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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232 vote 0 2011.01.28 (00:30:21)

 

포지셔닝 게임의 역사

 

고대의 동원전

 

인류의 문명이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로 넘어왔다는 것은 우리 때의 상식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은 청동기가 없이 바로 철기로 넘어왔다고도 하고, 철기시대는 분류상 적절하지 않으니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더라.

 

우리나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철기시대라고 아는데 그 시대에 전쟁무기는 대개 청동제 무기가 사용되었다. 청동은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부유한 귀족 혹은 시민계급만 무장을 갖출 수 있었다. 그 시대에 사회는 무기를 가진 자와 무기를 가지지 못한 자로 완전히 나누어졌다. 고대 노예제 사회다.

 

베를린 올림픽 우승 부상품으로 받은 손기정옹의 그리스 투구는 아시다시피 청동제 투구다. 근래 발굴된 중국 월왕의 구천검도 청동검이고 진시황의 병마용갱에서 나온 무기들도 대부분 청동으로 되어 있다. 시대는 철기시대지만 철은 농기구로나 사용되었고 전쟁은 청동기로 했던 것이다.

 

병마용갱에서 나온 철제 무기 중에 철퇴가 있었다. 당시만해도 철을 야금하는 기술이 없어서 철은 도끼나 철퇴같은 둔탁한 무기만 만들었던 것이다. 용광로에서 나온 선철은 철사처럼 물러서 전쟁무기로 쓸 수 없다. 담금질을 반복하여 4퍼센트 정도의 탄소강을 만들수 있지만 강한 대신 잘 부러진다.

 

일본도로 잘 알려진 다마스커스검은 철을 여러번 접어서 만든다. 쇠를 두들겨 철판을 만들고 이를 반으로 접어서 불에 달구고 두들기기를 10여 차례 반복하면 2의 배수로 증가하여 수천겹의 부러지지 않는 명검이 만들어진다.

 

십자군 전쟁때 십자군의 무쇠 갑옷을 단번에 베어버렸다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검은 인도에서 수입한 특수한 철을 탄소강과 섞어 접쇠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무른 부분과 강한 부분이 겹겹이 쌓여 뛰어난 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개발된 기술이고 당시에 쇠는 악금(惡金)이라 해서 농기구로나 썼을 뿐이다. 대신 청동은 합금기술이 발달해서 월왕의 구천검은 2천년간 무덤 속에 있었으나 현대의 스텐레스 이상으로 훌륭하다고 한다. 이것 때문인지 중국인이 스텐레스를 발명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시대에는 청동이 귀했으므로 무조건 많은 병사를 무장시킬 수 있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었다. 청동으로는 대군을 무장시키려면 부유해야 한다. 전투력은 그다지 의미가 없고 무조건 재화가 많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집트와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백만대군을 호령하는 제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진왕 정이 중국을 통일할 때 마지막 호적수인 초나라를 격파하기 위하여 무려 60만 대군을 동원했다. 당시 중국 인구가 다 합쳐도 1400만에 미치지 못했음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숫자라 할 수 있다. 진나라는 기마민족과 접촉이 빈번했던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기마민족의 앞선 야금기술이 도입되었기에 우수한 청동제련기술로 대군을 편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숫자만 많으면 이겼다.

 

진왕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는 주로 외교술이 힘을 발휘했다. 장의와 소진이 연횡책과 합종책을 들고 유세하여 6국을 단결시키거나 혹은 분열시켰다. 무조건 숫자만 많으면 이기므로 외교동맹으로 숫자를 불리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심심하게 되고 국가 중대사는 유세가의 세치 혀끝에서 놀아났다. 전쟁사적으로 의미있는 전쟁은 없었고 총체적으로 답답한 시대였다.

 

