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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691 vote 0 2014.10.05 (22:35:19)

   

    검색해 봤다. 지적설계 개념은 창조론이 진화론에 맞서 교과서에 반영되게 할 요량으로 용어를 좀 ‘있어보이도록’ 바꾼 것이라고 한다.


    말하려는 바 요지는 ‘언어 안에 답이 있다’는 거다. 진화론에 대해서는 힘들게 화석증거 들이댈 필요없이 국어사전만 잘 찾아봐도 명확한 진리에 도달한다. 언어를 엄격하게 사용하는게 수학이다. 수학의 방법을 쓰면 된다.


    ‘첫 번째 패는 바꿔라’ 했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대칭원리에 의해 작동하고, 첫 번째 대칭은 밖≫안의 대칭이다. 밖이므로 내부와 대칭되지 않는다. 밖에서 안으로 에너지가 들어오는 순간에 대칭이 성립하고 사멸한다.


    대칭이 사멸하므로 구조 안에는 대칭되는 상대가 없다. 밖은 안에서 제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절대성이 성립한다. 야구공이 방망이에 맞는다면 첫 번째 대칭은 야구공과 방망이의 대칭이다. 대칭상태의 지속시간은 짧다.


    두 발로 걷는다고 치자. 내가 처음 발로 디딘 땅은 저 뒤에 있다. 대칭상태가 유지되지 않으므로 첫 번째 패는 들여다 볼 것도 없이 무조권 바꿔야 한다. 어떤 사건의 시작과 끝단은 상대성이 없으므로 통제되지 않는다.


    ◎ 에너지를 주는 바깥으로부터의 제 1원인은 에너지를 주고 떠난다.
    ◎ 떠나지 않으면 작용반작용에 의해 에너지가 회수되므로 사건은 실패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도달하려면 사건의 중간부분을 양 극단으로 몰고가면 된다. 그것이 수학이다. 수학에 반대하여 반수학을 만든다든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수학은 어떤 것의 처음 생성되는 부분만 다루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반론할 수 없다. 구조론은 수학과 마찬가지로 비대칭적 영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건의 시작부분과 종결부분이 그렇다. 탄생과 죽음이다. 결혼과 취직과 친구는 상대적이다.


    상대성 영역은 대체재가 있으므로 그 선택을 버리게 하고 다른 선택을 주문할 수 있다. 결혼을 잘못하거나 취직을 잘못하거나 사업을 잘못 벌이거나 혹은 진학을 잘못하거나 할 수 있다. 그러나 탄생과 죽음만은 예외다.


    장애인도 잘못 태어난거 아니다. 지능이 낮다거나 혹은 흑인으로 태어났다거나 혹은 후진국에 태어났다거나 혹은 여성으로 태어났다거나 혹은 못생겼다고 해서 잘못태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무조건 잘 태어난 것이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죽은 것은 죽은 것이다. 모든 죽음은 공평하며 더 나은 죽음 같은건 없다. 예쁘게 죽거나, 화려하게 죽거나, 영광되게 죽는건 없다. 삶과 죽음은 비교하여 평가될 수 없다.


    이렇듯 선택이 가능하지 않은 영역은 점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다. 못생기게 태어난 네 잘못이지 하거나, 한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지 하는 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푸념으로 할 수는 있으나 신분차별로 할 수 없다.


    진화도 이와 같다. 진화는 처음 탄생하는 부분을 다루므로 절대로 반론할 수 없다. 다윈이 공격받는 이유도 논리를 잘못 전개하여 탄생이후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본질인 유전자로 진화를 설명하면 절대 공격받지 않는다.


    아기의 탄생, 우주의 탄생, 조직의 탄생과 같은 어떤 탄생지점은 반론불가 영역이다. 이 영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아기가 탄생한게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해도, 하늘에서 탄생해서 땅에 떨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전혀 반론한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죽음, 우주의 죽음, 조직의 종말, 생물의 사멸은 반론불가의 절대영역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도달하려면 포지션을 바꾸어 사건을 초기단계나 최후단계로 가져오면 된다.


    언어적으로 명백한 답이 찾아진다. 뭐든 애매한 것은 포지션을 옮겨서 논하면 된다. 게임의 진행단계는 반론이 가능하므로, 게임 이전의 룰만 다루면 된다. 모든 착오는 게임의 진행과 게임의 룰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창조론에 적용해 보자. 창조론이 무언가를 주장한다면 그 또한 진화론의 일설에 불과하다. 사실 창조론이라는 것은 없다. 창조설이 맞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창조설을 주장한 사람이 역사적으로 없다.


    창조설 누가 주장했지? 누구도 주장하지 않았다. 만약 진화론에 의구심이 든다면 '창조적 진화론' 하는 식으로 만들면 된다. 그런데 그걸 만들려고 시도한 사람이 아직 없다. 비슷한 것으로 지적설계를 말하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그걸 이론이라고 내세울 만큼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한다. 그거 원래 안 된다. 설계 개념은 쉽게 컴퓨터 개념을 빌면 되는데 '지'적이라는 난관에 막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지' 또한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지적설계를 이론으로 격상시키려면, '이단계 진화론'으로 포장해야 맞다. 설계자의 진화, 생물권의 진화로 2단계다. 그런데 설계와 시공도 둘이다. 설계도의 진화와 시공과정의 진화다. 이러면 3단계, 4단계로 끝이 없다.


