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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8118 vote 0 2014.07.30 (23:56:55)

http://media.daum.net/series/112881/newsview?seriesId=112881&newsId=20140730091414240 (한경비즈니스, 김경집의 인문학속으로)


    “백이는 명예 때문에 수양산에서 죽었고, 도척은 물욕 때문에 동릉산에서 죽었다. 두 사람은 천성대로 살지 않고 자기 목숨을 해쳤다는 점에서 같다. 어찌 백이가 옳고 도척이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스스로 자연스럽게 보지 않고 남에게 얽매여 바라보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에게 사로잡혀 만족하는 자가 있다. 남의 판단기준으로 흡족해할 뿐 스스로는 만족을 얻지 못한다. 남의 즐거움으로 즐거워할 뿐 스스로의 참된 즐거움을 모르는 자다.”


    장자의 관점은 자신의 기준으로 본다는 점에서 구조론의 1인칭 주체적 관점과 가깝다. 그러나 동적균형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실패다. 말이 왔다갔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자의 시선은 상대주의다. 상대주의로 다른 사람의 실패를 지적할 수 있으나, 자신의 주장을 유쾌하게 개진할 수는 없다. 북채가 북가죽과 만나 큰 소리를 낼 때와 같은 전율하는 즐거움에 이를 수 없다.


    장자의 말이 맞다. 남의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참된 즐거움이 무엇인지 장자는 설명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육체적 쾌락주의를 주장하거나 불로장수에 집착하는 정도다. 이것이 만인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는 매력적인 가치는 아니다.


    장자의 텍스트는 언제나 용두사미로 끝난다. 천하를 아우르는 거창한 시선으로 시작하지만, 결말은 남의 험담이나 하는 뒷방 늙은이의 행동이다.


    문제는 자신의 판단이냐 남의 판단이냐다. 1인칭 주체적 관점은 자신의 판단을 요구한다. 욕망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렇다면? 내면의 자연스러움을 따라야 한다. 과연 그럴까?


    집단 안에서는 때로 욕망이 도리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집단은 움직여 나아가는 동적인 존재다. 살아서 펄쩍펄쩍 뛰는 존재다. 집단의 움직임은 치고나가는 방향성을 가진다. 집단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이 흐를 때는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좋고, 나무가 자랄 때는 무럭무럭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남의 음악에는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이 맞다. 남의 페북에는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이 맞다. 남의 시선 안에 있으면서도 그 시선을 거스르지 않으니 자연스럽다.


    군중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역방향으로 거슬러 가려고 하면 안 된다. 맞은편에서 몰려오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번잡한 종로 네거리에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을 때 맞은편에서 한꺼번에 몰려오는 군중은 피해가는 것이 맞다. 행렬의 선두에 서 있으면 편하다. 몸을 부딪힐 일이 없다. 군중의 가운데 끼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부딪히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떠밀리게 된다. 자연스럽지 않다.


    군중의 맨 앞에 서는 방법은? 리더가 되는 것이다. 리더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1인칭 주체적 관점이다. 배가 고프면 먹는게 자연스럽다. 똥이 마려운데도 억지로 참는다면 자연스럽지 않다. 인간의 신체도 자연의 일부다. 자연의 명령은 따르는게 자연스럽다. 개인은 몸의 명령을 따르는게 자연스럽다. 성욕이든 식욕이든 억지로 참는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마찬가지로 집단 안에서는 집단의 명령을 따르는게 자연스럽다. 데이트 하는 연인이라면 미소를 지어서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집단의 리더가 되고자 하는 욕망, 행렬의 선두에 서고자 하는 욕망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똥이 마려울 때 화장실에 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사회의 일부다. 그러므로 사회의 마음 역시 자연의 마음이다. 집단 안에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사회라는 큰 북을 울려서 멋진 소리를 내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의 마음이다.


    사회는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다. 힘차게 나아가는 존재다. 그것이 진보다. 진보가 만들어내는 동적균형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꽃이 피고 물 흐르는 자연의 노래에 동조하듯이, 진보의 노래에도 동조하여야 한다. 추임새를 넣어주어야 한다. 명성을 탐해야 한다.


    문제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다. 명성을 탐하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집단 안에서 일관된 포지션을 갖지 못하면 집단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게 된다. 쓸데없이 집단의 주목을 끌다가 마침내 집단의 횡포에 휘둘리게 된다. 개인이 다치게 된다. 변희재가 하는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여옥의 코스를 밟고 있다.


    종로 네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면 맞은편에서 군중이 몰려온다. 피하려다가 도리어 부딪힌다. 피하지 않고 전봇대처럼 가만이 있으면? 군중의 난폭한 손길에 떠밀린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도 망하고, 남의 시선을 무시해도 망한다. 어느 쪽이든 망한다.


