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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807 vote 0 2023.12.23 (20:15:04)

    생텍쥐페리는 곤란해졌다. ‘양은 상자 속에 있어.’ 궁여지책이다. 어린왕자는 더 이상 양을 그려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속임수가 통했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물질은 생텍쥐페리가 그려준 상자다.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원자는 상자 속에 든 양이다. 양의 그림은?   


    물질설과 원자설은 ‘거시기’와 유사하다. 세상은 거시기로 이루어져 있어. 틀린 말은 아니다. 그 거시기가 무슨 거시기인지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이와 유사한 생각으로 창조설과 진화론이 있다. 창조설은 '답은 상자 속에 있어. 그 상자의 이름은 신이야.' 하고 생텍쥐페리 기술을 쓴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뭔가 대답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말장난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창조설이 강력한 힌트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의 근원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의미다. 창조설이 빅뱅이론과 유사한 점이 그러하다.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질문은 두 가지를 묻고 있다. 첫째는 무엇이고 둘째는 이루어짐이다. 창조설은 무엇에 대답하지 않는다. GOD라고 씌어져 있는 상자를 가리킬 뿐이다. 이 물음의 숨은 전제인 이루어짐에 대해서는 확실히 대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창조설에 매료되는 이유다.


    진화론이 진실을 말한다. 다만 다윈의 돌연변이설은 반만 맞다. 생명은 DNA의 복제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의 근원이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과학자들은 자연선택설의 오류를 알면서도 종교세력에 진화론을 공격하는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쉬쉬하며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원인이 둘이면 우연이고 하나면 필연이다. 원인이 둘이면 우연히 주사위의 특정한 눈금이 나오고 원인이 하나면 특정한 눈이 나올 때까지 주사위를 던진다. 변화의 동력이 메커니즘에 내재한다. 진화론을 참고하면 세상의 이루어짐을 끌어내는 동력은 근원의 하나에 내재해 있다. 내인설이 옳다.


    옛날 사람의 대답으로는 사원소설과 음양오행설이 있다. 사원소설은 원자설과 충돌한다. 네 가지 원소는 고유한 성질이 있다. 원자는 그 성질이 없다. 원자설은 외인설을 따른다. DNA 내인설을 따르는 진화론과 결이 맞지 않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물질과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 둘을 한 바구니에 담는 생각이 원소설이다. 원소설은 근대과학에 의해 폐기되었다. 그렇다면 원소설이 담당하던 성질은 어디로 갔나?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잊어버렸다. 중요한 핵심을 뭉개고 있다.


    물질과 성질, 곧 무엇과 이루어짐을 한 바구니에 담는 원소설 아이디어가 폐기되고 물질설 하나만 남았다면 성질설은 누가 가져갔을까? 없다. 아무도 이 부분을 말하지 않는다. 그냥 뭉갠다.


    굳이 말하자면 사원소의 고유한 성질, 음양오행의 여러 성질은 에너지가 가져갔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원자와 에너지로 되어 있다. 둘을 결합하는 제 3의 이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양자역학에 의해 원자설은 깨졌다. 에너지는 생택쥐페리의 상자와 같다. 역시 얼버무리는 말이다.


    이상하다. DNA는 명쾌하게 생물의 진화를 설명한다. DNA 일원론이자 내인설이며 필연설이다. 물질도 되고 성질도 된다. 그렇다면 세상의 근본은 역시 물질도 되고 에너지도 되는 그 무엇이 아닐까? 이 물음에 답한 사람은 인류 중에 없다.


    이루어짐 - 무엇
    성질 - 물질
    내인 - 외인
    필연 - 우연
    일원 - 이원


    성질설과 물질설, 내인설과 외인설, 필연설과 우연설, 일원설과 이원설 중에서 우리는 답을 내야 한다. 진실을 말하자. 세상의 근원은 육체도 되고 영혼도 되는, 하드웨어도 되고 소프트웨어도 되는, 물질도 되고 성질도 되는, 부름도 되고 응답도 되는, 공도 되고 색도 되는, 문법도 되고 단어도 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메커니즘에 내재해 있다. 그것은 필연이다. 그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만약 둘이면 둘을 결합하는 제 3의 논리가 필요하므로 양파 껍질을 한 번 더 까고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근대과학의 세 가지 성과는 빅뱅이론, 진화론, 양자역학이다. 빅뱅이론은 하나의 근원을 말하고, 양자역학은 물질과 성질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고, 진화론은 물질과 성질이 하나로 통합되어 작용하는 예시다. 원자설은 이 세 가지 근대과학의 성과와 충돌한다.


    그런데 왜 원자설이 각광받을까? 사원소설은 원소가 넷이다. 원자는 하나다. 원자 개념이 하나의 근원과 통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창조설이 각광받는 이유와 같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존재의 근원이 하나라는 사실을 직관한다. 그러나 논리가 아니라 느낌이다. 진지하지 않다.


    문제는 하나의 근원에서 많은 원자가 어떻게 갈라져 나왔는지 그 이루어짐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화가 화석을 남기듯이 변화의 경로가 기록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원자설은 빅뱅이론과 충돌한다. 원자가 제안하는 것은 단위다. 단위는 변화의 단위다. 변화는 한 지점에서 일어난다는 점이 원자설에 반영되어 있다. 세상의 근원은 변화다. 동시에 원자는 불변한다.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


    1. 세상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
    2. 성질과 물질을 통합하는 일원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3. 변화는 한 지점에서 일어난다.
    4. 세상의 근원은 변화다.
    5. 인간은 불변을 본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그 무엇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통합이다. 존재론은 내부 원인에 의해 스스로 나타나는 자발적 변화다. 인식론은 인간에 의해 포착되는 불변성이다. 인간은 변화 속의 불변을 보는 방법으로 객체를 인식한다. 존재는 스스로 변화하지만 인간은 변화 속의 불변을 관측한다.


    세상은 널리 이루어졌다. 이루어짐은 변화다. 근원의 생각은 변화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불변을 통해서 변화를 추적한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변화와 불변을 동시에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일치다. 그것이 구조다. 진화가 화석을 남기듯이 만유는 하나의 근원에서 갈라져 나와 이루어졌으므로 경로가 기록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세상은 이루어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루어짐이 무엇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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