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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236 vote 0 2013.09.11 (22:40:01)

 

    소유나 존재냐


    당신은 누구인가? 자기소개를 하라면 아시아인들은 부모 직업을 말한다고 한다. 누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반면 서구인들은 자기 취미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취미는 누가 물어봤고?


    하긴 자기소개이니 취미를 말하는게 맞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라고 한다. 우리집, 우리아빠, 우리가족, 우리나라다. 자기소개가 우리소개다. 중국인이나 일본인도 ‘우리’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동양인과 서구인을 비교하되, 서구인은 소유지향적이고 동양인은 존재지향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존재는 우리소개이고 소유는 자기소개이다. 둘 다 마뜩잖다.


    왜냐하면 우리소개의 우리는 자기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소개가 아니라 가족소개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 현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우리다. 마땅히 우리는 현장의 팀원들을 가리켜야 한다.


    필자가 말하려는건 서구의 자기소개, 동양의 부모소개가 아닌 우리소개다. 우리가족소개 말고 진짜 우리소개 말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우리인가? 팀이어야 우리다.


    구조론은 모르는 사람과 처음 대면하는 상황을 다룬다. 우연히 만난 모르는 사람 앞에서 돌연 자기소개를 한다면 이상하다. ‘근데 님은 취미가 뭐에요?’ 이런 식의 취조라면 그건 더욱 곤란하다.


    ‘누가 물어봤냐고’도 문제지만 ‘그걸 왜 묻느냐고’도 문제다. 모르는 사람에게 질문하는건 이상하다. 부모가 자식을 꾸지람할 때는 물음표를 쓴다. ‘너 왜 그랬니?’ 하는 식이다. 이건 부당하다.


    이런 식의 취조는 상대방을 당황시킨다. 물어보지 않은 자기소개도 곤란하지만, 이유없는 자기소개의 강요도 역시 곤란하다. 왜 우리소개를 하지 않느냐 말이다. 모르는 사람과 만났을 때다.


    모른다는 전제로 말하면 곤란하다. 모르면 닥쳐야 한다. 말을 걸려면 잘 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어떻게 아느냐고? 우리인데 왜 모르나? 침묵하거나 아니면 그 공간 안에서 우리를 찾아내거다.


    한국식 인사는 ‘안녕하세요?’다. 안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말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안녕한지, 그렇지 않은지 묻는건 이상하다. 보통은 날씨 이야기로 말을 꺼낸다. ‘굿모닝’이라면 나쁘지 않다.


    자연주의자는 유리하다. 자연을 끌어들여 그 상황에서의 일시적인 우리를 성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교양있는 사람은 더욱 유리하다. 커피집이라면 커피의 종류에 대해서 아는게 있어야 한다.


    극장에 간다면 영화에 대해 아는게 있어야 한다. 음악은 언제나 좋은 도구가 된다. 여고생이 문학소녀가 되는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와 우리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좋은 도구다.


    그러나 이런건 작위적이다. 커피든, 영화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대화가 되는 사람과만 대화할 수 있다. 그 분위기에 걸맞는 그 공간에서만 꺼낼 수 있는 도구다. 진리를 알고 있어야 진짜다.


    신과 자연과 문명과 역사와 진보와 한 팀이어야 한다. 그렇게 그 상황에서의 우리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라도 YES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의 주인되어 초대하는 위치여야 한다.


    고유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존재다. 자기 소유를 내세워 말을 건다면 비참한 거다. ‘난 커피 좋아하는데 아가씨는 뭐 좋아해요?’ 이런 식의 70년대 대사를 친다면 곤란하다.


    남이면 이미 일은 틀려버렸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즉 소통은 실패다. ‘남에게 왜 말을 거냐고?’ ‘남이야 뭘 좋아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을 걸려면 서로가 공유하는 무언가를 발굴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서구인이 자신의 직업, 지위, 재산 따위 소유를 내세워 상대방에게 어필하려 든다고 비판하면서 동양을 추켜세운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의 덕담일 뿐 동양이 과연 그러하냐고.


    자신의 기호, 취미, 직업, 학력 따위는 소유에 해당한다. 이런 걸로 남에게 말을 걸면 안 된다. 동양인 역시 부모의 직업을 언급하고 배경을 과시하여 어필하려고 한다. 비참을 면할 수 없다.


    자기소개 곤란하고 부모소개 곤란하며 우리소개가 진짜다. 우리는 그 현장의 우리여야 한다. 진리소개, 문명소개, 역사소개, 자연소개, 진보소개가 답이다. 그것이 우리모두의 우리이기 때문이다.


    신을 소개해야 한다. 신이라는 개념은 원래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걸지 말라. 진리 안, 자연 안, 문명 안, 역사 안, 진보 안에서 우리모두는 아는 사람이 된다.


    모든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진리다. 진리를 모르는, 역사를 모르는, 자연을 모르는, 문명을 모르는, 진보를 모르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말 걸 수 없다. 교양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말을 걸 수 없다. 남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보수는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옛날에 안티조선을 표방하던 ‘우리모두’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우리의 의미를 바로 썼다.


    왜 우리소개를 해야하는가? 우리는 공간에 있지만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야구선수들은 남이지만 시합이 열릴 때 소집되어 갑자기 우리가 된다. 존재는 시간을 탄다.


    너와 나는 남이지만 호랑이가 나타나면 우리가 된다. 그러므로 호랑이가 나타난 사실을 알려야 한다. 너와 내가 공유하는 공간의 밀도를 끌어올리는 것이 있다. 공간을 뜨겁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따스한 햇볕일수도 있고, 불어오는 바람일 수도 있고, 새로 나온 상품일 수도 있다. 느슨해져 있는 너와 나의 사이를 긴밀하게 하는 무언가는 있다. 그것은 새롭게 소개되어야 한다.


    ###


    신은%2~2.JPG


    우리소개 하는 책이 나왔습니다. 안 물어본 자기소개나 하고 있는 클라라 때문에 지쳐있는 세상에, 시원한 우리소개 소식이 나왔습니다.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은 신이고 진리입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류, 신 앞에서 자기소개 하는 책이 서점가에 넘치는 시대입니다. 신을 소개해야 진짜입니다. 진리를 소개해야 진짜입니다. 세계무대로의 진출을 앞두고 있는 구조론 연구소의 큰 성과입니다. 책은 서점에 있습니다.

 

   


[레벨:11]큰바위

2013.09.12 (05:43:27)

책은 서점에 있습니다. 


당연한 말인데, 왠지 정감이 드네요. 


그 책이 있는 서점을 함 가보고 싶군요.



[레벨:11]비랑가

2013.09.12 (12:35:27)

우리아빠, 우리가족, 우리나라...

일본에서는 '나의아빠, 나의가족, 나의나라'라고 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와따시노치치, 와따시노가조쿠, 와따시노쿠니?)

[레벨:3]귤알갱이

2013.09.14 (03:32:27)

어쩜 매번 고난을 겪을 때마다 동렬님 글에서 풀고 가네요.
"너와 나는 남이지만 호랑이가 나타나면 우리가 된다. 그러므로 호랑이가 나타난 사실을 알려야 한다. 너와 내가 공유하는 공간의 밀도를 끌어올리는 것이 있다. 공간을 뜨겁게 하는 것이 있다."
호랑이가 나타난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말, 지금 제가 고민하던 일의 정확한 답이 됐네요. 고맙습니다.
[레벨:2]천재수빈

2013.09.14 (10:46:47)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만 하는사람들

말하기 싫은데도 계속 캐묻는 사람들...

근데 왜 말하기 싫을까? 어차피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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