    무한단계 진화론이다. 이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안 맞을 뿐 아니라, 쓸데없이 단계를 여러번 거치는 바보짓을 되풀이하는 즉 하느님을 모욕하는 주장이 된다. 그런데 하느님이 바보라서 무의미한 동어반복을 저지르겠는가?


    결정적으로 설계 개념은 시공 개념과 충돌한다. 설계가는 시공을 담당하는 건축가가 어떤 자재를 사용할 것인지 미리 지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충돌을 막으려면 시공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설계를 해야 한다.


    무리하게 허공에다 집을 지으라고 설계할 수 없다. 사차원의 집을 설계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제멋대로 막 가다가는 목수 아저씨들에게 맞는 수가 있다. 그런데 이를 수긍하면 설계는 애초에 불필요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 시공할 수 없는 것은 설계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설계도면 없이도 시공은 가능하다.


    지적설계 주장이 스스로 진화하여 ‘지적설계 불필요’ 주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시공할 수 없는 도면은, 설계할 수 없다는 법칙은 역으로 설계없는 시공은 가능하다로 바뀐다. 이걸로 프로그래머와 기획자가 많이 싸운다.


    그런데 프로그래머 승이다. 시공자 승이다. 이는 구조론으로 볼 때 초보적인 단계에서 일의성의 법칙에 의해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와 일치한다는 거다. 즉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구동하려면 OS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OS를 구동할 뭐가 있어야 하고, 그 뭐를 구동할 뭐가 있어야 하고, 이렇게 계속 궁구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는 하드웨어가 구동한다는 거다. 최초 원시단계는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겸하게 되어 있는게 반도체다.


    생물도 최초 단계는 DNA가 세포의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지적설계설은 지적설계불필요설로 진화한다. 이 원리는 다른 모든 분야에도 적용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적설계 주장은 지적설계 불필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언어 안에 답이 있다. 그 어떤 기특한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을 외계인의 언어로는 하지 않는다. 반드시 지구인이 언어를 써야 한다. 즉 의사소통이라는 관문에 딱 걸리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언어가 절대의 장벽이다.


    인간이 아메바와 같은 저급한 단계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식은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벌거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탄생의 순간은 성스러운 것이다.


    그것을 흉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내가 과거에 똥이나 싸는 아기였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 진화의 부정은 자신의 탄생과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 역시 아기에서 어른으로 진화한 것이다. 생장도 진화의 일부다.


    진화는 우주의 진화, 물질의 진화, 조직의 발달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존재=진화이며 진화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필연 존재화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모체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생명은 없고, 존재화를 거치지 않는 존재는 없으며, 진화를 거치지 않는 것은 없고, 수학을 누를 수 있는 과학은 없고, 의사소통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언어는 없다. 모든 존재는 관문을 가진다.


    그 어떤 것은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 진화의 진짜 의미는 유전자에 의해 생태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을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이는 외형을 문제삼은 것이다.


    진화론을 시비하는 주장은 대개 종 개념의 허술함을 문제삼는 것이다. 공격을 안 당하려면 인과율에서 최초원인에 해당하는 부분을 비빌언억으로 삼아야 한다. 자연선택이나 생존경쟁은 안방에서 너무 많이 나간 개념이다.


    생물의 진화 뿐 아니라 모든 것은 진화로 확대하여 진리의 보편성을 얻어야 믿고 의지할 큰 성채가 되어주는 것이다. 탄생은 누구라도 축하해야 하며 죽음은 누구라도 슬퍼해야 한다. 일베충은 인간이 아니므로 해당없지만.


    지적설계 주장하는 사람이 빠지는 함정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인간은 기계보다 우월하고 복잡해야 하며, 그러므로 생물보다 복잡한 고차원적 존재가 보다 단순한 생물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사위의 착각이다.


    간단하다. 주사위를 두 번 던지면 된다. 유전자를 복제하면 복잡도가 증가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양자적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핵과 전자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원소기호는 많다. 분자는 더 많다.


    단계를 건너뛸때마다 보통 5배 복잡해지며 구조론적으로는 최대 3125배까지 복잡해지는 수가 있다. 더 이상은 복잡해지지 않는다. 바둑을 세 명이 두거나 네 명이 두면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여기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 계에 일을 투입하면 시공간변수에 의해 복잡도는 증가하다가 감소한다.
    ◎ 복잡도가 무조건 감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지금은 흑과 백이 바둑을 두지만 셋을 추가하여 흑, 백, 황, 적, 청이 대결하는 바둑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색깔을 투입하면 안 된다. 분명한 구조적 한계가 있다. 심심하면 흑백적 3인바둑 만들어 보시라.

    

    옛날에 입체 테트리스도 있었다. 바둑도 입체바둑으로 가서 위와 아래에 두는 3D로 구현되게 룰을 정할 수 있다. 정말 골때리는 바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복잡성은 한계가 있다. 구조론은 모든 문제에 명확한 해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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