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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612 vote 0 2014.11.23 (23:42:02)

 

    깨달음의 문제


    깨달음의 문제는 인간이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고, 언제라도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수동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느냐 능동적으로 환경을 바꿔가느냐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하고 인간은 환경을 바꾼다. 날씨가 추우면 동물은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지만, 인간은 집을 짓고 옷을 입고 불을 피운다. 환경과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이 우위에 서는 것이다.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무수히 실패한다. 인간이 더러는 실패하고 혹은 성공하는 중에서 환경을 이겨가는 것이 의미다. 환경에 패배하면 허무한 것이다. 그것은 죽음과 통하는 것이다.


    ◎ 인간은 환경에 지배당하기도 하고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 환경을 이겨가는 것만이 의미있다.


    깨달음은 의사결정의 관점에서 환경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의사결정 영역에서 환경적인 조건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개인적인 고통과 기쁨이요, 두번째는 집단적인 고통과 기쁨이다.


    여기서 소승과 대승의 가는 길이 갈라진다. 소승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대승은 개인이 집단을 대표하는 것이다. 원시불교에서 깨달음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 개인의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 집단의 문제는 대표되어야 한다.


    2500년 전 석가의 활동시기만 해도 인간에게 집단의 문제는 희미한 것이었다. 석가가 주목한 생노병사의 고는 개인의 문제다. 그러나 사회가 발달하자 개인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개인의 문제가 상당부분 집단의 스트레스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집단으로부터의 나쁜 소식이 개인을 타격하는 것이다. 인간은 집단이라는 거친 바다에 뜬 작은 배와 같다.


    집단이라는 파도가 개인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소외와 허무와 좌절은 집단으로부터 개인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문제해결은 의미가 없다는 거다. 자식 대에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깨달음을 얻어 문제를 해결해봤자 자식은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나아진 것이 없다. 그런데 집단의 경우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개인이 대표하는 것이다. 이건 다르다.


    빈부격차나 범죄나 부조리와 같은 사회의 내부문제는 집단의 의사결정구조에 맡기면 된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개인이 피해갈 수 없는 깨달음의 문제는 따로 있다. 집단과의 관계다.


    개인이 처음 자기만 알다가 차츰 가족, 부족, 국가, 세계를 발견해 가는 정도에 따라서 집단과 개인의 관계가 달라진다. 대승의 문제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설정 문제다. 역시 일대일이 되어야 한다.


    의사결정에 있어서 개인이 집단을 대표해야 한다.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바르게 설정할 때 개인의 문제도 해결된다. 그것이 신과의 일대일 개념이다. 구태여 집단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다.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에서 개인이 노예의 위치에 서는가 혹은 선비의 위치에 서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 빈부격차나 범죄나 부조리는 평행선을 그리며 변증법적 대결구도를 이루어 계속가는 거다.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가 바로잡히면 오늘 되든 내일 되든 문제는 해결되고 또 같은 비례로 계속 새롭게 제기된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될 때 하나의 문제가 발굴된다.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진보주의는 새롭게 문제삼을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수주의는 문제를 회피할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문제를 문제삼는 것이므로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 그어진 전선이다. 문제는 새롭게 제기되고 또 해결되고 하는 상호작용 과정에서 점차 개인이 집단에 대해 우위에 선다. 노예가 해방되어 선비되는 흐름을 이어간다.


    중요한 것은 개인과 집단의 팽팽한 대결구조 자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나 음악이나 문학이나 패션이나 디자인과 같은 문화적 양식은 그 긴장상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과 집단 사이의 긴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므로 한건주의 씩으로 문제해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팽팽한 대결의 전선 자체를 현악기의 현으로 삼아 연주하며 즐기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문제라는 적군의 침입을 힘겹게 방어하는 자세로는 곤란하다. 세상이라는 무대를 커다란 하나의 악기로 보고 인생이라는 악보를 연주할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너의 악보는 준비되어야 한다.


    ◎ 한건주의씩 문제해결 자세로는 영원히 답이 없다.
    ◎ 문제라는 적군을 제거할 것이 아니라 악보로 보고 연주해야 한다.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 깨달음은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집이 둘 있으면 두 집 사이에 길이 하나 있다. 이때 길 하나에 집 둘이 대칭을 이루는 구조로 둘은 연동되어 있다.


    악기가 악기인 이유는 서로 연동되기 때문이다. 하나가 낮은 음으로 결정되면 다른 하나는 높은 음으로 결정된다. 그 중 하나를 결정하면 다른 것도 이미 결정된 것이다. 상대성이 성립한다.


    두 남자 사이에 한 여자가 있다. 성춘향이 이몽룡을 선택했다면 변학도는 보나마나 선택되지 않은 것이다. 이몽룡이 선택된 사실이 확정된 마당에 변학도의 사정은 구태여 물어볼 필요가 없는 거다.


    독일팀이 우승했다면 브라질 팀은 진 거다. 이는 세상을 움직여 가는 마이너스 원리다. CIA가 홍체인식장치라며 특수한 장치를 만들었다. 눈동자를 갖다 대면 0.1초간 빈라덴 얼굴이 뜨게 되어 있다.