트로이 전쟁도 겉으로는 아킬레스의 용맹과 헥토르의 영웅미가 빛을 발하지만 이는 음유시인 호머의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는 거의 외교전에 의해 결판났다고 한다. 그리스군은 아가멤농을 중심으로 외교술을 구사하여 대규모 동맹을 결성하는데 성공했고, 트로이 역시 주변의 작은 도시들을 묶어 동맹을 결성했다. 그리스군은 실제로는 트로이 성을 포위하지도 못했으며, 주변의 동맹도시들을 약탈하고 민간인을 학살하여 서서히 트로이를 약화시켰다고 한다. 무려 10년간이나 대치상태가 계속된 재미없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영웅담은 상당부분 지어낸 이야기고 그곳에 진정한 영웅은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당시 전쟁은 중갑병 밀집대형에 의해 주도되었다. 숫자가 많아야 이기므로 노예도 동원되곤 했는데 노예는 도망칠 것이 뻔하므로 창 한 자루만 주어 가운데 끼워넣고 방패와 검을 든 귀족들이 사방을 에워싸서 팔랑크스를 이루었다. 검을 쥔 갑사들은 달아나려는 노예의 목을 자르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전투의 요체는 가운데 끼어 있는 농민이나 노예가 도망가지 않도록 강한 대오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이집트에서는 최대 30겹의 두터운 팔랑크스 대형이 운용되기도 했다. 이들의 강한 대오를 격파하는 무기는 전차였다. 전차가 주력이 되는 것은 중국이나 이집트나 페르시아나 마찬가지였는데 만승천자라 해서 전차 만대가 있으면 황제였다. 오직 숫자로 결판나는 동원전 시대였던 것이다.

 


중세의 기동전

 

동원전의 답답한 전쟁은 서구에서는 알렉산더에 의해 깨졌고, 중국에서는 흉노 선우 묵특에 의해 깨뜨려졌다. 이 시기에는 기병이 전쟁의 주력으로 등장했다. 말은 빠르게 이동하므로 포위전을 구사한다. 중갑병들은 4.5미터가 넘는 긴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이 앞사람의 어깨너머로 나가있기 때문에 측면을 공격당하면 대응할 수가 없다. 중갑병은 포위되면 바로 전멸이다. 알렉산더와 묵특은 방향전환이 안 되는 제국의 멍청한 군대를 상대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중세의 특징은 봉건제도이다. 봉건은 지방까지 분할지배하는 것이며 이는 말과 등자의 사용에 의해 가능했다. 고대의 전투에도 말은 사용되고 있었지만 말이 끄는 전차는 시골까지 찾아가기 어려웠으므로 의미있는 봉건제도는 본격적인 기병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알렉산더 이전에도 기병은 있었지만 당시의 기병은 말 안장도 없었고 귀족 위주로 편성되어 기승술이 형편없었다. 하층민을 팔랑크스에 묶어놓고 귀족들은 폼나는 말 위에 올라 구경하고 있다가 여차하면 도주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봉건제도는 주나라의 건국과 관련되어 있지만 주나라 무왕이 800제후를 불러모아 맹세를 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면 주나라 이전에도 봉건적 주종관계는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봉건개념을 ‘분봉하여 건국한다’는 문자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겠고, 기병의 등장 및 철기의 사용과 함께 일어난 전면적인 사회상의 변화와 관련지어 보아야 한다.

 

고대사회는 노예와 시민으로 2원화 되어 있었는데, 말의 등장 및 철기의 사용과 함께 중간계급이 나타난 것이 봉건시대의 진정한 의미다. 청동기로 전쟁하던 시절에는 청동제 무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시민이냐 노예냐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말이 등장하고 철기를 사용면서 복잡해졌다. 청동기 시절에는 소수정예가 무장할 수 있었지만 철기시대는 누구나 무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봉건시대의 핵심은 중간계급의 대두이다. 고대 노예제 사회는 왕이 부대를 이끌고 지휘하면 그 뿐 중대장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 군대는 전투경험이 많은 베테랑을 우익에 배치하고 실력이 없는 신참이 좌익을 맡아 서로 상대방의 약한 좌익을 치며 빙글빙글 도는 형태의 우스꽝스런 전쟁을 했다. 포위, 매복, 우회기동에 의한 기습, 야간전투 등의 고급전술은 간헐적으로 있기도 했겠지만 사실상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편이었다.

 

당시는 장군 아니면 모두 병사였는데 장군이 되려면 아버지를 잘 만나야 되는 것이고 사병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하급장교가 되고 차츰 승진하여 장수가 되고 출세하여 장군이 되는 일 따위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소대장이 되어 사병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귀족끼리 모여 있거나, 혹은 기병이 되어 말 타고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스 시민들도 전쟁이 일어나면 갑옷입고 출전하여 싸우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목수일을 하거나 빵가게를 했다. 직업군인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간부의 역할은 따로 없었다. 스파르타인들은 평생 군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시민이었다. 성인은 모두 군인이 되는 스파르타에서 군인으로 출세하겠다는건 의미없는 거다. 합리적인 승진제도가 없었던 거다.

