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무엇인가 묻길래 ‘언어의 격’이라고 답한다. 언어의 격은 소통의 격이다. 어느 수준까지 소통이 가능한가이다. 육체적인 소통이라면 동물도 가능하다. 표피적인 소통이 아닌, 밀도 있는 소통을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예절로 격을 삼고 언어로 격을 삼았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격을 삼고 멋으로 격을 삼아야 한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소통의 격이 필요하며 깨달음은 소통의 격이다. 깨달음이 필요한 이유도 역시 밀도 있는 소통을 위해서이다. 첫 번째 깨달음 은 자기 존재의 깨달음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자각하는 것이다. 물론 동물도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 쯤은 할 수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편과 네편을 구분할 수 있다면 제법 발전한 거다. 두 번째 깨달음 은 언어의 깨달음이다. 동물들은 거의 언어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과의 의사소통은 낮은 수준에서나 가능하다. 세 번째 깨달음 은 문자의 깨우침이다. 문자로 하여 인간은 한층 더 심화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명백하다. 네 번째 깨달음 은 마음의 깨우침이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소통의 수단으로 삼아온 세가지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첫째는 나를 버리는 일이며, 둘째는 언어를 버리는 일이며, 셋째는 문자를 버리는 일이다. 아니 그 반대이다. 첫째는 나를 완성하는 일이며 둘째는 언어를 완성하는 일이며 세째는 문자를 완성하는 일이다. 마음(mind)의 어원은 ‘머금다’, 혹은 ‘머무르다’이다. 내 속에 머금어 머무르게 하는 것은 의미(mean)다.(mean과 mind의 어원은 같다.) 마음의 깨달음은 내 속에 ‘머금은 것’을 깨닫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이 방법은 낮은 단계의 소통수단으로 쓰이는 ‘나’와 ‘언어’와 ‘문자’를 소용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의미는 가치의 배달로서 존재하며 그 모든 가치는 최초의 완전성을부터 유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의미는 근본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공유가 가능하며 공유되기 때문에 ‘나’, ‘언어’, ‘문자’라는 세가지 해석수단을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 깨달음 은 신과의 대화이다. 신이 그 완전성의 주인이다. 신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비참 뿐이다. 그 소통이 쌍방향적인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이어도 역시 비참을 면할 수 없다. 인간에게서 구원은 신과의 쌍방향적인 의사소통 그 자체이다. 나의 기도에 신의 응답이 없다면 소통은 실패, 구원은 실패이다. 깨달음은 다섯이 존재하며 보통은 세 번째 까지 와 있다. 즉 우리는 이미 깨달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소통은 다섯가지 방법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이미 이들 중에 몇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나은 단계의 밀도있는 소통을 원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소통을 필요로 하는가? 소통의 수준에 따라 대접받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적어도 강아지 보다는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수준’차이가 없다면 당신은 도무지 무엇을 근거로 개와 자신을 구분할 것인가? 개와 인간의 구분은 생김새로 아니고 ‘소통’의 수준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소통되는 만큼 대접하고 대접받는 것이다. 예전에는 계급으로 지표를 삼아 인간을 대접을 달리 했으나 지금은 인격으로 지표를 삼아 대접을 달리한다. 그 인격을 어떤 방법으로 증명할 것인가이다. 당신이 원하는 음식을 먹고자 한다면 요리사와 최소한의 의사소통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통되는 정도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대접하는가이다. 자기 자신을 대접하지 않는 자는 누구로부터도 대접받지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