    다만 행렬의 선두에 서 있으면 부딪힐 일이 없다. 중간에 끼면 이래도 불편하고 저래도 불편하다. 모두가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팀플레이를 하는 수 밖에 없다. 팀플레이가 가능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개혁하는 수 밖에 없다.


    장자는 욕망을 비판하고 있다. 성욕이나 식욕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장자가 비판하는 욕망은 집단 안에서의 출세욕, 명예욕이다. 장자의 말이 맞다. 명성을 얻으려고 하다가 정치게임에 휘말려서 몸을 다치게 된다. 장자의 대안은 개인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개인의 즐거움 또한 욕망이다. 일신의 편안함도 부자의 사치일 뿐 장자네 집 하인들은 노동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장자의 관점은 상대주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다. 리더는 절대적이다. 상대성은 집단의 졸개들에게만 적용된다. 산의 기슭은 상대적이나 산의 정상은 절대적이다. 기슭은 위에서 보면 낮고 아래에서 보면 높다. 그래서 상대적이다. 정상은 비교대상이 없다. 절대적이다. 정상의 마음을 가진 자 만이 진정으로 편안할 수 있다. 군중을 이끄는 1인칭 주체적 관점이다. 스스로 신호등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유응지에게 왜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느냐고 따지자 유응지는 곧 신발을 벗어 그 사람에게 주었다. 얼마 후 그 사람이 자기의 진짜 신발을 찾았다며 가져간 신발을 들고 오자, 유응지는 이미 내가 당신에게 신발을 주었으니 그 신발은 내 신발이 아니라며 그 신발을 돌려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심인사에게 왜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느냐고 따지자 심인사는 웃으며 신발을 건네줬다. 그 사람이 나중에 잃었던 자신의 신발을 찾게 되자 가져갔던 신발을 돌려보냈다. 심인사는 웃으며 그 신발을 받았다.”


    소동파는 이렇게 평했다.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심인사 같아야지 유응지처럼 해서는 안 된다. 유응지가 신발이 내것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자기 마음속에 기준선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자연스러울까? 유응지는 신발을 돌려받을 마음이 없음을 보여 리더의 위치를 차지했다. 유응지는 관대한 양반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졸개들은 더 이상 유응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심인사는 리더노릇도 귀찮아서 상대의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리더라면 유승지처럼 하는게 옳다. 소동파는 동적균형을 판단하지 못했다. 동적균형은 장기전이다. 단기적으로는 자신을 편하게 하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집단을 편하게 해야 한다. 마음 속에 기준선을 긋고 있는 사람은 소동파다. 장기적으로는 집단의 흐름을 따르는 유응지가 옳고, 단기적으로는 내면의 흐름을 따르는 심인사가 옳지만 둘을 비교한 객관적 3인칭 관점의 소동파는 확실히 틀렸다.


    "나라고 아내가 죽은 뒤에 어찌 슬프지 않았겠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태어나기 전 아내의 삶이란 원래 없었던 것 아닌가.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거대한 방에 누워 있는데, 내가 소리를 질러가며 울고불고한다면 그건 하늘의 섭리를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곡을 그친 것이네."


    장자는 아내가 죽었는데도 웃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위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상황이면 웃지 말아야 한다. 죽음 앞에서의 웃음은 오해를 낳고, 남의 오해를 받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다. 장자의 웃음은 제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다. 제자들 앞에서 웃음을 통한 장자의 가르침은 자연스럽지만, 정치판에서 저렇게 했다면 목이 달아난다.


    1인칭 주체적 관점은 걸림이 없는 자연스러움을 따른다. 그러나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집단 안에서 개인의 걸림없는 행동은 도리어 커다란 걸림을 낳는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맞은 편에서 군중이 몰려올 때 자기 뜻대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행동은 매우 걸치적거리는 행동이다.


    동적균형이 정답이다. 그것은 자연의 흐름, 조직의 발전, 문명의 진보, 흐르는 강물, 연주되는 음악, 달리는 말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이다. 자연을 따르고, 진보를 따르고, 거기에 장단을 맞추며 그 에너지의 흐름 안에서 전율하기다. 그 흐르는 에너지에 빨대를 꽂고, 링크를 걸고 내 안의 전구에 불을 켜기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동적상태다. 동은 움직인다. 움직임은 에너지를 가진다. 그 에너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문명이라는 큰 흐름에 맞서지 말아야 한다. 똥이 마려울 때는 참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즐거움은 약동하는 자연의 에너지와 하나가 되는데 있다. 1인칭 주체적 관점으로 그 에너지를 연주하라.


   


[레벨:5]msc

2014.07.31 (09:19:33)

자연스러운,,,,,,다시,,,리더 목표를,,,향해,,,,,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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