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다. 구조론은 정답이 있다. 많은 사람이 정답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낸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배울 자세를 갖추지 못 한 사람을 가르칠 이유는 없다. 어두워서 글자를 읽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왜 불을 켜지 않는가? 리더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다. 지성인이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다. 무리 속에 숨어서 묻어가려는 사람은 배울 자격이 없다. 그들이 진리를 포기하듯이 나는 그들을 포기한다.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다. 자극하면 반응해야 한다. 빛을 비추면 씨앗 속에서 고개를 내밀어야 한다. 지적 자극에는 지적 반응이 필요하다. 물론 애매한 경우도 있다. 그 경우는 정답이 있는 부분만 별도로 추출하거나 혹은 정답이 있는 문제로 바꿔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구하는 자세다. 진리가 없기를 희망하는 자는 상대하지 않는게 맞다. 도서관의 책을 다 읽겠다는 생각이라면 무리다. 도서관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기쁨을 떠올리자.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진리는 이 안에 있다.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고 말겠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수학은 정답이 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수학은 애초에 문제와 답을 대칭으로 설계하기 때문이다. 사건 속에서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고 수학이 감당할 수 있는 뼈대만 남기는 것이 구조론이다. 정답이 있다는 말은 절대성이 성립한다는 말이다. 절대성의 영역도 있고 상대성의 영역도 있다. 아날로그는 상대성이고 디지털은 절대성이다. 모든 아날로그는 디지털로 변환할 수 있다. 방향을 바꾸면 된다. 병아리가 껍질 속에 숨어서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면 안 된다. 상대성에 매력을 느낀다면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게 비겁한 짓이다. 도망치는 행동이다. 제힘으로 껍질을 깨고 빛 가운데로 걸어 나와야 한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진리 그 자체가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식물은 햇볕을 찾아 뻗어간다. 인간은 진리를 찾아간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그늘에 숨는 나무는 없다. 세상은 대칭이다. 대칭은 둘이다. 둘이면 상대성이다. 상대성이면 정답이 없다. 그 둘이 대칭시키는 라인은 하나다. 하나는 절대성이다. 절대성이면 정답이 있다. 대칭의 축은 그 둘을 잇는 라인과 대칭된다. 상대성은 대칭이고 대칭은 축이 있고 축은 대칭 그 자체와 대칭된다. 변화되는 것은 상대성이고 변화시키는 것은 절대성이다. 둘은 항상 같이 다닌다. 문제는 인간이 그중에 한쪽 일면만 보려고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