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에 대해 엉뚱한 소리 하는 분들은 지도를 잘못 보고 거리착각을 하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북경에서 홍콩까지의 거리는 무려 1900킬로다. 허벌나게 먼 거리다. 평양까지는 단 800킬로에 불과하다. 졸라 가깝다. 북경에서 상해까지는 무려 1천 킬로, 압록강까지는 650킬로다. 고구려 변경인 요동까지 500킬로. 중국의 거대한 영토크기를 감안하면 가까운 거리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다. 바로 이웃집이다. 중국문명의 출발점이 된 하나라, 은나라시대를 보더라도 고구려와 가까운 황하하류다. 이 지역은 한국인과 유전자가 같은 동북인들이 사는 고장이다. 반면 북경사람과 상해사람은 유전자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다. 게다가 언어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수천년간 동화되어 같아졌지만 당나라때만 해도 양자강 남쪽에 사는 사람은 오랑캐로 여겼다. 공자도 황하하류인 산동사람이다. 바닷가에서 배만 타면 바로 한반와 연결된다. 산동성에서 고구려땅인 대련까지 바다에 섬들이 늘어서 있으므로 오가기도 쉽다. 40킬로 정도 이격되어 있는데 부산에서 대마도 거리다. 범선은 시속 20킬로 정도로 달리므로 섬들을 이용하면 두 시간에 건너온다. 중국과 한반도 일대는 걸어서 열흘, 말 타고 사흘, 배 타고 두 시간인데 같은 중국 안에서는 그 열 배가 된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지리적인 장벽이 없으므로 해안선을 따라 계속 가면 평양까지 곧장 가게 된다.
반면 중국 안에서는 왕래가 어렵다. '총균쇠'에서 보듯이 사람은 원래 수평으로 잘 움직이고, 수직으로 잘 못 움직인다. 풍토병과 날씨의 차이, 키우는 농작물의 차이 때문이다. 다만 전쟁의 경우는 중국안이 중요하다. 중국사는 대개 북쪽이 남쪽을 쳐서 정복왕조를 여는 형태이며 동서로는 갈 일이 별로 없다. 문화는 동서로 잘 전파되지만 전쟁은 남북으로 잘 일어난다. 단 수나라와 당나라는 특별한데 이들은 수도가 서쪽에 있다. 중국이 남북으로 잘 정복하는 것은 솥발처럼 밸런스가 일어나기 때문인데 수도가 서쪽 끝 시안에 있으면 동쪽으로도 한반도까지 쳐야만 밸런스가 이루어진다. 만야 수도가 남경에 있다면 한반도로는 올 일이 없다.
밸런스 원리에 의해 전쟁은 중국 안쪽으로 잘 전파되지만 문명은 교역로를 따라 동서로 잘 움직이는게 정상이다. 당나라와 수나라 영토는 서쪽으로 매우 길다. 멀리까지 갔다. 해안을 따라 베트남까지 쳐들어갔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문명의 요람인 황하하류 사이는 함곡관이 막고 있다. 서쪽으로 돈황까지 가는 길에는 사막이 가로막는다. 그런데도 갔다. 무엇인가? 하은주문명이 성립했을 때 고조선까지 바로 전파되었다. 단군시대에 중국에 하나라, 은나라가 들어섰다면 같은 시기 평양에 고조선이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리로 이어진 이웃이기 때문이다. 구조론적으로는 일정한 거리가 이격되어야 문명의 핵이 잘 들어선다. 북쪽에 진나라가 강국이면 남쪽에 초나라가 맞서는데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위성국으로 흡수된다. 진나라와 가까운 조, 한, 위가 바로 진나라에 흡수되는 것과 같다. 중국과 교류하려면 거점은 적당히 멀어야 한다. 황하하류와 평양 사이의 1천킬로는 문명의 도심과 부도심이 들어서기에 적당한 거리다. 지금도 중국의 4대 축이라 할 뻬이징, 상하이, 충칭, 광저우가 1천킬로 이상의 거리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명동과 강남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어야 자연스럽다. 중국에 문명이 있는데 한반도에 문명이 없다는 주장은 북경에는 있는데 상해에는 없다는 주장처럼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고고학적으로 입증이 된다. 유물을 발굴해보면 고대 중국에는 하나라, 은나라만 문명이 있었던게 아니다. 10여개 혹은 그 이상의 문화가 비슷한 시기에 공존하였다. 하나라, 은나라는 어쩌다 족보가 역사에 기록되는 바람에 유명해진 것이다. 중국 어디라도 땅 파보면 얄궂은 거 나온다.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이 실존인물이라는 근거는 없다. 굳이 부정할 이유도 없다. 수십 여개의 작은 문명들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름들이 없는 것도 이상하다. 그들은 단지 중국의 1/30을 정복했을 뿐이다. 정복자도 아니다. 중국의 왕이 아니라 중국 어떤 지역의 선출된 족장에 불과하지만 기특하게도 이름을 남긴 할배니까 왕으로 불러줄 뿐이다. 그래야 자연스럽잖아. 황하문명은 통째로 사기다. 나일강이나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인더스강이 그렇듯이 큰 강 주변에는 큰 문명이 하나 정도는 있어조야 한다는 당위에 불과하다. 천만에. 나일강은 관개수로가 있어서 그런 거다. 고대문명은 사실 큰 강과 관계가 없다.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관개수로가 발달한 것이 사실이나 이는 특수한 예다. 터키나 이란의 고원, 코카서스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강과 상관없다. 스톤 헨지가 강변에 있는 것은 아니며 잉카나 마야도 강변이 아니다. 터키 괴베클리 테페의 1만 2천년 전 석기문명도 강과 상관없다. 관개수로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는 황하, 장강문명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고대 중원은 로마시대 게르만족 지역과 마찬가지로 정글이었다. 철기를 쓰지 않으면 대규모 삼림벌채가 불가능하다. 황하는 건천이라 관개수로가 없다. 그러므로 유독 황하주변에만 도시가 있다는 것은 낭설이다.
