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다음세기 (think22c@freechal.com) 홈페이지: http://www.freechal.com/think22c
2003, 패러디 허생전 for 서프라이즈 버전
요즘 돌아가는 꼴이 하도 답답해서 써봅니다. 수구 세력의 태클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잠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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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신림동에 살았다. 곧장 관악산 밑에 닿으면, 고시원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고시촌이 있고, 골목길을 향하여 문이 열렸는데, 반지하 단칸방은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고시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기자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거짓글쓰는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정치는 못 하시나요?"
"정치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기자도 못한다, 정치도 못한다면, 학원 강사라도 못 하시나요?"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글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이제 칠 년일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강남으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서울에서 제일 부자요?"
이씨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이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이씨를 대하여 길게 읍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백억을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수표를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이씨 집의 가족과 비서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파카의 털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신발은 밑창이 다 나갔으며, 비뚤어진 야구모자에 허름한 청바지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를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 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백억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이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떡값을 받으러 오는 정치꾼들은 으레 자기 위치를 대단히 선전하고, 권력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은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돈을 안 뿌려도 스스로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백억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느냐?"
허생은 백억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광화문으로 갔다. 광화문은 조중동의 기자들이 오가는 곳이요, 힘깨나 쓴다는 신문들이 모두 이곳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허생은 거기서 인쇄업자들을 꾀어 윤전기용 잉크를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신문용 잉크를 몽땅 쓸었기 때문에 유력 신문들이 신문을 찍어내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잉크를 팔았던 업자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억으로 신문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다시 자전거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자전거를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몇 달 지나면 조중동은 신문 구독자를 모집하지 못할 것이다."
허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자전거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허생은 늙은 사공을 만나 말을 물었다.
"바다 밖에 혹시 사람이 살 만한 빈 섬이 없던가?"
"있습지요. 언젠가 풍파를 만나 서쪽으로 줄곧 사흘 동안을 흘러가서 남사군도의 어떤 빈 섬에 닿았습지요. 아마 중국과 필리핀의 중간쯤 될 겁니다. 꽃과 나무는 제멋대로 무성하여 과일 열매가 절로 익어 있고, 짐승들이 떼지어 놀며, 물고기들이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 걸세."
라고 말하니, 사공이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드디어 바람을 타고 남서쪽으로 가서 그 섬에 이르렀다. 허생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이렇게 땅이 좋으니 씹새들에게는 과분한 낙원이 아니겠는가? 그나마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격리시킬 수는 있겠구나."
"텅 빈 섬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사신단 말씀이오?"
사공의 말이었다.
"돈만 있다면 오려는 사람들이 있다네. 사람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나?"
이 때, 여의도에 수백의 씹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각 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토벌하려 했으나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씹새들도 감히 나가 활동을 못해서 돈이 없고 곤란한 판이었다. 허생이 씹새의 회관을 찾아가서 그들을 달래었다.
"백 명이 백억을 받아 와서 나누면 하나 앞에 얼마씩 돌아가지요?"
"일 인당 일 억이지요."
"모두 다음에 선거할 자금은 있소?"
"없소."
"돈없이 당선될 능력은 있소?"
씹새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돈없이 당선될 능력이 있는 놈이 무엇 때문에 불법 정치자금을 받는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왜 진성당원을 늘려 당비를 걷고,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떳떳이 당선되어 임기를 보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도둑놈 소리도 안 듣고 살면서, 시민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요, 돌아다녀도 칼맞을까 걱정을 않고 길이 깨끗한 이름을 남길 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배운 도둑질이라 못 버릴 뿐이지요."
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도둑질을 하면서 어찌 돈을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소. 내일 마포에 나와 보오. 붉은 깃발을 단 것이 모두 돈을 실은 배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허생이 씹새들과 언약하고 내려가자, 씹새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튿날, 씹새들이 마포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허생이 수백억원의 돈을 싣고 온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해서 허생 앞에 줄지어 절했다.
"오직 총재님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공천만 해주십시오."
