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사진을 SNS에 올린 동생과 동생을 살해한 오빠. 왜 동생은 자기 사진을 SNS에 올렸을까? 파키스탄이라는 고립된 사회를 타격하기 위한 것이다. 명백히 의도있는 행동이다. 단 자신조차도 자신의 진짜 의도를 모를 수 있다. 그는 무의식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 싸우더라도 알고 싸워야 이긴다. 가장 작은 에너지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지점이 포착되면 그것을 건드리도록 인간의 뇌는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건드린 것이다. 무슬림 사회의 약한 고리를. 집단의 약점을 폭로하여 집단을 안전하게 만들라는 무의식의 지령을 따랐으니 타인이 지옥인 이유다. 왜 오빠는 동생을 죽였을까? 역시 집단의 명령을 따른 것이다. 이건 무의식이 아니라 노골적인 압박이다. 아랍사회는 명예를 잃으면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즉 집단적인 린치를 당한다는 의미다. 명예라는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 불가촉 천민이면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다. 명예라는 것은 당사자를 불가촉천민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간대접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왜? 아랍은 물길만 끊어져도 마을 전체가 죽는다. 한 명의 실수에 의해 다수가 희생된다. 그 한 명을 죽여서 다수를 보호하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파한다. 일본도 문화가 비슷하다. 자연재해가 많아 한 명의 오판이 다수를 죽이니 이지메로 집단을 보호한다. 실존주의로부터 이어지는 서구 구조주의 철학의 탈근대 사상이 이런 비극을 낳았다. 문화상대주의가 사람을 죽였다. 무개념 진중권이 옹호하는 조영남의 자유가 아랍에 가면 살인의 자유가 된다. 운전기사가 승객에게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하면 그 버스는 결국 전복되고 만다. 21세기 현대사회는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테러리즘의 폭주만 봐도 알 수 있으니 자연재해가 늘어난 것과 마찬가지다. 집단을 보호해야 한다. 어떻게? 공자의 방법은 다른 것이다. 위험인자를 골라서 제거하는 것이 낡은 방법이라면 공자는 인류 개개인이 모두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므로 오빠는 누이를 보호하고 누이는 오빠를 위해 변명해야 한다. 아비가 자식을 고발하고 자식이 아비를 폭로하는 새누리짓은 참된 정의가 아니다. 고발과 폭로는 의사결정을 집단에 위임한 것이다. 자신이 최종적인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선에서 책임지고 수습해야 한다. 가족도 아니고 개인이 정답이다. 개인이 집단의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 서구철학과 공자가 부딪히는 지점이다. 공자가 인류를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