 

서구에서 이런 전통은 오래 계속되어 로마군의 경우 10년을 굴러먹은 베테랑이라도 그냥 베테랑끼리 모여서 편제되고 신병은 신병끼리 모여서 편제되는 편이었다. 사병은 여전히 사병이었던 것이다. 당시는 오래된 전우들과 같이 전투를 치르는 것이 좋다거나 혹은 동성애가 만연해서 애인끼리 붙어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 편이었다. 국군처럼 진급하여 신참을 졸개로 부려먹는 일은 없었다.

 

이런 답답한 구조를 깨뜨리고 사회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북방 유목민들이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이 아니라 그리스를 침략한 산악지역 마케도니아 야만인이었다. 알렉산더는 기병을 중시했는데 당시의 기병은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을 잘못타면 엉덩이가 박살나는 판이라 고도의 기승술이 있어야 했다. 페르시아군도 기병이 있기는 했으나 전투의 중심은 아니고 폼잡으러 온 귀족이 많았다.

 

말을 잘 타는 병사와 그렇지 못한 병사의 전투력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이는 팔랑크스 밀집대형과는 다른 개념이다. 밀집대형은 무장 정도가 승패를 결정할 뿐 병사들 간의 전투력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냥 창을 들고 묵묵히 전진하다가 앞에 구멍이 나면 뒷줄의 병사가 메우는 단순한 구조였다. 그리스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도 동맹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숫자만 많으면 이기니까 싸워서 이기기 보다는 대규모 동맹을 추진하여 싸우지 않고 이기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기병은 네살때부터 말을 타는 몽고사람처럼 오랜 훈련을 통해 단련되어야 했다. 그 때문에 베테랑과 신참의 전투력 차이가 크다. 그리고 말은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에 곧잘 흩어져 버리므로 중간에서 연락을 담당하는 장교의 역할이 막중해진다. 관우, 장비와 같은 뛰어난 지휘관 하나가 전세를 완전히 바꿔놓기도 하는 것이 기병이다. 그러므로 대규모 동맹은 불필요하고, 열심히 훈련하여 최강의 부대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이 후주와 북한-요 연합군이 맞붙은 고평전투에 참전했을 때 숙위장령이라는 낮은 계급의 장수에 지나지 않았다. 우군을 맡은 번애능장군이 겁을 먹고 도망치는 바람에 대오가 무너져서 거의 패배한 전투였는데도 조광윤이 불과 2천기를 이끌고 돌진하여 1만 명의 거란 기병을 단숨에 쳐부수고 북한-요 연합군을 섬멸하여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켰다. 하루 아침에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나중 왕위를 선양받아 송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

 

한국의 역대 장군들 중에 혼자 힘으로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인물로는 척준경과 이성계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대부분 막사에서 전략을 짠 지휘관이었을 뿐 야전에서 칼을 휘두르는 실전형 장수는 아니었다. 특히 척준경은 신분이 낮은 뒷골목 무뢰한 출신으로 낮은 계급의 병사였으나 임간 장군이 정주에서 여진족과 싸워 패주했을 때 혼자 힘으로 적장을 베고 추격해오는 적군을 막았는가 하면, 윤관 장군이 여진족에게 포위되어 주위에 10여명의 군졸만 남았을 때 단기로 돌격하여 적을 무수히 베고 윤관 장군을 구출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마침내 인종을 도와 이자겸을 제거하고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척준경은 여진과 붙었던 10여차례의 전투에서 매번 놀라운 전공을 세웠으며 전투력으로는 한국사 최강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에는 윤관의 여진정벌 때 거의 척준경 혼자서 싸운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거의 훨훨 날아다니는 솜씨였다. 그의 곁에는 적게는 10여기 많게는 100여기가 있었을 뿐 거의 혼자서 적장을 베어넘긴 것이다. 척준경에게 박살난 여진이 그 와중에 중국으로 쳐들어가서 북송을 정복하고 금을 건국한 것을 보면 척준경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척준경이 있었기에 금나라도 감히 고려는 침략할 생각을 못했다. 한국사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척준경을 TV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는 사실은 기이하다 하겠다.

