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울의 방
내가 어려서 생각했던 최초의 신의 모습이란, 각각의 작은 거울들로 가득한 방안에 앉아서 거울 속으로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착한사람한테는 상을 주고, 못된 짓을 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어린시절 성탄절마다 먼가 기도를 하면, 가령 "장난감 총을 가지고 싶어요" 라고 하면, 12월 25일 아침에는 여지없이 베게맡에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치원 때였던가? 난 이 얘기를 유치원 친구들한테 했는데, 아이들은 내게 "그건 어른들이 만든 거짓말이야!" 라고 하며 졸지에 바보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산타클로스의 거울의 방에서 그에게 잘보이려고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나는 독감에 걸려서 병원에 갔을 적에도, 커다란 주사를 혈관에 맞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어른들이 만든 거짓말이라고 한다. 나는 그 후로도 몇 년동안 나름대로 굳게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현실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홉살이 되던해였던가? 어머니께서 그 비밀을 직접 실토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럼 신은 거울의 방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내겐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산타클로스가 어른들의 거짓인 것 처럼, 성탄절도 선물을 받으려는 아이들의 핑계일 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내가 만약에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산타클로스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2. 천국과 극락
중학교 즈음 되었을 때엔 학급에서도 종교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지금이야 '남녀칠세부동석' 이라는 말이 영 다른 세계의 고어인 것 같지만, 그때만 해도 또래의 여학생을 볼 수 있는 곳이 교회였다. 난 머리가 나빠서인지, 와 닿지 않아서 인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설' 이라거나, 예수가 우리 모두의 죄를 혼자 뒤집어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거나, 사기친 야곱에게 눈이 어두운 아버지가 축복을 내려주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때 근처 교회를 다녀봐서, 중학교 부터는 근처 비구니 절의 학생회에 가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이라고 하여, 세상은 여섯가지로 나뉘어 있고, 그 중에는 우리가 사는 인간세상과 극락과 지옥 그리고 동물들의 세계와 덩치 큰 아귀가 사는 세계, 또 문명은 발달되었지만, 사람들이 떼지어 싸움이 끊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극락에 가는 것 보다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극락은 완전한 풍요가 있지만, 더이상 발전이 없으므로...
기독교에서는 천당과 지옥이 있고, 불교에는 육바라밀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천국으로 가려는 티켓을 받으려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다음 생을 복되게 하기 위하여 지금 생에서 많은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그게 제대로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누가 판단을 하는 걸까? 또 목사들은 다들 천국에 갔을까? 그렇다면 이명박 장로 역시 천국에 갈까?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기독교를 신뢰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육바라밀에서 "자! 너는 지난 생에서 착한일을 많이 했으니 극락에 가고, 너는 욕심이 많으니 아귀로 태어나라!" 라고 생에 있었던 모든 기록이란 기록을 두루마리로 정리하여 읽고 판단해서 통보하는 것은 누구일까? 옥황상제? 저승사자?
훗날 내가 확신하게 된 사실은, 불교든, 기독교든 천국이네 극락이네 하는 것은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종교의 공통점은 먼가 일이 안풀릴 때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고,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줄 지도 몰라!" 라는 것이다. 요즘 돌풍을 일으키며 많은 개그의 소재가 되고 있는 "허경영을 불러봐!"와도 상통하는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리 절실 했을 때에도 단 한번도 신은 나의 소원에 귀기울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산타클로스는 그러지 않았었는데... 정말이지 누군가 내게 "그건 네가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고 말한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개미가 올려다 봤을 때의 인간은 바람을 불게 하고, 대지를 가르게 하고, 홍수를 내게 하는 거대한 신과 같은 존재지만, 인간은 개미 하나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는 법이다. 신이 역시 그러하리라... 내 알량한 소원일랑 관심이 없는 법이다.
3. 신의 목적
지금에 와서 확신하는 것은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다면, 그것은 신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애완용 강아지는 주인이 들어오면 말도 잘 듣고, 애교도 떨고, 밥 달라고 애원하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강아지에게 주인이 밥을 주어도, 진실은 강아지를 위하여 개 밥을 주는게 아니라 강아지의 주인 그 자신을 위하여 개 밥을 주고, 훈련을 시키고, 껴안고 자는 것이다. 강아지를 위하여 주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강아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것은 신의 필요에 의하여 인간이 존재할 뿐, 인간 개개인이 어찌 되건 신은 관심도 없을 것이다. 신은 단지 그의 목적에 충실할 뿐이다. 처음부터 신은 기도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기도를 하고 소원을 품는 것은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게 아니라, 꿈을 꾸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꿈꾸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닌거다.
