가 성립한다. 반면 갈피 2의 서로간에 성립하는 대칭성에서 가치가 성립한다.
존재는 질서와 가치로 설명할 수 있다. 벼리 1이 갈피 2를 통제함은 수직적 질서다. 갈피 1이 짝이 되는 갈피 1을 찾아서 모듈을 구성함은 수평적 가치다.
인간이 결혼하여 가족을 구성함은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 효율성의 추구가 질서다. 그런데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짝을 만나야 한다.
그 짝을 만나는 과정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는 만나야 한다. 만나기 위하여 애타게 서로를 부르는 그 비효율적인 과정이 가치다.
사랑은 비효율적이다. 분배는 비효율적이다. 정의는 비효율적이다. 선은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비효율을 통과하지 않고는 효율을 달성할 수 없다.
질서는 짝을 찾은 사람이 서로를 통제하며 효율을 달성하는 것이다. 가치는 짝이 없는 사람이 짝을 찾는 비효율적인 과정이다. 그 사이에 밸런스가 있다.
구조는 씨앗이다
구조는 씨앗이다. 구조가 원자와 다른 것은 생장의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원자는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구조는 다른 구조와 만나 더 큰 구조를 이룬다.
여기에 방향성이 있고 질서가 있고 변화가 있고 정보의 소통이 있으며 제어가 있고 밸런스가 있고 미가 있고 힘이 있고 운동이 있다.
모든 조직, 집단, 정치, 바둑, 생명체, 건물, 역사, 문명, 기업, 시장에는 구조의 원리가 적용된다. 처음 작았다가 점점 커지는 모든 것이 구조론를 따른다.
국가는 커진다. 사회도 커진다. 역사는 진보한다. 동식물은 생장한다. 기업은 커진다. 인간은 성숙해 간다. 예술은 발전한다. 질적으로 고도화 된다.
덩치가 커질 때 마다 질이 고도화 되어야 한다. 질이 고도화되지 않으면서 덩치만 커지면 계는 해체된다. 바이러스는 덩치가 커지면 둘로 쪼개진다.
가치있는 모든 것은 구조를 따른다. 힘이 있는 모든 것은 구조를 따른다. 성장하고 성숙하고 진보하고 발전하는 모든 것은 구조를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