    용의자는 자신이 테스트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순간적으로 영상이 지나가는데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뇌의 반응을 체크한다. 그 순간에 경동맥의 혈류량이 변동하면 그는 테러용의자인 것이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반응하지 않았다는게 강력한 단서가 된다. 구조론이든 상대성이론이든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이해가 안 된다는 사실이 강력한 단서가 된다.


    이해가 안 된다는 사실은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 메커니즘을 OX단계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의미다. 초보운전자는 백미러를 통해 쓸데없이 뒤를 본다. 뒷차가 내차보다 빠르면 피해갈 거다.


    느리면 거리가 멀어지므로 뒷차를 신경쓸 이유가 없다. 뒷차를 볼 때는 차선변경할 때 뿐이다. 여기서 대칭은? 차선변경을 중심으로 작동된다. 이 차선은 내가 장악한 차선이다 하는 인식이 필요하다.


    차선을 중심으로 안과 밖의 대칭이 성립하는 것이다. 차와 차의 대칭이 아니라 차선과 차선의 대칭이라는 점을 초보운전자는 인식해야 한다. 마술사에게 속는 사람은 대칭의 성립지점을 보지 못한다.


    마술사의 안과 바깥의 경계를 살펴야 한다. 어디가 마술사 안이고 밖인지 그 경계를 찾으면 된다. 마술사가 숨긴 열쇠가 없는지 확인하는 소동을 끝내고 악수하는 순간 손이 교차되면서 열쇠를 건넨다.


    마술사의 손을 보는 것은 마술사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선을 보는게 아니다. 반드시 대칭은 안과 바깥의 경계선에 뜬다. 깨달음은 내가 알아야 할 부분과 그 바깥사이에 대칭되는 경계를 긋는 것이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다. 한 그루의 나무는 나의 나무다. 반대편의 나무는 신의 나무다. 나의 나무에는 나와 나의 가족과 소유와 추억과 환경 따위가 들어온다.


    나와 엮여 있는 모든 것이 나의 대승의 팀에 들어온다. 반대편의 나무는 신의 나무다. 신의 나무에는 진리와 환경과 문명과 역사와 자연과 사회와 인류와 진보와 우주와 천하라는 가지들이 들어차 있다.


    두 나무가 만나서 또다른 길을 만든다. 나무는 길이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길은 집에서 끝난다. 나무는 가지로 끝난다. 두 나무의 사이에 또다른 길이 있다. 그것은 아기가 자라고 있는 낳음의 자궁이다.


    그 자궁속에서 의사결정모형이라는 나무를 키워가는게 정답이다. 그것이 신과의 일대일이다. 그 두 그루 나무 중에서 하나는 나의 책임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에 대칭되어 연동된 신의 나무다.


    신과의 일대일에서 여기가 끝임을 아는게 지혜다. 혹시 모를 뒷차의 공격은 없다. 내 할 일은 여기까지다 하는 명확한 경계를 긋는 것이다. 그럴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죽음은 완전히 극복된다.


    인생은 그 아기를 키워가는 과정이다. 인생에는 두 가지 임무가 있다. 첫째는 개인전이고 둘째는 단체전이다. 개인은 생노병사의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다. 단체전은 팀플레이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동료가 패스를 잘하든 못하든 신경쓸 이유가 없다. 단지 내가 할 일만 정확하게 알면 된다. 나무는 많은 가지를 가진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부러지든 말든 상관없다. 그것은 확률 속에 용해된다.


    이 순간 나의 판단이 명확하면 되는 것이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신경쓸 필요가 없다. 결과 역시 확률의 담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동료가 잘했든 잘못했든 신경쓸 이유가 없다. 역시 확률이 용해한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으면 된다. 인간이 무너지는 지점은 죽음, 소외, 이별, 고통, 허무다. 극복하면 된다. 최상층부의 의사결정구조를 건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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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사이에는 길이 있고, 길 끝에는 집이 있습니다. 길은 모두 연결되어 큰 나무를 만듭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는 그 길의 끝단, 더 나아갈 길이 없는 막다른 장소입니다. 그곳은 길이지만 머무르는 집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얻어야 할 것은 커다란 만남 곧 신과의 일대일입니다. 그 나무 한 그루는 나의 나무이며 다른 한 그루는 신의 나무입니다. 나는 나의 나무만 책임지면 됩니다. 왜냐하면 연동되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결정될 때 다른 하나는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내가 나의 소유와 가족과 국가와 추억과 이념을 키워갈 때 반대쪽에서 진리와 역사와 자연과 환경과 문명과 인류와 세상도 같은 비례로 자라납니다. 둘은 가지 끝에서 만나 커다란 자궁을 만들게 됩니다. 거기서 의사결정구조라는 아기가 자라는 것입니다. 



[레벨:7]새벽이슬2

2014.11.25 (15:07:27)

 밑줄 쫙-"의사 결정 구조라는 아기를 키워가는 것이 인생이다."
일신우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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