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Xh-DNEURXW0
세상은 사건이다.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공간의 사물이 아니라 시간의 사건이다. 이 대목에서 전율을 느껴야 한다. 불덩이 같은 것이 확 올라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거대한 전복의 사작이다. 여기서 가려진다.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혀 빼물고 죽어야 한다. 더 읽을 필요도 없다. 바로 퇴장해야 한다. 인간과 비인간을 가리는 것은 언어다. 언어가 없으면 소통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면 짐승이다. 인간 중에도 문명인과 야만인을 가리는 기준이 있다. 대부분의 부족민은 숫자가 2까지밖에 없다. 하나 둘 다음은 많다이다. 3의 발견은 혁명이다. 우리말 다섯은 둘셋이다. 우리말이든 영어든 한자든 수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각국의 수사에는 초기 3진법과 4진법이 섞여 12진법까지 갔다가 최종 10진법으로 정리된 흔적이 남아있다. 부족민은 3만 되면 당황한다. 좌절한다. 포기한다. 시도하지 않는다. 왜? 3을 넘으면 바로 12까지 간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가 없다. 천으로 가고 만으로 가고 억으로도 간다. 그 세계는 두렵기 짝이 없는 신세계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2를 한계로 삼고 선을 넘어가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평화로웠던 거다. 어떤 겁대가리 상실한 자가 용감하게 3을 터뜨려 버렸다. 문명은 단번에 폭주하여 이 꼴이 되었다. 당신이라면 3을 발견하고도 비밀에 붙여 부족민의 안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문명의 진보라는 광란의 폭주를 계속할 것인가? 아서라 말어라. 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대담한 결심이 필요하다.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기준은 기하학이다. 기하는 형태를 변형시킨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다. 모양이 달라도 비율이 같으면 같다. 다른데 왜 같지? 같은 걸로 친다고. 다른데 왜 같은 걸로 치는 거지? 그렇게 약속한다고. 왜 그런 요상한 약속따위를 하지? 인류는 다시 한 번 도전을 만난 것이며 거기서 서양은 결심했고 그리하여 선을 넘었고 결국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 동양인은 좌고우면 하다가 망설임 끝에 선을 넘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화로웠고 그 평화 덕분에 쓰디쓴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인류는 또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다. 구조론은 사건이 같으면 같다. 형태가 달라도 비율이 같으면 같다는게 기하다. 위상기하는 한 술 더 뜬다. 형태가 다르고 비율도 다르지만 시작과 끝이 같으면 같다. 서로 위상이 다르다는 것은 시작과 끝의 개입회수가 다른 거다. 1회로 시도되어 1회로 끝나면 무조건 같다. 이는 위상기하다. 구조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건이 같으면 같은 거다. 대칭이 같으면 같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예술의 분야가 달라도 구조가 같으면 같다. 에너지 1회의 입출력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같다. 같은 것을 같다고 말하는게 구조론이다. 색깔이 다르면 다르다는 것은 대수학이다. 색깔이 달라도 비율이 같으면 같다는건 기하학이다. 마찬가지로 사건이 같으면 같다는 것이 구조론이다. 문명은 다시 한 번 점프한다. 처음 언어를 얻어 짐승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고 수학을 얻어 야만에서 벗어나 문명인 되고 기하를 얻어 봉건에서 벗어나 근대인이 된다. 구조를 얻어 완전성의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봉건인은 부족이나 가문 단위로 존재할 뿐 개인이 의사결정의 독립적 단위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 각별하다. 왜? 기하를 몰라서 그런 것이다. 형태가 변하면 당황하고 주저하며 물러난다. 그런 식이다. 당황하지 않고 전진해야 한다. 대담하게 선을 넘어야 한다. 금단의 열매를 쟁취해야 한다. 그대는 짐승이 아닌 인간인가? 야만인이 아닌 문명인인가? 봉건인이 아닌 근대인인가? 그렇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전진할 생각은 없는가? 세상은 눈에 보이는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에너지 흐름에 의한 사건의 연결이다. 사건은 원인측에 서고 사물은 결과측에 선다. 사물로 보는 사람은 어떤 일의 결과에 대응할 뿐 원인에 대응하지 못한다. 선수를 치지 못하고 선제대응하지 못한다. 원인은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원인은 대칭이고 대칭은 형태가 없다.