◎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관개수로 중심 문명이다.
진시황의 병마용이 최초로 문명의 증거가 된다. 그런데 시기가 너무 늦다. 중국문명은 BC 1000년 무렵 춘추시대 말기에 대규모 동원전쟁이 촉발되면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도 같은 시대에 일어났다. 그 이전에도 뭔가 있었겠지만 의미는 없다. BC 1천년 전후로 코카서스 주변에서 아리안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아리안족이 인더스 문명을 말살하고 인도를 접수하고 서쪽으로 쳐들어가서 이란을 일으켰다. 이 시기에 중국에 수레, 금속기, 벽돌과 기와, 직조술, 문자가 전파되면서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 문명의 증거 중에 중국에서만 독특하게 발달한 것은 없다. 만약 있었다면 중국에서 주변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중국에서 주변으로 전파된 증거는 없고, 반대로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증거는 많다. 서쪽에서 먼저 생긴 것이 BC 16세기 경부터 점차 중국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 시기에 황하주변의 삼림이 벌채된 거다. 5천년 전에 중국문명이 일어났고 그 시대에 우리나라는 빗살무기 토기나 빚고 있었던 것처럼 기술해놓은 교과서 주장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이건 뭐 치매가 아닌가? 그러므로 환빠들의 헛소리도 마찬가지다. 한사군이 어디에 있다는둥 떠드는게 다 개소리다. 중국이 옆집인데 말이다. 625전쟁때 중공군과 싸우는 마음으로 역사를 논하면 곤란하다. 그때는 봉건시대이므로 변방사람이 와서 인사만 하면 중국에 끼워준다. 국가개념이 지금과 다른 것이다. 중국과 한반도의 구분은 원제국 이후 정착된 개념이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만 해도 중국이라고 써놓고 괄호열고 강남이라고 써놨다. 중국의 한족이라는 민족은 유전적 근거가 없다. 사실 민족은 혈통과 상관없다. 단지 의사소통 단위일 뿐이다. 같은 중국인끼리도 말이 안 통한다. 고조선시대에 한반도인이 중국인을 만났다면 쟤들은 중국인이고, 우리는 조선인이라는 식의 관념은 당연히 없었다. 그냥 천하가 있고 고조선도 그 천하의 일부다. 이렇게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중국에 흡수되지 않은 것이 놀랍다. 이는 위진남북조 이후 북방유목민이 북경일대 연운 16주를 장악하고 중원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몽골일대와 한반도와 중원이 솥발처럼 서로 견제했다. 무엇인가? 북방이민족이 황토지대를 털어먹는 정복왕조가 출현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경계가 유의미해진 것이며 이는 중국 한왕조가 망한 위진남북조 이후다.
◎ 틀린생각..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에 고대문명이 있었다.
오리엔트 문명은 관개수로가 발달한 결과로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까 선진문명으로 쳐주는 것일 뿐, 근래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로 보면 오리엔트문명도 상당부분은 다윈의 진화론에 따른 인종주의 영향 판타지다. 고대문명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며 단지 오리엔트지역은 관개수로가 남아있는 덕분에 유명해진 거다. 고대문명 제 2기라 할 지중해 문명, 그리스 문명, 로마문명, 황화 및 장강문명은 별도로 구분해야 한다. 세계 4대문명은 확실히 가짜고, 세계 3대문명도 가짜다. 하나의 오리엔트 광역 문명권이 있었으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광역 문명권이다. 다른 지역도 발굴해보면 뭔가 잔뜩 나온다.