 

이성계도 밑바닥에서부터 오직 개인의 능력으로 출세하여 마침내 국가를 건국한 인물이다. 척준경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한 두름씩 따온 장수라면, 이성계는 2천명에서 1만명 정도의 적은 군대를 이끌고 연전연승하여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장군이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과소평가되었을 뿐 장수의 지휘능력으로는 역대 최강의 실전형 장수이다. 그 외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1패를 기록했을 뿐 23연전승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많은 뛰어난 장군들이 있으나 대개 문무겸비의 유능한 지휘관이었을 뿐 혼전 중에 무작정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참외따듯 하는 야전형 장수는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 정기룡 장군이 임진왜란때 무패를 기록했으나 병법을 활용하여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고 불리한 지점에서는 싸우지 않았다. 철저히 이기는 싸움을 한 것이다. 반면 척준경이나 이성계는 아군이 패배하는 불리한 싸움에서도 혼전 중에 홀로 적진에 난입하여 장수를 구하고 적장을 베고 포로를 구해오며 전세를 바꿔놓곤 했다는 점이 다르다.

 

고대의 전투는 대부분 외교력에 의한 대규모 동맹군 편성이나 아니면 황제의 충분한 재화에 의한 인해전술로 결판났을 뿐, 단 한 명의 능력으로 전세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트로이 전쟁 때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죽였지만 그걸로 전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트로이의 목마 전술로 이겼지만 그것은 단 한 명의 뛰어난 능력에 의한 승리는 아니다. 오자병법을 쓴 오기는 76전을 싸워 무패를 기록했지만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 그다지 얻은 것이 없었다. 이쪽이 강하면 상대방은 대규모 외교동맹을 만들어 숫자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을 쓴 손무도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를 무찔렀으나 진나라가 초나라를 구원하러 오는 바람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숫자를 이기지는 못한 것이다. 싸우면 무조건 이기는 상승부대를 만들지는 못한 것이다. 이 점에서 고대의 전투와 중세의 전투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중세의 전투에는 징기스칸이나 티무르나 아틸라처럼 항상 이기는 장수도 나타나고, 로마군처럼 항상 승리하는 군대도 나타난다.

 

중세의 기동전이 고대의 동원전을 압도하는 이유는 중간 허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전투에는 장군과 사병이 있었을 뿐이나 중세의 전투에는 관우, 장비와 같은 중간급 장수들의 활약이 중요했다. 중국 북쪽 기마민족들은 오래전부터 십진법에 의한 편제를 두고 있었다. 로마의 백인대와 같은 백부장이 존재했던 것이다. 징기스칸은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으로 조직했는데 이 제도는 북방 유목민 세계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전통이었다.

 

기병이 등장한 이후 군대에 편제가 중요해지자 신분이동이 일어났다. 십호장은 공을 세워 백호장이 되고 백호장은 공을 세워 천호장이 되었다. 고대의 중갑병 밀집대형에서는 병사들이 어깨에 어깨를 맞댄 채 대오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공을 세우고 싶어도 구조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했다. 무조건 자기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용맹한 병사가 대오를 이탈하여 혼자 적진으로 뛰어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따오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봉건제의 진정한 의미는 중간계급의 탄생과 더불어 나타난 신분상승에 있다. 누구나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봉건제도다. 중세의 기사이야기는 모두 신분상승에 관한 이야기다. 장자상속제로 인해 거지가 된 차남들은 어딘가에 있을 공주님을 찾아 전공을 세워서 신분상승을 해야 한다. 그들은 말 타고 숲 속을 돈키호테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컴컴한 곳에서 산적당을 결성하거나 용병무리에 들거나 했던 것이다. 그것은 중세에나 가능한 일이었으며 고대사회에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다.

 

신분상승이 가능해지자 개인간의 능력차이가 부각되었다. 고대 그리스라면 개인간의 차이는 거의 없다. 스파르타군과 아테네군의 차이는 있으나 이는 집단간의 차이였지 개인 간의 역량차이는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병과 철기의 등장에 의해 사회는 완전히 재편되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송두리째 달라진 것이다. 신분질서가 복잡해졌고 일정한 범위 안에서 신분상승이 가능해졌으며 도처에 야심가들이 나타났다. 관우, 장비와 같은 개인의 능력이 중요시되고 영웅담이 전파되었다. 이런 시대를 처음 열어젖힌 사람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와 흉노의 묵특이었다.

