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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380 vote 0 2023.03.26 (12:28:19)

    이념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그 길밖에 길이 없다. 다른 모든 길은 봉쇄되어 있다. 인간에 의해 자의적으로 선택되는 이념은 가짜다. 인간이 긍지를 가지고 양심을 지키면 선택지는 극도로 좁아진다.


    지금 한국은 전방위로 답이 없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넘어 더 큰 세계로 가야 한다. 상대성을 넘어 절대성의 세계로 가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상대적인 속도조절 문제다. 진보가 속도를 높이면 좁아진다. 보수가 저변을 넓히면 개혁의 속도가 느려진다.


    지금 한국은 북중미일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외교 문제로 진보와 보수가 갈리고 있다. 이상하다. 왜 친일과 반일, 친미와 반미가 이념이 되었는가? 이웃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게 외교의 기본이다. 지정학적 이유로 판이 이상하게 짜여져서 본질에서 진보와 상관없는 것이 진보로 포장된다. 이게 다 전쟁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모든 수단을 잃고 막판에 몰리면 전쟁을 한다. 사태가 그 지경이 되었다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물리의 영역이다. 한반도가 하필이면 미일중러 4대 강국 사이에 끼어서 냉전의 교두보가 된 것은 재수가 없었던 거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씌워진 굴레일 뿐 우리가 추구하는 이념이 아니다.


    소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했다. 구조론은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견해다. 한반도를 떼어서 유럽 어디에 갖다 놓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과학으로 주술을 이기고, 문명으로 야만을 이기고, 지성으로 무지를 이겨야 한다. 그것이 이념이다. 과학과 문명과 지성은 절대성의 영역이다. 애초에 게임의 룰을 정하는 문제다. 진보와 보수는 게임의 진행 과정에 일어난 밸런스 조절의 문제다. 진보와 보수는 지적, 물적 생산력의 변화에 맞게 대응하면 된다. 새로운 미디어가 도입되면 진보가 힘을 얻는다. 신문과 라디오와 인터넷이 큰 역할을 했다. 라이플이 발명되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소총이 보급되자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지식이 보급되자 한국에서 민주화가 성공했다. 진보는 그러한 환경변화를 따라가면 된다.


    우리는 막연히 도덕을 논하고, 옳고 그름을 논하며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최종적으로는 물리가 답을 낸다. 공간에 갇히고 시간에 쫓기면 선택지가 없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필 지금, 하필 여기서, 하필 내가, 하필 그것을 해야 하는지로 범위를 좁히면 선택지가 없다. 언제나 궁지에 몰려 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이다.


    인류의 약한 고리가 있다. 그것은 생각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상호작용에 능할 뿐 생각하는데 약하다. 서로 자극하고 반응하다가 몰리게 된다. 집단의 에너지 흐름에 말려들어 위태롭게 된다. 생각을 잘하면 이길 수 있다. 남들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은 남이 벌여놓은 판에 뛰어들어 남이 해놓은 것을 마침표만 찍겠다는 식의 요령과 꼼수로 여기까지 왔다. 미국의 시장에 기대고 일본의 기술을 훔치면서 남의 것을 빌어먹다 보니 기초를 건너뛰게 되어 남이 받쳐주지를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남이 다 만들어 놓으면 판매는 할 자신이 있다는 김우중, 남이 개발해 놓으면 생산은 할 자신이 있다는 이건희, 남보다 더 빨리 할 수 있다는 정주영이 그러하다. 문제는 중국이 더 잘한다는 점이다. 일본이 하면 한국도 하고 한국이 하면 중국도 해낸다. 한국이 하지 않는 소부장을 일본이 하듯이 한국은 중국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야 한다. 중국은 독재와 획일로 가므로 한류는 그 반대로 가야 한다. 요령과 꼼수와 잔머리는 후진국의 따라잡기다. 인류가 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


    선진국 지위에 머무르려면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이 있어야 한다. 기술로는 안 되어도 생각은 앞서갈 수 있다. 서구는 기독교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중국은 도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은 섬나라의 한계를 버리지 못한다. 오직 생각의 열려있음에서만 우리가 모두 이길 수 있다. 서경덕의 문화 쇄국주의가 시끄럽다. 닫아거는 기술로는 만리장성의 중국을 이길 수 없다. 일본섬은 원초적으로 닫혀 있다. 우리는 오직 열려있음으로 닫혀있음을 이길 수 있다.


    문화강국이 되려면 많은 것을 공짜로 퍼줘야 한다. 일본이 한국 독자들이 애니메이션을 못 보도록 막았던가? 뒷구멍으로 일본 망가나 훔쳐보면서 말이다. 우리는 지리적으로 사방이 닫혀 있으므로 열 수밖에 없다. 그 외에는 길이 없다. 알아야 한다. 지정학적인 이유로 우리가 언제나 막다른 코너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닫힌 문을 여는 결정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을 먼저 열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문명과 과학과 지성 외에 그 어떤 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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