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과 귀납 연역과 귀납이 있지만 구조론은 연역밖에 없다. 전기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지만 실제로는 마이너스 밖에 없다. 화살은 머리와 꼬리가 있지만 꼬리로 과녁을 맞추는 일은 없다. 비가역성이다. 모래시계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있는데, 아랫부분에 모래가 얼마나 쌓였는가는 윗부분에 모래가 얼마나 빠졌는가와 엮여있다. 하수는 위와 아래를 오가며 정신이 없지만 고수는 윗부분만 본다. 윗부분은 정확하다. 모래가 한 알도 없으면 땡이다. 아랫부분은 부정확하다. 아랫부분을 봐도 되긴 하지만 임시방편이고 정답은 아니다. 귀납해도 되지만 편의적인 임시조치이고 정답은 아니다. 초보자의 실수는 안 봐도 되는 쪽을 보다가 헷갈리는 것이다. 운전하다 보면 자기보다 빠른 차는 감시해야 하지만, 자기차보다 느린차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 추월하면 상황종료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둘이 있고 이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짝이 있다는 거다. 양모님이 미디어의 어느 부분을 귀납하고 있다면 반대쪽 어딘가에 연역할 부분이 숨어있다. 못 보고 있는 것이다.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다. 주는 사람만 보면 받는 사람까지 알 수 있다. 이때 한 쪽만 보면 된다. 어디를 볼 것인가? 무조건 주는 사람쪽을 보는 것이 정확하다. 주는 쪽은 투수고 받는 쪽은 포수다. 물론 포수도 잘 받아야 하지만 일단 투수가 잘 해야 한다. 주는 쪽에 권이 있다. 이러한 권리관계를 잘 따져야 돌고도는 상대성의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자전거 초보자는 기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고수가 되면 일반도로 출퇴근은 기어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기어가 필요한 이유는 다리힘만으로 자전거를 타려고 하기 때문이다. 산악 자전거를 타거나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을 한다면 기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자전거는 어차피 사람 다리힘으로 가는 것이다. 기어가 있다고 해서 어디서 숨은 힘이 나와주는 것은 아니다. 기어는 힘을 절약하도록 돕지만 그만큼 속도가 느려지므로 더하고 빼면 제로다. 아무런 에너지의 이득이 없다. 그런데 다리힘만으로 자전거를 타면 페달에 힘을 가할 수 없는 소실점이 생긴다. 페달이 그 각도가 되면 힘을 가할 수가 없어 자전거가 멈춘다. 그래서 기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고수는 팔힘을 쓰므로 에너지의 소실점이 없다. 어지간한 오르막은 팔힘으로 그냥 통과할 수 있다. 팔만 잘 써도 팔이 기어를 대신한다. 오르막을 만나면 손으로 핸들을 힘껏 당기면서 페달을 밟아주는 것이다. 사람의 신체 힘이 상부구조, 기어와 체인은 하부구조다. 상부구조만 보는게 연역이다.
옛날에는 자동차 운전을 하려면 간단한 정비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북한에서 운전면허 딸려면 고장수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필요없다. 한국에서는 그냥 보험회사 부르면 된다.
자동차의 성능이 딸리니 정비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스페어타이어도 필요없다. 산간오지 안 가면. 자동차 자체에 대비책이 있는 것이 상부구조이고, 상부구조가 불완전하면 하부구조가 동원된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배우다보면 그 소프트웨어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걸 알면 다 배운 거다. 특정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이유는 그 소프트웨어를 제대로 쓸줄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 다른 걸로 대체해도 된다. 그 많던 소프트웨어업체 다 망했다. 초보자는 귀납할 수 밖에 없는 사실과 맞닥들인다. 그러나 현재 귀납하고 있다면 맞은편 어딘가에 연역할 부분이 있다. 현재 내가 그 부분을 못보고 있다는 의미다. 이건 절대적이다. 나는 귀납으로 한 번 밀어보겠다는 식은 안 통한다. 귀납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귀납하는 거고 연역할 수 있으면 연역해야 한다. 연역할 수 없으므로 귀납하는 것이며 연역할 수 없는 이유는 어딘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점, 선, 각, 입체, 밀도로 확대된다. 그러나 전쟁 스트레스는 그 역으로 간다. 밀도, 입체, 각, 선, 점으로 간다. 전쟁은 보이지만 스트레스는 안 보인다. 그래서 못 보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이 있다. 국가간, 종교간, 세력간 갈등과 긴장상태가 분명히 존재한다. 2차대전의 전쟁 스트레스는 제국주의 때문에 발생했다. 제국주의는 석유 때문에 발생했다. 석유라는 본질을 도외시하고 전쟁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다는 식의 귀납적 추론은 실패다. 625도 사실은 석유 때문에 일어났다. 소련에 석유가 있고, 중국이 소련의 환심을 사서 석유를 얻어보려고 팔로군에 가담했던 수만명의 정예 조선군을 북으로 보내 전쟁을 사주한 것이다. 김일성 역시 석유를 얻으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왜? 안 보이니까? 카스피해에 묻혀있는 석유가 여기서 보이나? 거리가 멀어서 안 보인다. 정리하자. 하나의 사건은 작용측과 수용측, 원인측과 결과측, 입력측과 출력측 두 포지션을 가지며 전자는 연역 후자는 귀납이다. 둘 사이에 상대성이 성립하므로 한쪽으로 다른쪽을 커버한다. 그러므로 연역이나 귀납 중 하나만 택해도 된다. 그런데 귀납하면 2퍼센트 부족하다. 잘 나가다가 엉뚱한 데로 빠진다. 반대로 연역하면 아예 시작을 못한다. 안 보여서 기준도 못 찍는다. 귀납하는 이유는 연역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귀납하더라도 귀납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연역으로 바꿔줘야 하며 전환을 못하면 실패다. ‘아빠 어디가’에 나오는 윤후는 3분만에 수영을 배웠다. 연역했기 때문이다. 수영을 못하지만 아빠가 처음부터 물에 빠뜨려버린 것이다. 귀납으로 3개월 걸리는게 연역은 3분 만에 된다. 단 연역하려면 아빠가 있어야 한다. 아빠에 대한 신뢰도. 연역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서 안 하는 것이다.