"너희들, 제대로 된 우두머리를 새로 뽑아 한줄로 서보아라."
이에, 씹새들은 서로 잘났다고 치고 받다가 날이 저물도록 한 줄로 서지 못했다.
"너희들, 배운 도둑질인 줄서기도 못해 우왕좌왕하면서 무슨 정치를 더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출마하려고 해도, 이미 이름이 토씹새격문에 올랐으니, 나갈 지역구가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 사람이 일억원씩 가지고 가서 보좌관과 운전기사를 데리고 오너라."
허생의 말에 씹새들은 고개를 숙이고 흩어져 갔다.
허생은 몸소 백 명이 1년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씹새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드디어 다들 배에 싣고 그 빈 섬으로 들어갔다. 허생이 씹새들을 몽땅 쓸어 가서 한동안 여의도에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씹새들은 본디 일을 배우지 않아 섬은 도무지 개간이 진척되지 않았다. 그나마 보좌관과 운전기사들이 일을 하여 섬을 개간해 나갔다. 하는 수 없이 허생은 일찌감치 씹새들 중 가장 부패한 자들을 골라 얼굴과 이름을 고치고 일본어를 가르친 다음 자민당에 팔아 대박을 터뜨렸다. 마침 일본이 정치개혁의 바람이 불어 씹새가 귀해져 천억 엔을 받게 되었다.
허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이에 섬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이 섬에 들어올 때엔 먼저 개과천선하게 한 후에 땀흘려 일하는 법을 가르쳐, 되돌아가면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봉사할 줄 알도록 하게 하였더니라. 그런데 땅은 개간되지 않고 반성하는 빛은 없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아이들을 낳거들랑 부모를 본받지 않도록 하고, 제발 주먹을 치켜들고 싸움질하지 않게 하여라."
했다. 그리고 개중에 참회한 자들을 골라 모조리 함께 배에 태운 뒤 받은 엔화를 죄다 바다 가운데 던지며,
"바다가 마르면 주워 갈 사람이 있겠지!! 씹새를 팔아 번 돈을 내 모두 가져가 무엇하랴!!"
했다. 그리고 다른 배를 모조리 불사르면서,
"조국에 화근을 없애야 되지."
했다.
허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유능하나 돈이 없는 정치 신인들에게 총선을 위한 기탁금을 대주었다. 그러고도 돈이 천억원이 남았다.
"이건 이씨에게 갚을 것이다."
허생이 가서 이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이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백억을 실패 보지 않았소?"
허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백억이 어찌 도(道)를 살찌게 하겠소?"
하고, 천억원을 이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글읽기를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백억원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이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허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씹새급으로 보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이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관악산 밑으로 가서 조그만 반지하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할미가 고시촌에서 김밥을 파는 것을 보고 이씨가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반지하가 누구의 방이오?"
"허 생원 댁입지요. 가난한 형편에 글공부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1년이 다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집을 나간 날로 죽은 셈 칩지요."
