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도道는 상도가 아니다. 참된 명名은 상명이 아니다. 도는 일이다. 일은 기승전결로 진행하며 다른 일과 연결되어 간다. 그러므로 참된 도는 한 곳에 머무르는 상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이름은 지목하여 가리켜질 수 없다. 우리는 강물에 이름을 붙이지만 어느새 하류로 흘러가 버린다. 손으로 가리켜진 물은 이미 그곳에 있지 않다. 우리는 사람에 이름을 붙여 부르지만 그 사람은 변해 있다. 우리가 가리켜 부르는 그 사람은 마음 속에 비친 그림자일 뿐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무명으로 천지는 시작하며 유명으로 만물은 태어난다. 존재는 일이다. 일은 사건이다. 사건은 추상적 존재이므로 본래 이름이 없다. 단지 사건이 불처럼 번져가고 물처럼 흘러갈 뿐이다. 천지의 운행으로 만물이 태어나면 이름을 얻는다. 계절과 같다. 봄여름가을겨울은 본래 추상적인 존재이므로 이름없는 것이다. 원래는 춘추밖에 없었고 추동은 나중에 생겼다. 계절이 운행하면 만물이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만물은 이름있는 구체적 존재다. 세상은 이름없는 추상의 세계와 이름이 있는 물질의 세계로 되어 있다. 구조론은 두 세계를 합쳐서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무명과 유명으로 나눈다면 쓸데없는 분별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무명으로 근원의 그윽함을 보고, 언제나 유명으로 그 질서됨을 보라. 무명과 유명은 하나에서 나온 두가지 이름이라, 이를 그윽하다고 한다. 그윽하고 그윽하니, 모든 거룩함의 문이라. 추상적 사건과 구체적 물질은 한 바탕에서 나온 두 이름이니 그윽하다고 할 수 있다. 구조론으로 보면 추상적 사건이 있을 뿐 구체적 물질은 없다. 있되 딸려 있다. 빌붙어 있으니 불완전하다. 추상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고 물질은 그것이 얽힌 상태다. 얽힘을 풀어서 보면 둘은 하나다. 추상적 사건이 존재의 진짜다. 물질은 영사기를 돌려 이미지를 스크린에 덧입히듯이 입힌 것이다. 우리는 극장의 스크린을 보는게 아니라 사실은 필름의 영상을 본다. 눈으로는 모니터의 유리를 보고 있지만 실제로 뇌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USB에 저장된 데이터다. 모니터는 거쳐갈 뿐이다. 물질은 거쳐갈 뿐이다. 그윽하다는 말은 얼버무린 것이고, 무명이 존재의 진짜 모습이다. 구태여 말하면 그것은 에너지다.
단숨에 공자 단행본 한 권 분량을 써버리고 노자 들어갑니다. 도덕경은 5천자 밖에 안 되는데 앞부분에 조금 말되고 뒤로 갈수록 개소리라서 이런데 낚이는 자가 한심한 거지만 공자와 비교할겸 해서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재미지네요. 뇌구조의 차이에 주목해야 합니다. 공자는 일의 기승전결에 따른 다단 분류법을 쓰고 노자는 2분법적 대비법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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