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기는 창의성의 적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창의력이 왕성했던 시기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장인들이 도제식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말이 도제식 교육이지 실제로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 몇 푼 쥐어주고 죽도록 부려먹는다. 제자가 조수 노릇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스승의 것을 훔쳐야 한다. 모르면서 일단 따라 해본다. 그런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방법은 이해하기 방법이다. 이해하기 방식은 도제식 수업과 반대된다. 교육의 방법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해하므로 창의가 실종된다. 박문호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데 구조론과 통하는 점이 있다. 현대에도 도제식 수업은 많다. 사법연수원이나 로스쿨에서 수사기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수사는 선배 검사에게 배워야 한다. 이건 좀 이상하다. 원래 검사는 기소만 하고 수사는 경찰이 하는건데? 의치한약수라는 말이 있다는데 의사나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 수의사는 도제식으로 배워야 한다. 예체능 분야도 마찬가지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 분야는 도제식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도제식 수업은 비용이 많이 든다.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로 붙어야 하기 때문에. Understand는 밑으로 들어가서 세우는 것이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위에 세워야 한다. 연역이냐 귀납이냐다. 구조론은 연역이다. 연역은 원본을 복제한다. 그대로 베낀다. 이해하기는 지식의 대량공급에나 쓰이는 기술이다. 창의성은 구조의 복제과정에 얻어진다. 이해하기는 구조를 풀어버린다. 감긴 실을 풀어낸다. 반대로 실을 감아야 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다. 우리는 뭐든 풀어버리려고 한다. 조립해야 실력이 향상된다. 자동차를 분해하기보다 조립할 때 더 뇌가 창의적으로 작동한다. 부족민의 셈으로 치면 지식은 3이다. 1은 자신과 대칭되고, 2는 객체가 서로 대칭되고, 3은 코어가 되는 중심에서 권력이 작동한다. 권력이 맥락이다. 3이 되면 4. 5. 6. 7. 8은 자동이다. 분해하는 과정에는 3을 느낄 수 없다. 한 쪽씩 차례대로 풀면 되기 때문이다. 조립할 때는 양쪽을 동시에 맞춰야 한다. 병뚜껑을 연다고 치자. 돌리면 된다. 이건 이해하기다. 한옥을 짓는데 목재를 하나씩 꿰맞추다 보면 마지막 하나는 끼울 수 없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무엇을 조립하든 조립할 수 없는 마지막 하나가 남는다. 이때 억지로 벌리고 욱여넣든가 본드로 붙이든가 해야 한다. 자연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창의성은 거기서 얻어진다. 반드시 상부구조의 개입이 있다. 비용이 많이 드는 도제식 수업이 최선은 아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 준다고, 무임금 공짜노동을 하겠는가? 다만 이해하기와 창의하기는 다르다. 구조론을 이해하려고만 하면 오른쪽 뇌로 들어와서 왼쪽 뇌로 빠져나간다. 문제에 답을 맞추려 들지 말고 문제를 출제해야 한다. 자신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 도구를 손에 쥐어야 한다. 조립할 때 조립되지 않는 하나가 남는데 그것을 먼저 장악하고 나머지를 채운다. |
창의하기는 동적으로 들린다.
이해하기는 이해만 하다가는
범죄자와 친구가 될 것 같다.
국민이 굥과 국민의힘을 이해 못하는 건은
뉴스로만 그들의 행적을 보니 분노가 쌓이지만 민주당은 여의도에서 맨날보니 분노가 약해지고 그러다가 범죄자와 동화된다고 할수 없지만 안된다고도 할 수 없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라면........
창의는 몸을 움직이고 뇌를 써서 새로운 것을 해보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그과정에서 새로운 방법과 지식을 얻는 것이다.
나는 너를 너무 이해하여 너의 아래에 서는 것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몸으로 붙히혀서 창의하는 것이 새로운 지식 발굴과 신세계를 탐험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결과물을 얻어내는 것이다. 움직여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