이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로,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이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 주려 했으나, 허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천억 엔을 버리고 천억 원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인터넷이나 끊기지 않고 책이나 보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왜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이씨가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씨는 그 때부터 허생의 집에 인터넷 요금이나 책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정관계나 재계의 영입 제의를 전달하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술잔을 기울여 취하도록 마셨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의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이씨가 채 한 해가 안되는 동안에 어떻게 천억 원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한국이란 나라는 정치꾼들이 신의없는 짓거리를 하고, 뒷돈을 받아 돈을 뿌려 선거를 치르며, 정치 신인의 진입을 막으니, 도무지 정치가 개혁되지를 않지요. 이 씹새들만 척결할 수 있다면 국민들은 백억 아니라, 오백억, 천억원이라도 기꺼이 모금해 주었을 것이외다. 이 씹새들을 척결하려면 언론이 바로서야 할 것을, 소위 기자입네 목에 힘주는 것들이 열에 여덟 아홉은 씹새들을 옹호하니, 썩은 신문을 먼저 처단해야 하지요. 정권이 바뀌면 신문들이 죄다 자기 편이 될 것이라 믿고 밀실에서 흥정하여 적당히 타협하는 일은 개혁할 마음이 없이 개혁을 흉내내는 자들이나 하는 짓 아니오? 대저 언로가 바로서서 씹새들을 낙선시킬 수 있게 되어야 문제가 해결되는 법이오. 그리고 지역감정이란 괴물과 싸우느라 힘을 분산시킨 의병들이 아직은 힘이 약해 씹새들을 홀로 대적하지 못하니, 돈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씹새들을 돈으로 꾀어 조용히 격리시킨 것이오. 그러나 엄연히 선거를 통해 씹새들을 심판하여 교훈을 주는 것이 정석이거늘, 옛 사람을 흉내내어 일망타진한 결과 아직 지역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비록 씹새도 척결하고 정치 신인들에게 기탁금도 대주었으나 이는 고질병을 고치지 못한 일이라, 어이 안타깝지 않겠소? 후세에 다시 한 번 나의 이 방법을 써야 할 때가 온다면 반드시 나라가 크게 병들어 있을 것이오."
"처음에 내가 선뜻 백억을 뀌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그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큰 선거가 있으면 이른바 '보험금'을 내고, 보험금을 받은 쪽이 이겨 떡고물이 돌아오는 것은 운에 맡기고 있는 것이 당신들 아니오? 이기지도 못하는 쪽에 번번이 돈을 내는 것이나 나에게 백억 원을 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비자금을 받아가는 자들은 대저 민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는 천심이라 하는 민심을 읽고 있었으니, 어찌 실패를 보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 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낸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겠소? 이미 백억을 빌린 다음에는 민심이 원하는대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겠지요."
이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개혁 세력들이 반세기 동안 수구세력에게서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고자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선비가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우선, 고 제정구 의원 같은 분은 국회의장을 맡아도 좋을 훌륭한 의원이었건만 결국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고, 조순형 의원 같은 분은 능히 당 대표직을 감당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최고위원 한 번 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대선을 일곱 번은 치를만하였으되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이씨는 본래 국무총리와 잘 아는 사이였다. 갓 인준을 받은 국무총리가 이씨에게 재야나 학계에 혹시 쓸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이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상종해서 석 달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총리는 수행원도 다 물리치고 이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이씨는 총리를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총리가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이씨는 총리를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총리가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총리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총리요."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받는 공무원이군. 내가 와룡 선생(臥龍先生)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대통령께 아뢰어서 삼고 초려(三顧草廬)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총리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총리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능력있고 깨끗한 젊은 인재들이 고시는 전근대적 임용 제도라 하여 시험치기를 꺼리고, 디시인사이드에서 리플 놀이를 하며 햏자 생활을 하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이트에서 글을 쓰는 것으로 연명하여 살고 있다. 이들을 비록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되, 객관식 1차 문제며 2차 모범 답안만 달달 외워서 고시에 합격한 이들보다 재주가 훨씬 출중하고 정신이 올바르니, 너는 내각에 명하여 고시 제도를 혁파하고, 정말 유능한 인재들을 가려 뽑을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게 할 수 있겠느냐?"