 

알렉산더의 기병은 등자가 없는 원시적인 기병이었으나 페르시아군의 전차를 물리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전차가 회전반경이 커서 주로 직진만 하는데 비해 기병은 회전반경이 짧기 때문에 보다 조직적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전차가 오직 공격만 하는 돌파전을 할 수 있었던데 비해 알렉산더의 기병은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조직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차원이 낮은 군대가 한 차원 위의 군대와 붙으면 무조건 진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다리우스 황제의 페르시아 전차부대가 돌진하자 알렉산더군은 가운데를 비워놓고 양쪽으로 비켜섰다. 이건 가운데 끼어 있는 노예가 도망칠까봐 신경쓰는 고대의 중갑병 밀집대형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의 전투에서 대형이 깨지면 전멸인데 알렉산더는 스스로 대형을 깨뜨린 것이다.

 

알렉산더 방식의 비키기는 오직 훈련된 군대만 가능하다. 그리고 대형을 변화시키는 훈련을 하려면 반드시 소대장이 있어야 한다. 고대전투에는 소대장이 없거나 혹은 역할이 미미했기 때문에 대형의 변화는 없었다. 알렉산더군에는 소대장이 있었고 이는 북방 유목민 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알렉산더가 동방의 기마민족 영향을 받았으리란 것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농민들은 도주할 수 없으므로 무장한 병사가 위협하면 말을 듣지만 유목민은 말을 타고 달아나면 그만이므로 끔찍하게 말을 듣지 않는다. 유목민으로 군대를 편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대신 그만큼 유목민의 군율은 엄격해졌다. 농민이 실수를 저지르면 앞으로 불려나와 곤장을 맞고 다시 대오로 돌아가지만 유목민이 실수를 저지르면 바로 사형이다.

 

농민은 도망갈 곳이 없으므로 대장에게 곤장을 맞고 원한을 품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참아야 한다. 그러나 유목민이 원한을 품고 몰래 게르로 난입하여 복수를 한 다음 말을 타고 도망쳐 버리면 잡을 수 없다. 테무친은 형 벡테르를 죽이고 타이치우트 족에 쫓겨다녔으나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넓은 몽골 고원에서 말 타고 도망친 자를 잡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목민은 등 뒤에 적을 두느니 차라리 죽여서 없애버린다. 그러므로 사형 외에 다른 형벌이 있을 수 없다.

 

유목민은 약탈을 예사로 했으므로 다들 제멋대로여서 그만큼 규율이 엄격했다. 알렉산더는 소대를 두는 복잡한 편제와 엄격한 군율로 병사를 훈련시켜 대오가 흩어지고 모이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만큼 되었으며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전쟁을 선보였다.

 

다리우스 황제의 페르시아군이 전차를 돌격시켜 중앙을 돌파하려 하자 알렉산더군은 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홍해가 갈라지듯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전차는 한번 속도를 내면 멈출 수도, 방향전환도 할 수 없다.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고 사면에서 공격을 받아 바로 전멸했다. 이후는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페르시아군이 알렉산더에게 패한 것이나 한나라군이 묵특에게 패한 것은 군대에 중간 허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군은 여러번 알렉산더군의 헛점을 보았지만 지령을 내려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그들은 사전에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전투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전쟁의 복잡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뜻밖의 찬스를 보고도 방기했다. 그것은 연습되어 있지 않아서 구조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군에 포위되어 전멸할 위기에도 적군의 대오가 이동하면서 발생한 좁은 간격을 보고 재빨리 그 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런 점은 훈련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알렉산더가 돌격을 지시했는데 부하들이 ‘뭐야? 이거 아닌데?’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몇 초를 놓쳐버리게 된다. 전쟁의 승패는 한 순간에 결정된다. 알렉산더의 부하들은 그 1초를 놓치지 않을 만큼 훈련되어 있었다.

 

다리우스 황제도 당시로는 뛰어난 군략가였다. 문제는 작전을 사전에 전부 결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부하장수들에게 미리 지시를 해두었고 그것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었다. 이수스 전에서 다리우스는 페르시아군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알렉산더가 수비위주의 전술을 펼 것으로 예견하고 그에 맞게 부대를 배치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알렉산더군이 먼저 돌격해 왔다. 적이 움직이면 아군도 움직여야 한다. 숫적 우세를 이용한 다리우스의 절묘한 배치에 따라 알렉산더군은 사방에서 포위되어 전멸할 위기였으나 알렉산더는 아군을 포위하기 위해 적군의 대형이 움직이는 중에 생겨난 작은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찌르고 들어갔다. 전열을 돌파하여 다리우스 황제의 턱밑까지 치달았다. 황제가 도망가자 당황한 페르시아군은 그냥 도주하다가 학살되어 버렸다.