물론, 세상에는 우연도 있고, 운명도 있고, 기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주도 있고, 관상도 있고, 타로카드도 있는 것이다. 혹 정말로 사후세계라던가 저승사자, 옥황상제 천당의 천사들과 지옥의 끓는 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모든 것이 신이 만든 시스템 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고, 그것에 자유의지와 생각을 부여하고, 유기적으로 삶의 어떤 규칙성을 부여했다. 그 모든 것이 시스템이고 그 속에서 흥한자 있고, 망한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등따시고, 배부르길 바라고, 이왕이면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더 예쁜 여자(혹은 멋진 남자)와 섹스를 하고, 더 큰 권력을 가지길 원한다. 그런데... 그건 동물이나 다를바가 없잖아? 원숭이나 사자의 무리만 봐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우두머리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암컷을 소유하고, 제일 먼저 사냥감을 먹는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면 인간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신은 왜 인간을 디자인 한 것인가? 왜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꿈꾸게 했던 것인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지능이 아니라 욕망과 두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지혜일 것이다.
어째서 예수는 사막을 헤메었던가? 어째서 싯달타 부처는 왕자의 권력을 벗어던지고 홀로 수행의 길을 떠났던가? 어째서 알렉산더는 지중해에서 떵떵거리며 평생을 편히 보내지 않고, 개고생 하면서 동방원정을 떠났던가? 어째서 김대중은 다섯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민주를 말했던가? 어째서 노무현은 안락한 변호사의 길을 버리고 끝내 부엉이 바위 위에 섰던가?
인간이 동물과 다른것이 있다면, 바로 꿈을 꾼다는 것이다. 만약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창조하나마나 별 상관도 없는 피조물을 괜스레 만들지는 않았을 것. 예수, 부처, 알렉산더, 링컨, 김대중, 노무현... 꿈꾸는 그들이 신의 목적이 아닐까? 만약 그것이 신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설명 될 수가 없다. 신의 존재만큼이나 인간의 역사는 어찌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 부처, 알렉산더, 링컨, 김대중, 노무현 기타 등등의 그들은 뻘짓 한 셈이 되는 거다. 나는 그것에 결코 긍정할 수 없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역겨워하는 말이 바로 "인생 별 거 있더냐?" 라는 것이다. 예수, 부처, 알렉산더, 링컨, 김대중, 노무현 기타 등등의 삶이, 그들의 꿈이 별 것이 아니란 말인가? 별 볼일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위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꿈꾸지 않는 자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4. 최초의 것
역사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에 봤던 어느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고 수도를 에도(지금의 동경)으로 옮기면서 에도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각 지방의 영주의 가족을 1년간 볼모로 잡아두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지방영주끼리 담합하여 반란을 꾀하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1년간 지방 영주의 가족을 에도에 잡아두려고 하니 각 지방에서 영주의 가족과 함께 대규모의 인원이 에도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신도시였던 에도는 새로 이주해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도시는 점차 커져갔지만, 에도를 채우는 사람들 중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목조로 만들어진 좁은 집에는 댓명의 남자들이 함께 기거하였고, 부엌도 좁고, 화재의 위험이 있다보니 직접 음식을 요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때에 번성을 이룬 것이 이동식 포장마차였다. 나무로 된 커다란 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종을 치면서 개시를 알리는 포장마차. 이곳에서 만들어 팔았던 것이 현재의 초밥, 우동, 튀김, 장어구이 등의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것이다. (물론 가이세키 요리도 있지만, 가이세키 요리는 원래 사찰음식이었다.) 선 자리에서 빠르고 간편하게, 게다가 맛도 좋은 음식. 일본의 요리의 시초는 분식이었던 것이다. (일본 영화에서는 간간이 길가에서 뻘쭘하게 서서 우동을 먹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수백년 전통의 우동집이 있고, 가업을 이어서 나름의 요리법을 전수하는 가게, 새로운 재료를 실험하는 가게가 많다. 나 역시도 때때로 우동이나 오코노미야키와 같은 일본음식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봤자 분식인데..." 맛의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일본의 요리는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된 가게가 있어도, 수 천년이 지나도 '분식' 인 것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누군가가 그것을 실용성의 분식으로 기획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우리나라의 음식은 곧 죽어도 평상위에 다리 걸치고 개다리 소반에 밥과 국과 밑반찬이 펼쳐져있어야 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간장, 고추장, 된장에 막걸리, 동동주, 소주 그리고 우려나오는 곰탕과 삼계탕... 이동식 포장마차가 아니라 터를 잡은 주막이었다. 누가 최초에 기획 했던가? 최초의 기준점을 누가 잡았는가?