대수의 세계 – 다름에 주목한다. 사물. 속성. 형태. 크기. 결과 대수학과 기하학은 방향이 다르다. 대수는 다름에 주목한다. 형태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냄새가 다르고 소리가 다르다. 하나씩 다름이 포착될 때마다 숫자가 하나씩 카운트 되는 것이다. 흑인과 백인은 달라.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와 달라. 서울내기와 촌놈은 달라. 남한과 북한은 달라. 유태인과 독일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구. 그러나 기하학은 같음에 주목한다. 형태가 달라도 같다는게 기하학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동양은 다름에 주목했고 서양은 같음에 주목했다. 다르면 생존할 수 있다. 산과 바다와 바위와 나무와 계곡과 숲은 달라. 곰이 쫓아오면 나무에 오르고 적군이 쳐들어오면 숲에 숨어야 해. 다름은 확실히 생존에 도움이 된다. 같으면? 경상도와 전라도가 같다면? 남자와 여자가 같다면? 흑인과 백인이 같다면? 같으면 다스릴 수 있다. 가부장은 같음에 주목한다. 형과 동생이 키는 달라도 같은 김씨야. 우리는 같은 한가족이라구. 다르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통제되지 않는다. 같으면 통제할 수 있다. 같으면 무리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동양은 다름에 주목하므로 차별하다가 망했고 서양은 같음에 주목하므로 다스릴 수 있어 흥했다. 위상기하는 거기서 한 술을 더 뜬다. 개입횟수가 같으면 같다는 거다. 구조론은 다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건이 같다면 같은 것이다. 남녀의 다름을 발견하면 거절할 수 있다. 여기는 여자화장실이야. 넌 달라. 들어오지마. 같으면 찬성할 수 있다. 너희도 11명이고 우리도 11명이니 숫자가 같다. 그러므로 축구시합을 하자. 같으면 동업할 수 있다. 같으면 동참할 수 있다. 같으면 게임을 할 수 있다. 함께 할 수 있다. 일을 벌일 수 있다. 달리기를 해도 출발점에 나란히 서야 한다. 금수저는 특별히 10미터 앞에서 따로 출발한다고? 시합은 불가능이다. 사물의 세계가 있다. 사건의 세계가 있다. 다른 세계다. 인류역사 30만 년간은 사물의 세계이고 다름의 세계였다. 사물은 다르다. 세모꼴 네모꼴 형태가 다르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소리가 다르다. 다를 때 숫자가 카운트 된다. 구조론은 같음의 세계다. 에너지로 보면 같다. 원인측으로 보면 같다. 출발점에는 모두 벌거숭이로 같다. 사물은 형태가 있고 속성이 있고 크기가 있고 결과가 있다. 사물은 속성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형태가 다르고 결과가 다르다. 사물로 보면 다름에 주목하게 된다. 숨게 되고 도망치게 되고 방어하게 된다. 다르면 숨기 좋고 도망치기 좋고 방어하기 좋고 거절하기 좋기 때문이다. 반대로 같으면 숨을 수 없고 거절할 수도 없다. 사건은 에너지가 있고 원인이 있고 방향성이 있고 완전성이 있다. 사건은 에너지가 같고 원인이 같고 방향성이 같고 완전성이 같다. 사건을 표현하는 말은 모두 같음을 나타내는 개념들이다. 남자와 여자가 외모가 달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 사건은 시작된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 비로소 창업할 수 있다. 구조론은 간단히 같다는 거다. 같아야 통제할 수 있다. 양이 백 마리라도 다 같은 양이다. 같으므로 한 명의 목자가 무리를 통제할 수 있다. 거기에 염소가 끼어들면 다르다. 다르면 뿔뿔이 흩어져서 통제가 되지 않는다. 무수한 다름 속에서 한 가지 같음을 찾아낼 때 우리는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전진할 수 있다. 패배자는 다름을 찾아 생존을 꾀하고 승리자는 같음을 찾아 다스려낸다. 인간은 다 달랐지만 언어로 대표성을 얻어 같아졌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같고 여자든 남자든 같다.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수학을 얻어 다시 한 번 같아졌고 기하학으로 나아가서 더욱 같아졌고 지금 구조론으로 인류는 다시 한 번 같아지려고 하고 있다. 칼을 쓸 때는 무사들의 실력이 제각각이었다. 총이 등장하자 같아졌다. 말을 탈 때는 솜씨가 제각각이었다. 자동차가 등장하자 같아졌다. 무사가 숙련되는 데는 3년이 걸린다. 기병이 양성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총은 다루는 법을 하룻만에 배우고 자동차는 한 달만에 면허를 딴다. 진보는 차별을 없애온 역사인 것이다. 구조론은 같다. 사건으로 보면 같고 에너지로 보면 같고 구조로 보면 같다. 같음을 꿰뚫어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직원의 업무능력이 제각각이지만 매뉴얼을 만들면 같아져 버린다. 그런 회사가 성공한다. 다름은 개인이고 같음은 집단이다. 에너지는 집단에서 나온다. 다름은 에너지가 없고 같으면 에너지가 있다.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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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선추천 후감상
재생 버튼을 누루면 유튜브가 아닌 타싸이트에서 재생이 안되게 설정되있다고 하는데, 원래 이렇게 설정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공부해 보겠습니다.
http://mr2tk.tistory.com/3
해결책 펌 해왔습니다. 고급설정에서 퍼가기허용 하면 되는군요.
감솨^^
정말 보기 좋네요. 화면도 깔끔하고 마이크도 좋은 것 같고... 계속 봐야겠습니다.
짝짝짝 ^^
오늘 아침 출근길에 들었습니다. 짝짝짝 !!!
동렬님 흰머리가 좀 느신 게 보여요~~
좋은 소식이오. 축~
구조론과 첫 인연이 유튜브였는데 다시 동영상으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알아야 할게 많으니 지금의 모름 또한 기쁠줄이야 ㅎㅎ
오늘도 함께 언덕을 넘어 머지않아 바라볼 새로운 지평으로 가슴이 쿵쿵 빠르게 뜁니다 ^^
축 유튜브! 환영 입니다.
100만 구독 가시죠!
동렬님
축하드립니다^-^
슬그머니~, 축하! 축하! 축하! (동렬 님 이모티콘)
우리가 수학적으로 2진법이라고 했을 때는 0과1을 사용하는 수의 체계를 말하잖아요? 그러면 1과 2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2진법이 아니라 3진법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원시 내지는 부족민 시대에 0이라는 숫자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라고 생각하면 2진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보면 3진법 같기도 하구요!
컴퓨터의 0과 1은
그냥 전기가 흐르면 1 끊기면 0이라서
0과 1이지 숫자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진법과 무관합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가 쓰는 십진법은
십일진법이라고 해야 하는데 아무도 십일진법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는 자연수만 논하는게 맞지요.
0은 자연수가 아닙니다.
구조론 유튜브 방송의 출발을 축하드립니다. 신대륙으로의 항해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