◎ 틀린 생각 – 생물의 진화처럼 나일강 문명이 진화해서 근대문명이 되었다.
단지 그곳에 관개수로가 없고 큰 성벽이 없어서 안 쳐줄 뿐이다. 문제는 진화론이다. 동물이 진화하듯 문명이 진화한다는 착각 때문에 황하문명 및 세계 4대문명이라는 판타지가 생긴 것이다. 문명은 복제된다. 구조론의 복제원리에 의해 문명은 쾌속으로 전파되며 단지 큰 강이 없는 지역은 관개수로가 없으므로 전파가 안 되는 거다. 중국문명은 금속기의 발달로 대규모 삼림벌채가 일어난 후 국경이 무너지며 일어났다.
◎ 고조선은 고대문명 제 2기 황하장강문명에 속한다.
기와집이 일반적으로 보급된 시대를 의미있는 문명의 시발점으로 본다면 제환공이 활약하던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임금이 초가집에 살던 갑골문자 시대는 문명이라고 할 수 없다. 문명의 맹아기는 된다. 황하장강문명은 판타지이며 아리안족의 대이동 이후 수레, 금속기, 벽돌, 직조술 등을 갖춘 오리엔트문명이 황토지대로 유입되면서 황하장강유역의 삼림이 벌채되어 비로소 중원이 발생한 것이다. 춘추시대다. 고립된 수십개 문화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주무왕이 은을 토벌한 이후 봉건시대를 연 것은 당시만 해도 직접통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황하하류 일대가 숲이었음을 의미한다. 게르만의 봉건정치도 숲 때문이다. ◎ 고대문명 1기 – 관개수로 중심의 나일강,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실제로는 하나의 광역 오리엔트 문명권이며 관개수로가 없는 지역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지 이 지역에만 문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 고대문명 2기 – BC 1600년경 코카서스 주변에서 시작된 아리안족의 대이동 이후 지중해, 그리스, 로마, 시베리아, 중국 등으로 바퀴살 수레, 직조술, 금속기, 벽돌, 기와집이 전해지고 삼림이 벌채되었다. ◎ 한반도의 사정 – 문명은 북방 기마민족 이동로를 따라 전파되므로 고대문명 2기에 황하와 평양에서 동시에 문명이 일어났다. 북방민족의 정복이 시작된 남북조시대 이전에 중국과 한반도 구분은 의미가 없다. 중국사에는 두 개의 구조론의 축이 있습니다. 북방이민족을 빼고 보면 삼국지와 같은 위, 촉, 오 세 나라가 솥발처럼 내부로 균형이 되고, 북방이민족을 포함시키면 한반도까지 개입시켜야 솥발처럼 균형이 되는데, 한반도 민족의 독립적 위상이 유의미해진 시기는 위진남북조 이래 북방이민족에 의한 정복왕조가 연거푸 출현하면서, 북경지역 연운 16주를 이민족이 차지하게 되어, 서쪽의 흉노와 동쪽의 고구려 그리고 중원의 한족으로 구조론의 축과 대칭이 만들어지면서부터입니다.
|
정확함다.
고대 아시아에 문명이 황하문명 하나일리가 없음.
중국에는 수십개의 문명이 있었는데 황하 하나만 열심히 발굴한거임.
사실은 그것도 틀렸고 그 시절에는 동네 실개천마다 문명은 다 있었음.
문명이 없으면 강이 아님.
파보면 다 나옴.
파보지도 않고 없다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거임.
파보고 안 나오면 없는 거지만 파보기 전에는 당연히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거임.
같은 기후와 식생을 공유한 땅에는 같은 문명이 전파되는게 당연한거임.
예전에는 한반도도 중국이었고
황하문명이 있으면 평양문명도 있고 한강 문명도 있고 아무튼 유명한 강가마다 문명이 다 있는게 당연히 맞는거임.
상식적으로 한강처럼 끝내주는 곳에 토착민이 없었다는게 말이 안 됨.
북경과 위도도 비슷한데에다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반도임.
북경이랑 평양이랑 다른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는
북경에 사는 호랑이랑 평양에 사는 호랑이가 족보가 다르다는 것과 같은 얘기임.
서울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반복되는 얘기지만
북경과 요동반도 산둥반도 만주 그리고 한반도 전부 하나의 문화를 공유했던 거고
그 중 한반도는 반도의 이점을 살려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음.
중국은 원래 없고 중국은 1949년 마오쩌둥이 세운 나라임.
후대에 정립된 민족관과 세계인식의 틀이 자연발생적인 고대사의 흐름을 사유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음.
환빠가 되라는 건 아니지만 환빠가 무서워서 일부러 그 반대편에 설 필요는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