신이 태초에 인간을 꿈꾸는 동물로 기획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있다. 꿈꾸는 인간은 자신의 온 삶을 다하여 신의 방향을 가리키고 죽는 것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기획자와 실무자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제작자와 배우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2,200년 전,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에라토스 테네스는 하지 때의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의 그림자 길이의 차이를 통해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의 거리를 알아내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800Km 거리를 일직선으로 걸어갔다고 한다. 어째서 지구의 둘레 따위를 궁금해 했을까? 어째서 목숨 마져도 아끼지 않았던 것일까? 꿈꾸는 인간이기 때문에, 목마르기 때문에, 누군가 그리 기획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신의 퍼즐
몇년전에 잠시 유행했던 퍼즐. 길거리에서 팔기도 하고 한번즘 샀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작은 것은 150조각부터, 큰 것은 1,000 조각짜리까지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퍼즐을 하다가 분통터져서 중도포기하는 이유는 요령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령을 안다고 해서 순식간에 척척 맞춰서 하룻밤 사이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름길은 있다. 하지만 그 길이 결코 생각처럼 쉬운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테두리의 조각을 따로 분류하고 네 조각의 모서리를 기준점 삼아서, 사각의 테두리를 완성한다. 그리고 많은 조각을 비슷한 색상이나 형태끼리 분류한다. 그리고 조각을 맞춰가면서 또 분류하고, 또 분류하면서 확률을 높여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어쩌면 수백개의 퍼즐조각을 순서대로 맞추어 가는 과정도 '알고리듬'의 영역이 아닐까?)
조각 하나에 완전하게 맞아들어가는 조각은 단 하나 뿐이다. 조각 하나만 잃어버려도 전체 퍼즐은 완성되지 않는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가의 한 걸음은 해발 몇천 킬로를 올라온 걸음과 같다. 그 한 걸음이 없으면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처럼) 그 하나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으므로 한 조각 한조각이 전체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각을 맞추기 전에는 단지 색상이 들어간 두터운 종이일 뿐이였던 것이, 조각을 맞추는 순간 조각은 그림의 부분으로 된다.
말하자면, 단지 하나의 조각에서는 (물질의) 과학의 영역에 있는 것이, 조각을 맞추면 미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 그리고 최후의 마지막 조각을 맞출 때의 화룡점정이 완성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자면, 퍼즐은 애초에 완성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조각에 색을 입혀서 퍼즐은 만든게 아니라, 완성된 그림을 조각으로 나눈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신에게 있어서 퍼즐같은 것이 아닐까? 하나의 삶이 하나의 조각, 그리고 60억 인구와 역사속에 사라져간 수천억 인류 그 모두가 신의 조각. 수천억의 삶의 조각중에 완성된 신의 조각에 아귀가 맞아들어가는 것은 단 하나. 때문에 그 하나의 삶은 인류 전체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마 맨 처음에 기준점이 되어준 신의 조각은 싯달타 부처와 예수, 희랍의 철학가들과 알렉산더 정도의 삶일 것이다.
하나의 기준점이 있으면 그 색과 모양으로 그 다음에 이어질 조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어떤 그림이 이어질까? 갈릴레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칭기스칸 등의 삶의 조각들이 이어지고, 베토벤에서 비틀즈, 마이클 잭슨까지, 링컨에서 김구, 장준하, 김대중, 노무현까지...
그들은 분명히 가치있는 뭔가를 보았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고, 인류의 완성을 머릿속에 그려낸 것이다. 신의 의도를 알아버린 것이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 중에도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분명히 알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삶도 죽음도 신의 조각이며, 완성된 美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신의 목적과 인류의 완성 앞에서 삶은 순연하다는 것을...
이렇게 삶의 조각들이 시간 속에서 역사의 그림을 만들어갈 때, 그 언젠가 비로소 인류의 완성이라는 것이 존재 할 것이다. 어쩌면 이 인류가 삶으로 만드는 미학의 극점을 경험하기 위하여 신은 애초에 인간을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신이 만든 인간은 완성이 아니라, 인류의 완성을 위한 재료일 뿐이다. 퍼즐이 이미 완성된 것을 조각내어 만들었던 것처럼, 인류 이전에 완성된 인류가 있을 것이고, 또 그전에 또한 완성된 인류가 존재했으리라...
인간은 신이 왜 인류를 만들고, 왜 자유의지를 가지고 꿈꾸게 하였는지는 까마득히 모른 채로, 어리석게도 세계의 끝과 인류의 멸종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처음부터 창조가 있으면 소멸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을, 그 완성에 다가서길 두려워한다. 인간의 삶은 과학으로 조각되지만, 신의 퍼즐은 미학으로 완성된다.
신을 묻는 아들에게 전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