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안을 보는 것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밖을 봤을 뿐이다. 모든 좋은 것은 내부에 있다. 모든 문제는 내부에서 일어난다. 모든 해결책은 내부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한사코 밖에서 답을 찾는다. 불화가 일어나면 불화의 신이 다녀갔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다. 하느님께 기도를 하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인이다. 언제나 외부의 해결책을 제시할 뿐 내부를 수술하지 않는다. 원인이 밖에 있을 때도 있다. 바람은 밖에서 불어온다. 그러나 그 바람은 고기압의 중심에서 격발된 바람이다. 관측자의 밖을 봤을 뿐 객체의 안을 보지 않았다. 총에 맞은 사람의 밖을 봤을 뿐 총을 쏜 사람의 안을 보지 않았다. 결과의 밖을 봤을 뿐 원인의 안을 보지 않았다. 총에 맞은 사람은 결과다. 총을 쏜 사람이 원인이다. 피해자 밖의 가해자를 봤을 뿐 가해자의 내면은 보지 않았다. 인간이 무언가를 봤다면 밖을 본 것이다. 안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봤다면 겉모습을 본 것이다. 안을 보려면 옷을 벗겨야 한다. 옷을 벗겨도 안의 겉을 본 것이다. 수술을 해도 혈관이나 근육의 겉을 본 것이다. 안에는 압력이 걸려 있다. 물속에서 수압을 느꼈다면 안을 봤다고 할 수 있다. 육체는 겉이고 마음은 안이다. 마음에는 압력이 걸려 있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압력 차이다. 알고자 하는 것은 변화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를 격발할 수 없다. 그것은 열역학 법칙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변화가 증폭될 뿐이다. 멈춰 있는 총알은 원인이 아니고 움직이는 공이가 원인이다. 움직이는 방아쇠가 원인이고 움직이는 손가락이 원인이다. 계속 추궁하면 움직이는 뇌세포에 도달한다. 궁극적으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원래부터 움직이고 있다는 진실에 이른다. 존재는 궁극적으로 유체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강체다. 강체는 유체가 교착되어 나란한 것이다. 강체로 보일 뿐 우주 안에 강체는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외력의 작용에 맞서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 작용의 액션에 액션으로 맞서 반작용을 일으켜야 존재가 증명된다. 알맹이를 봤다면 역시 알맹이의 겉을 본 것이다. 내부에 숨은 액션을 봐야 무언가를 본 것이다. 알맹이를 봤다면 알맹이의 하드웨어를 본 것이다. 하드웨어는 밖이고 소프트웨어가 안이다.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을 본 사람은 미처 보지 못한 사람이다. 내부에 숨은 질서를 봐야 한다. 압력을 보고, 4차원을 보고, 동動을 봐야 한다. 닫힌계를 보고, 축의 이동을 보고, 밸런스의 복원력을 봐야 한다. 방향을 보고, 관성을 보고, 의사결정구조를 봐야 한다. 내부에 꽤 많이 있다.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아무것도 없다. 닫힌계가 깨져서 생장점의 압력이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안에는 중심이 있고 중심은 하나다. 둘을 보면 내부를 본 것이 아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 행복? 욕망? 성공? 꿈? 희망? 여럿은 안이 아니다. 뇌는 하나인데 팔다리는 여럿이다. 여럿을 봤다면 주변을 본 것이다. 안의 안을 본 사람은 인류 중에 없다. 그러므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를 본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을 바라본다. 집단의 크기가 천하단위인지, 국가단위인지, 가족단위인지, 개인단위인지, 지금 이순간의 말초적 감각이 전부인지가 다를 뿐이다. 군자는 대집단에 속하고 소인은 소집단에 속한다. 언제나 연결의 중심을 본다. 중심에는 압력이 걸려 있다. 뒤에서 미는 것이 진짜이고 앞에서 당기는 것은 껍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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