 

문제는 알렉산더가 적의 빈틈을 찾았을 때 알렉산더도 역시 빈틈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는 밀집대형을 위주로 했으므로 움직이면 반드시 틈이 생긴다. 그 틈을 찔러야 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황제가 사전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전술을 지시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더군의 빈틈을 보고도 대응하지 못했다. 그럴 권한을 가진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지휘관으로부터 재량권을 위임받아 임의대로 임기응변할 수 있는 중간허리 역할의 장수가 없었다.

 

차기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이 이렇게 저렇게 해야한다고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개 다리우스 황제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현장에서 임기응변할 수 있도록 반드시 전술적 유드리를 두어야 하는데 그들은 다리우스 황제의 중갑병 밀집대형처럼 꽉 짜인 대오를 주장하고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흩어져서 승리하는 방법을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다. 소수로 다수를 이기려면 반드시 흩어져야 한다. 물론 흩어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흩어지고 뭉치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만큼 중간 허리가 강화되어야 한다. 이는 충분한 훈련에 의해서 가능하다. 우리가 충분히 훈련되어 있다면 흩어졌다가 뭉치는 방법으로 양동작전을 펼쳐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충분히 훈련되어 있다면 흩어졌다가 뭉치는 방법으로 양동작전을 펼쳐 승리할 수 있다. 인터넷과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스마트폰이 우리의 개인화기이며 그 활동이 우리의 훈련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빠른 의사결정을 가능케 하므로 현장에서 임기응변하여 몰아주기를 할 수 있다. 이 경우 참여당과 민주당으로 나누어 두 개의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오히려 적을 곤란하게 한다. 적은 머리가 나쁘므로 두 개의 전선을 상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로 뭉친다면 오히려 적에게 타격목표를 제공하는 셈이 된다.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켜 적을 결집하게 하고 적을 이롭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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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이전에도 기병은 있었으나 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마찬가지다. 무조건 통합을 주장하는 것은 인터넷의 장점을 활용할줄 모르는 것과 같다. 페르시아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가졌지만 알렉산더가 적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 부대를 흩어놓았기 때문에 다리우스 황제는 좌익과 우익을 멀리 보내어 그들을 각각 상대하게 하였다가 정작 알렉산더의 정예부대에 돌파를 당했을 때는 좌우에 지켜줄 병사가 없었다. 전체적인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전차 옆에서는 숫적 열세를 당해 도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체적인 전력이 열세일 때는 더 흩어서 다수의 적을 분산시켜야 한다. 우리는 두 개의 전선을 구축하여 양동작전을 펼쳐 적을 혼란에 빠뜨려놓고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기동력으로 순식간에 뭉쳐서 단숨에 제압해야 한다

 

흉노 선우 두만은 세자였던 묵특을 버리고 다른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맏아들 묵특을 월지국에 사자로 보낸 다음 월지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묵특이 적국에 포로로 잡혀 죽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묵특은 운좋게도 살아서 도망쳐왔다. 두만은 자신이 아들을 배신한 사실을 감추고 짐짓 모른체 하며 묵특에게 1만명을 거느리는 대장의 직위를 주었다.

 

묵특은 신호용 화살인 명적을 가지고 1만의 부하 병사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명적을 쏘는 방향으로 활을 쏘도록 훈련시켰다. 묵특이 자신이 아끼는 명마를 향해 명적을 쏘자 머뭇거리며 화살을 쏘지 않는 부하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을 쳤다. 다음에는 자신의 부인을 향해 명적을 쏘았다. 역시 주저하는 부하는 바로 목을 베었다. 그 다음에는 사냥을 나가서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1만 기병은 한 명도 주저함이 없이 두만을 향해 활을 쏘았고, 묵특이 선우가 되었다.

