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고 했다. 생각하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임은 연결이다. 생각은 주체에 서서 객체를 연결하는 것이다. 연결하다 보면 일정한 경로가 만들어진다. 패턴의 발견이다. 사실 데카르트가 무언가를 알아낸 것은 아니다. 존재가 곧 상호작용임을 알아야 데카르트의 화두가 유의미하다. 데카르트는 뭔가 감을 잡은 것이다. 느낌이 왔다.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등가원리에 따라 모든 상호작용의 구조는 동일하다. 상호작용의 단위가 존재다. 단위가 있으면 연결이 있다. 단위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발견이 사유의 첫 번째 단추다.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데카르트는 '대칭 2와 축 1로 이루어진 3자간 상호작용의 단위가 있다. 그것은 사건을 연결하는 단위다.'고 말했어야 한다. 연결고리를 계속 추적하면 세상을 모두 알아낼 수 있다. 문제는 개소리다. 차는 있지만 탈 수가 없다거나, 비행기는 있지만 날지는 못한다거나, 밥은 있지만 먹을 수가 없다거나, 여자친구가 있지만 사귄 적은 없다거나 하는 식의 개소리를 척결하려면 연결단위를 제시해야 한다. 반 데카르트가 있다. 데카르트는 진리에 대한 가슴 떨리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야 한다. 반대편에 이죽거리기와 비아냥대기가 있다. 진리를 부인하는 반지성주의다. 그들의 특징은 연결고리의 부재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여친은 있는데 사귄 적은 없다는 식의 개소리 하는 자를 때려죽여야 한다. 의분이 끓어올라야 한다. 팔뚝에 힘이 들어가야 한다. 반지성주의 이죽거리기는 객체와 연결할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네까짓게 뭘 어쩔거냐는 냉소적인 태도다. 그들은 포기한 것이다.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달을 보았을 때 저 달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진리는 존재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존재는 연결되어야 완전하다. 차는 시동이 걸려야 완전하다. 악기는 소리를 내야 완전하다. 말은 대화가 통해야 완전하다. 연결단위를 알아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사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희미한 그림자는 봤다. 그것이 있기는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 수는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없다는 식의 궤변은 흔하다. 그것은 의미가 없다. 칼은 있는데 손잡이가 없다는 식이다. 그것은 칼이 아니다. 라디오는 있는데 방송국은 없다는 식이다. 그것은 라디오가 아니다. 의미는 사건의 전달이다. 의미가 없는 것은 존재가 없다. 연결되지 않는 존재는 부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