자신이 귀납하고 있다면 반드시 옆에 연역할 것들이 얼쩡거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연역하려면 질을 잡아야 하는데 질이 안 보여서 못한다. 현미경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수학자들은 가정법을 써버린다.
걍 있다치는 거다. 수학은 연역이므로 어차피 연역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질을 못잡아서 연역을 못하면 그냥 X라고 써버린다. 이론에서 계가 유도되어야 하는데 계를 먼저 정하고 이론은? 걍 넘어간다.
생략하고 넘어간 이론을 세우면 대가로 인정받는다. 허수가 대표적인데 복소수계가 먼저 나온다. 이론은? 없다. 그런데 수가 선집합에서 면집합으로 올라서면 없던 허수의 포지션이 등장한다. 이 부분을 규명하면 이론이 된다. |
연역은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력부를 말합니다.
근데 병균은 너무 작아서 눈에 안 보이니까 모르는 거죠.
어쩔 수 없다는 말이지요.
결과는 눈에 보입니다.
몸에 열이 난다.. 감기인가?
두드러기가 난다.. 체했나?
오한이 든다.. 몸살인가?
이런 결과측을 보고 판단하는건 귀납입니다.
현미경으로 검사해보고 바이러스를 발견하는 것은 연역입니다.
연역해야 하는데 현미경이 없어서 불가능한 거죠.
조선시대에는.
연역과 귀납이 바로 이런거였군요
연역이란 원인을 알고 결과를 설명하는 거고, 귀납은 원인을 모르고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정하는 차이가 있겠져
그래서 연역은 완벽하지만 귀납은 늘 불완전하겠죠...
귀납은 감각적 현실적이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가능하다. 당장 실험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격급한 분들이 실험과학자가 된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역은 반드시 원인을 알아야 물리적으로 가능하다. 원인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알아내기 어렵다. 오로지 이론을 통해서만 터득이 가능하다.
원자를 과학자들이 어떻게 발견했을까? 물리적으로는 절대 원자를 발견하지 못한다. 오로지 이론적으로만 원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대 데모크리토스부터 근대 돌턴까지 원자론은 계속 이론으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었고..물리적 실체를 보여주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외면 당한 거다.
드디어 20세기 아인슈타인이 브라운운동으로부터 원자의 존재를 실증하여 원자가 현실적인 존재로 등극한다. 연역법이 완성된 순간이다. 이렇게 연역은 당장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먼저 선각자가 원인을 이성으로 선험적으로 상상해 내야한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하고 실험을 반복하여 드디어 그 상상의 산물이 실제함을 실증한다. 이렇게 연역은 늘 이론이 먼저 선행하는 거다. 그래서 세계관이 필요하다. 연역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유에 대한 소견
실수는 존재를 표현하는 양이고, 허수는 가능성을 표현하는 양이죠
복소수=존재의 양+가능성의 양
예를들어 한 젊은이를 복소수로 표현하면
젊은이=체중, 키(존재의 양으로 실수로 표현가능)+그의 능력, 가능성(미래에 발휘된 양으로 현재 존재하지 않기에 가짜수 허수로 표현)
이런 의미입니다.
복소수는 전자기학에서도 사용하는데
실제 전자회로를 흐르는 전류는 실수로 측정이 가능하지만
전자파는 실제로 전기회로를 흐르는 전류가 아니기때문에 실수로 측정이 안되죠 그렇다고 그 전자파가 회로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 값을 허수로 표현하게 된 겁니다.
전기회로 전체의 전류값(복소수)=실제 회로에 흐르는 전류값(실수)+전자파에 의한 전류값(허수)
복소수가 없었다면 오늘날 같은 스마트폰의 시대는 없었을 겁니다.
수학 포기했던 사람인데
이 글을 읽으니 수학이 쉽고 재밌게 느껴짐.
우리의 수학교육은 수학포기자를 양산하는게 목표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의미를 모르게 어렵게 만들어 가르치죠
수학을 모르면 노예근성이 서서히 머리를 점령합니다.
수학포기자를 벗어나서 세상의 자유로운 주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수학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는 운동을 하고 있읍니다. 그게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선의 길이니까요
한국의 수학교육은 나쁜 수학을 가르친다. 나쁜 수학은 귀납적이다. 구체적인 수학문제를 풀어봐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좋은 수학은 연역적이다. 구체적으로 문제풀이를 할 이유가 없다. 왜냐면 원인을 알고 결과를 알며 이론을 완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수학 문제는 그 이론안에 다 들어 있다. 구태여 문제를 풀어보는 수고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수학교육은 이론은 가르쳐주지 않고 연역법은 가르쳐주지 않고 귀납적으로 문제풀이만 반복시킨다. 그러니 수학포기자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감합니다. 현재 교육은 선생님들도 원리를 모르고 암기해서 가르치니까요 ㅎㅎ
연역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