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사건 안에서 에너지의 대칭성과 방향성으로 모두 설명한다. 에너지의 대칭성이 질량보존이라면 방향성은 엔트로피다.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이다. 대칭성이 공간의 가역성에 주목한다면 방향성은 시간의 비가역성에 주목한다. 우리는 질량보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공간의 대칭성은 자연을 관찰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주변의 많은 것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동서남북으로 대칭되고 상하좌우로 대칭된다. 시간의 비가역성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간의 방향은 틀 수 있는데 시간의 방향은 틀 수 없다. 공간의 방향은 사람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지만 시간의 방향은 관측되지 않는다. 시간은 추상적인 사건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을 보는 방법은 알아도 사건을 보는 방법은 모른다. 그런데 우주는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복제다. 사건을 지배하는 것은 에너지의 대칭성과 방향성이다. 구조는 의사결정구조이며 의사결정은 사건의 복제로 일어나고 복제는 곧 쪼개지는 것이다. 쪼개지는 것은 마이너스다. 그 과정에 에너지 소모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결이 있다. 결은 마이너스 방향으로 존재한다. 장작을 패더라도 결따라 패야 장작이 쪼개진다. 왼손잡이라면 왼손을 쓰는게 맞고 오른손잡이라면 오른손을 쓰는게 맞다. 그것이 결이다. 두 가지 결이 있다. 하나는 인간이 상대하는 대상 자체의 결이요 하나는 주체의 결이다. 장작의 결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대상의 결이다. 자신이 왼손잡이냐 오른손잡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주체의 결이니 인간이 가족과 동료와 국가로 집단적 의사결정단위를 조직하는 데 따른 결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는 첫째 그 사람이 착수한 사업의 결 때문이다. 한국이 어떻게 하는 것은 한국의 지정학적 구조 때문이다. 둘째 소속한 집단과의 관계에도 결이 있다. 국가주의나 부족주의나 가족주의나 개인주의냐로 결이 나 있다. 결따라 간다. 진보와 보수는 결이 다른 것이다. 의사결정구조가 다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이질적인 두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중에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릴 수는 없다. 진보가 먼저 가고 보수는 따라간다. 순서를 매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을 판단하려면 결을 봐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결을 타고 있느냐다. 이면에 어떤 의사결정구조가 작동하는지를 봐야 한다. 마마보이인지 마초인지 페미인지 살펴봐야 한다. 진보인지 보수인지 봐야 한다.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봐야 한다. 결은 에너지 효율성이다. 세상은 공간의 대칭과 시간의 비가역성이다. 대칭을 쓰면 효율적이다. 물건을 운반해도 가운데의 손잡이를 잡으면 힘을 아낄 수 있다. 비가역성도 효율적이다.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쉬운 일을 나중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100킬로를 먼저 들고 다음에 50킬로를 드는게 낫다. 100킬로를 들 때 힘을 썼다면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보존된 반동의 힘으로 50킬로를 들 수 있다. 반대로 가면 먼저 50킬로를 들면서 쓰고 남은 반동의 힘으로 100킬로를 들 수 없다.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 힘을 써야 하므로 앞의 반동은 버리게 된다. 이것이 비가역성에 따른 에너지 손실이다. 투수라면 다시 와인드업을 해서 힘을 모아야 한다. 반면 큰 것을 먼저 한다면 여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몰아붙여서 힘을 아낄 수 있다. 자연은 이러한 에너지의 효율성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 자연에서 비효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 사건은 1회의 에너지 투입에 따르는 결과를 의미하며 비효율은 에너지의 추가 투입을 요구하는데 이때 그 이전의 성과가 버려진다. 에너지가 고갈되므로 사건은 진행되지 않는다. 이 이치를 알면 세상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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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 전환에 따른 손실을 말하며, 이는 열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변환될때 약 60%의 손실이 발생 시킨 후 전기를 얻게 된다. 즉 전환손실을 따져 본다면 초기 투입량을 결정하여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얻는게 효율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손실된 열에너지는 비가역성(엔트로피)으로 재생이 불가하며, 에너지 총량은 유지되는 열역학 제1법칙으로 환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