총리는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자주와 국익을 외치려면 먼저 제 민족끼리 화해ㆍ협력하지 않고는 안 되고, 제 민족끼리 화해ㆍ협력하려면 먼저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원숭이 부시가 갑자기 백악관의 주인이 되어서 북쪽과는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북한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핵을 만들겠다고 덤비고 있는 터이다. 진실로 광해군 때처럼 정교한 중립 외교를 잘 펼쳐 중ㆍ러ㆍ일을 모두 우리 편으로 만들고, 미국을 국제 여론과 이해 관계로 잘 달래 성의있게 대화에 나서게 하며, 우리 정부가 중유와 전력을 지원하고, 기업들이 개성 공단과 신의주에 진출하여 돈을 벌도록 해주면, 저들도 반드시 살아날 수 있게 됨을 기뻐하여 핵을 포기하고 같은 민족과 힘을 합치려 할 것이다. 통일비용을 지금부터 조달하면서 그 중 일부는 북한의 경제 개발에 투자하고, 외교력을 단단히 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하나 하나 대등하게 고쳐 나가는 한편, 나라 안으로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시장 질서를 어기는 재벌을 엄격히 규제하며, 기득권층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인재를 널리 구해 착실하게 개혁을 진행해 나가면, 영호남 할 것 없이 나라 안의 여론이 정부를 지지하여 기반이 탄탄해 질 것이다. 그런 연후에 개혁 정권을 이십년만 더 지속시키면, 통일의 기틀이 갖추어져 민족끼리 다투는 데에 힘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고, 나라가 분단되어 있지 않으니 미국의 농간에 멋대로 놀아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하면, 잘되면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로서 한 시대를 주름잡을 수 있을 것이요, 안되어도 주변 4강이 한국을 함부로 무시하며 감놔라 배놔라 하지 않을 것이다."
총리는 힘없이 말했다.
"촛불 시위를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하고, 재벌을 규제하려고 하니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이는 판국에, 보수층의 반발을 사면 정부를 꾸려나갈 수 있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공직자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위에서 시키는대로 명을 받아서 할 줄만 알고, 이리저리 모두에게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며, 소신있게 일 처리하는 것을 기피하니 어찌 제대로 된 공직자라 한단 말인가? 히딩크는 나이트를 전전하던 김남일을 일약 국가대표로 발탁하여 월드컵 4강을 이끌었고, 김대중은 햇볕 정책을 꺾지 않기 위해 퇴임 직전까지도 전쟁 반대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그깟 조선 시대적 과거와 같은 고시 제도 하나를 혁파하지 못하고, 보수층을 두려워 하는 새가슴으로 이리 저리 눈치만 살피며 국가의 백년대계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딴에 일국의 국무총리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내각을 통할한다 하겠는가? 행정의 달인이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당장 사표를 써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술을 끼얹으려 했다. 총리는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랜선은 끊겨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2003. 1. 21
2003, 패러디 허생전 for 서프라이즈 버전
요즘 돌아가는 꼴이 하도 답답해서 써봅니다. 수구 세력의 태클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잠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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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은 신림동에 살았다. 곧장 관악산 밑에 닿으면, 고시원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고시촌이 있고, 골목길을 향하여 문이 열렸는데, 반지하 단칸방은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고시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기자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거짓글쓰는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정치는 못 하시나요?"
"정치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기자도 못한다, 정치도 못한다면, 학원 강사라도 못 하시나요?"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글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이제 칠 년일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강남으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서울에서 제일 부자요?"
이씨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이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이씨를 대하여 길게 읍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백억을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수표를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이씨 집의 가족과 비서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파카의 털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신발은 밑창이 다 나갔으며, 비뚤어진 야구모자에 허름한 청바지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를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 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백억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이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떡값을 받으러 오는 정치꾼들은 으레 자기 위치를 대단히 선전하고, 권력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은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돈을 안 뿌려도 스스로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백억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느냐?"
허생은 백억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광화문으로 갔다. 광화문은 조중동의 기자들이 오가는 곳이요, 힘깨나 쓴다는 신문들이 모두 이곳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허생은 거기서 인쇄업자들을 꾀어 윤전기용 잉크를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신문용 잉크를 몽땅 쓸었기 때문에 유력 신문들이 신문을 찍어내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잉크를 팔았던 업자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억으로 신문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다시 자전거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자전거를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몇 달 지나면 조중동은 신문 구독자를 모집하지 못할 것이다."
허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자전거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허생은 늙은 사공을 만나 말을 물었다.
"바다 밖에 혹시 사람이 살 만한 빈 섬이 없던가?"
"있습지요. 언젠가 풍파를 만나 서쪽으로 줄곧 사흘 동안을 흘러가서 남사군도의 어떤 빈 섬에 닿았습지요. 아마 중국과 필리핀의 중간쯤 될 겁니다. 꽃과 나무는 제멋대로 무성하여 과일 열매가 절로 익어 있고, 짐승들이 떼지어 놀며, 물고기들이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 걸세."
라고 말하니, 사공이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드디어 바람을 타고 남서쪽으로 가서 그 섬에 이르렀다. 허생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이렇게 땅이 좋으니 씹새들에게는 과분한 낙원이 아니겠는가? 그나마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격리시킬 수는 있겠구나."
"텅 빈 섬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사신단 말씀이오?"
사공의 말이었다.
"돈만 있다면 오려는 사람들이 있다네. 사람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나?"
이 때, 여의도에 수백의 씹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각 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토벌하려 했으나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씹새들도 감히 나가 활동을 못해서 돈이 없고 곤란한 판이었다. 허생이 씹새의 회관을 찾아가서 그들을 달래었다.
"백 명이 백억을 받아 와서 나누면 하나 앞에 얼마씩 돌아가지요?"
"일 인당 일 억이지요."
"모두 다음에 선거할 자금은 있소?"
"없소."
"돈없이 당선될 능력은 있소?"
씹새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돈없이 당선될 능력이 있는 놈이 무엇 때문에 불법 정치자금을 받는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왜 진성당원을 늘려 당비를 걷고,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떳떳이 당선되어 임기를 보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도둑놈 소리도 안 듣고 살면서, 시민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요, 돌아다녀도 칼맞을까 걱정을 않고 길이 깨끗한 이름을 남길 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배운 도둑질이라 못 버릴 뿐이지요."
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도둑질을 하면서 어찌 돈을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소. 내일 마포에 나와 보오. 붉은 깃발을 단 것이 모두 돈을 실은 배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허생이 씹새들과 언약하고 내려가자, 씹새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튿날, 씹새들이 마포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허생이 수백억원의 돈을 싣고 온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해서 허생 앞에 줄지어 절했다.
"오직 총재님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공천만 해주십시오."
"너희들, 제대로 된 우두머리를 새로 뽑아 한줄로 서보아라."
이에, 씹새들은 서로 잘났다고 치고 받다가 날이 저물도록 한 줄로 서지 못했다.
"너희들, 배운 도둑질인 줄서기도 못해 우왕좌왕하면서 무슨 정치를 더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출마하려고 해도, 이미 이름이 토씹새격문에 올랐으니, 나갈 지역구가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 사람이 일억원씩 가지고 가서 보좌관과 운전기사를 데리고 오너라."
허생의 말에 씹새들은 고개를 숙이고 흩어져 갔다.
허생은 몸소 백 명이 1년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씹새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드디어 다들 배에 싣고 그 빈 섬으로 들어갔다. 허생이 씹새들을 몽땅 쓸어 가서 한동안 여의도에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씹새들은 본디 일을 배우지 않아 섬은 도무지 개간이 진척되지 않았다. 그나마 보좌관과 운전기사들이 일을 하여 섬을 개간해 나갔다. 하는 수 없이 허생은 일찌감치 씹새들 중 가장 부패한 자들을 골라 얼굴과 이름을 고치고 일본어를 가르친 다음 자민당에 팔아 대박을 터뜨렸다. 마침 일본이 정치개혁의 바람이 불어 씹새가 귀해져 천억 엔을 받게 되었다.
허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이에 섬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이 섬에 들어올 때엔 먼저 개과천선하게 한 후에 땀흘려 일하는 법을 가르쳐, 되돌아가면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봉사할 줄 알도록 하게 하였더니라. 그런데 땅은 개간되지 않고 반성하는 빛은 없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아이들을 낳거들랑 부모를 본받지 않도록 하고, 제발 주먹을 치켜들고 싸움질하지 않게 하여라."
했다. 그리고 개중에 참회한 자들을 골라 모조리 함께 배에 태운 뒤 받은 엔화를 죄다 바다 가운데 던지며,
"바다가 마르면 주워 갈 사람이 있겠지!! 씹새를 팔아 번 돈을 내 모두 가져가 무엇하랴!!"
했다. 그리고 다른 배를 모조리 불사르면서,
"조국에 화근을 없애야 되지."
했다.
허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유능하나 돈이 없는 정치 신인들에게 총선을 위한 기탁금을 대주었다. 그러고도 돈이 천억원이 남았다.
"이건 이씨에게 갚을 것이다."
허생이 가서 이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이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백억을 실패 보지 않았소?"
허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백억이 어찌 도(道)를 살찌게 하겠소?"
하고, 천억원을 이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글읽기를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백억원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이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허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씹새급으로 보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이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관악산 밑으로 가서 조그만 반지하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할미가 고시촌에서 김밥을 파는 것을 보고 이씨가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반지하가 누구의 방이오?"
"허 생원 댁입지요. 가난한 형편에 글공부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1년이 다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집을 나간 날로 죽은 셈 칩지요."
이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로,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이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 주려 했으나, 허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천억 엔을 버리고 천억 원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인터넷이나 끊기지 않고 책이나 보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왜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이씨가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씨는 그 때부터 허생의 집에 인터넷 요금이나 책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정관계나 재계의 영입 제의를 전달하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술잔을 기울여 취하도록 마셨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의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이씨가 채 한 해가 안되는 동안에 어떻게 천억 원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한국이란 나라는 정치꾼들이 신의없는 짓거리를 하고, 뒷돈을 받아 돈을 뿌려 선거를 치르며, 정치 신인의 진입을 막으니, 도무지 정치가 개혁되지를 않지요. 이 씹새들만 척결할 수 있다면 국민들은 백억 아니라, 오백억, 천억원이라도 기꺼이 모금해 주었을 것이외다. 이 씹새들을 척결하려면 언론이 바로서야 할 것을, 소위 기자입네 목에 힘주는 것들이 열에 여덟 아홉은 씹새들을 옹호하니, 썩은 신문을 먼저 처단해야 하지요. 정권이 바뀌면 신문들이 죄다 자기 편이 될 것이라 믿고 밀실에서 흥정하여 적당히 타협하는 일은 개혁할 마음이 없이 개혁을 흉내내는 자들이나 하는 짓 아니오? 대저 언로가 바로서서 씹새들을 낙선시킬 수 있게 되어야 문제가 해결되는 법이오. 그리고 지역감정이란 괴물과 싸우느라 힘을 분산시킨 의병들이 아직은 힘이 약해 씹새들을 홀로 대적하지 못하니, 돈없이는 선거를 치를 수 없는 씹새들을 돈으로 꾀어 조용히 격리시킨 것이오. 그러나 엄연히 선거를 통해 씹새들을 심판하여 교훈을 주는 것이 정석이거늘, 옛 사람을 흉내내어 일망타진한 결과 아직 지역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비록 씹새도 척결하고 정치 신인들에게 기탁금도 대주었으나 이는 고질병을 고치지 못한 일이라, 어이 안타깝지 않겠소? 후세에 다시 한 번 나의 이 방법을 써야 할 때가 온다면 반드시 나라가 크게 병들어 있을 것이오."
"처음에 내가 선뜻 백억을 뀌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그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큰 선거가 있으면 이른바 '보험금'을 내고, 보험금을 받은 쪽이 이겨 떡고물이 돌아오는 것은 운에 맡기고 있는 것이 당신들 아니오? 이기지도 못하는 쪽에 번번이 돈을 내는 것이나 나에게 백억 원을 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비자금을 받아가는 자들은 대저 민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는 천심이라 하는 민심을 읽고 있었으니, 어찌 실패를 보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 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낸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겠소? 이미 백억을 빌린 다음에는 민심이 원하는대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겠지요."
이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개혁 세력들이 반세기 동안 수구세력에게서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고자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선비가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우선, 고 제정구 의원 같은 분은 국회의장을 맡아도 좋을 훌륭한 의원이었건만 결국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고, 조순형 의원 같은 분은 능히 당 대표직을 감당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최고위원 한 번 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대선을 일곱 번은 치를만하였으되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이씨는 본래 국무총리와 잘 아는 사이였다. 갓 인준을 받은 국무총리가 이씨에게 재야나 학계에 혹시 쓸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이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상종해서 석 달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총리는 수행원도 다 물리치고 이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이씨는 총리를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총리가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이씨는 총리를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총리가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총리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총리요."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받는 공무원이군. 내가 와룡 선생(臥龍先生)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대통령께 아뢰어서 삼고 초려(三顧草廬)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총리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총리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능력있고 깨끗한 젊은 인재들이 고시는 전근대적 임용 제도라 하여 시험치기를 꺼리고, 디시인사이드에서 리플 놀이를 하며 햏자 생활을 하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이트에서 글을 쓰는 것으로 연명하여 살고 있다. 이들을 비록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되, 객관식 1차 문제며 2차 모범 답안만 달달 외워서 고시에 합격한 이들보다 재주가 훨씬 출중하고 정신이 올바르니, 너는 내각에 명하여 고시 제도를 혁파하고, 정말 유능한 인재들을 가려 뽑을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게 할 수 있겠느냐?"
총리는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자주와 국익을 외치려면 먼저 제 민족끼리 화해ㆍ협력하지 않고는 안 되고, 제 민족끼리 화해ㆍ협력하려면 먼저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원숭이 부시가 갑자기 백악관의 주인이 되어서 북쪽과는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북한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핵을 만들겠다고 덤비고 있는 터이다. 진실로 광해군 때처럼 정교한 중립 외교를 잘 펼쳐 중ㆍ러ㆍ일을 모두 우리 편으로 만들고, 미국을 국제 여론과 이해 관계로 잘 달래 성의있게 대화에 나서게 하며, 우리 정부가 중유와 전력을 지원하고, 기업들이 개성 공단과 신의주에 진출하여 돈을 벌도록 해주면, 저들도 반드시 살아날 수 있게 됨을 기뻐하여 핵을 포기하고 같은 민족과 힘을 합치려 할 것이다. 통일비용을 지금부터 조달하면서 그 중 일부는 북한의 경제 개발에 투자하고, 외교력을 단단히 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하나 하나 대등하게 고쳐 나가는 한편, 나라 안으로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시장 질서를 어기는 재벌을 엄격히 규제하며, 기득권층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인재를 널리 구해 착실하게 개혁을 진행해 나가면, 영호남 할 것 없이 나라 안의 여론이 정부를 지지하여 기반이 탄탄해 질 것이다. 그런 연후에 개혁 정권을 이십년만 더 지속시키면, 통일의 기틀이 갖추어져 민족끼리 다투는 데에 힘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고, 나라가 분단되어 있지 않으니 미국의 농간에 멋대로 놀아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하면, 잘되면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로서 한 시대를 주름잡을 수 있을 것이요, 안되어도 주변 4강이 한국을 함부로 무시하며 감놔라 배놔라 하지 않을 것이다."
총리는 힘없이 말했다.
"촛불 시위를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하고, 재벌을 규제하려고 하니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이는 판국에, 보수층의 반발을 사면 정부를 꾸려나갈 수 있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공직자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위에서 시키는대로 명을 받아서 할 줄만 알고, 이리저리 모두에게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며, 소신있게 일 처리하는 것을 기피하니 어찌 제대로 된 공직자라 한단 말인가? 히딩크는 나이트를 전전하던 김남일을 일약 국가대표로 발탁하여 월드컵 4강을 이끌었고, 김대중은 햇볕 정책을 꺾지 않기 위해 퇴임 직전까지도 전쟁 반대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그깟 조선 시대적 과거와 같은 고시 제도 하나를 혁파하지 못하고, 보수층을 두려워 하는 새가슴으로 이리 저리 눈치만 살피며 국가의 백년대계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딴에 일국의 국무총리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내각을 통할한다 하겠는가? 행정의 달인이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당장 사표를 써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술을 끼얹으려 했다. 총리는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랜선은 끊겨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2003.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