 

묵특이 선우가 되자 동호가 흉노를 견제하려 했다. 동호의 왕은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했다. 신하들이 반대하자 ‘국가의 안위가 중요하냐 그깟 말이 중요하냐’며 반대하는 신하를 베고 천리마를 내주었다. 기사 살아난 동호의 왕이 이번에는 묵특의 애첩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묵특은 반대하는 신하를 베고 아끼는 여인을 내주었다. 그러자 동호의 왕은 묵특을 만만히 보고 변방의 영토 일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번에는 신하들도 눈치를 꿰고 그 땅은 변방의 쓸모없는 땅이니 땅을 주자고 했다. 역시 모두 베었다. ‘말이나 여인은 구하면 되지만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생명과도 같은 땅을 줄 수 있겠느냐.’고 꾸짖은 다음 군대를 몰고 쳐들어가서 동호의 왕을 죽이고 평원을 통일했다. 적이 가진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 신하도 베고 천리마도 내주고 여인도 내준 것이다. 물론 적을 제거하고 모두 되찾았지만. 묵특은 동호의 왕을 기만하기 위해 나약한 척 한 것이다.

 

이후 묵특은 동쪽의 동호를 정복하고 곧이어 서쪽의 월지를 정복한 다음 한나라로 쳐들어와 한때는 한 고조 유방을 포위하여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유방이 죽자 묵특은 유방의 부인 여후와 결혼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이다. 이후 한나라는 천리마를 수입하여 흉노를 토벌한 한무제때까지 60여년간 흉노의 신하를 자처하며 공물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징기스칸은 메르키트족 전사 300명의 습격을 받아 부인을 뺏기고 헨타이 산으로 도망쳤을 때 그저 자신의 목숨이 살아난 것만을 기뻐했다. 신의 도움 덕분에 살아났다고 여기고 감격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신을 위하여 맹세하며 오히려 의기양양해 한 것이다. 빼앗긴 부인은 잠시 맡겨놓은 셈 치고 나중 되찾아오면 된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냉혈한 태도는 삶이 곤 전쟁인 유목민 사회에 흔히 있는 것이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 자신이 아끼는 말을 쏘고, 부인을 쏘고, 아비도 쏘고 그 모든 것을 장래를 위한 투자로 여기는 것이다. 유목민 사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비장한 결의를 보여주어야 오히려 주위의 지지를 얻는 경향이 있다.

 

일본과 같이 고립된 지역에서는 대개 강자에 빌붙고 약자를 씹는 경향이 있지만 반대로 몽골 고원과 같이 사방의 트인 곳에서는 묵특과 같이 비장한 결의를 보여주는 장래성 있는 약자에게 붙어 강자를 털어서 그걸 나눠먹을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어려서 무수한 고난을 겪은 징기스칸이 불과 18살 애송이에 불과한데도 무리가 모여들어 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이다. 어리고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장래성이 있다는 식이다.

 

징기스칸 역시 묵특과 같이 부하를 파리목숨처럼 여기는 엄격한 군율을 시행했는데 유목민 사회에서 그것은 오히려 장래성을 보여주는 비장한 결의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자신의 목숨을 투자할만한 대상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농경민의 정서와 상반된다. 역시 군율을 엄격히 시행한 오기가 부하병사의 무릎에 난 종기를 빨아주자 그 소식을 듣고 병사의 어머니는 탄식했다고 한다. 장군의 정성에 감격한 아들이 전투에 목숨을 바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유목민은 다르다. 징기스칸의 부하들은 징기스칸의 엄격한 군율에 매료되어 얼마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징기스칸이 불과 3천명의 적은 숫자로 3만명의 대군을 동원한 토오릴 칸에게 쫓길 때 징기스칸은 100명의 결사대를 내보내 적진을 돌파하게 했다. 그들은 모두 죽었지만 대신 직전 깊숙히 뛰어들어 수천명의 적을 참살하였다. 그들은 징기스칸의 엄격한 군율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대의 전쟁은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서서 서로 상대방의 약한 좌익을 공격하며 제자리서 빙빙 도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전차가 출현하여 돌파전으로 밀집대형을 깨뜨리기도 했으나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기병을 날개로 붙이기도 했으나 기병은 저쪽 구석에 가서 적의 기병과 기병끼리 싸우고 있었다. 전쟁을 재미있게 만든 사람은 알렉산더다. 알렉산더는 지휘라는 것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다. 그 이전에도 지휘는 있었겠지만 전술사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다. 지휘한다는 것은 혼란을 조성해놓고 임기응변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소대가 편제되어 있어야 하고 공간이 폭넓게 벌려져 있어야 한다. 막연히 빽빽하게 밀집해 있어서 지휘할 것이 없다.

 

지휘한다는 것은 조직전을 편다는 것이며 이는 공격에서 수비로, 수비에서 공격으로 신속하게 전환한다는 것이며, 한편 부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협력플레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적은 숫자이지만 항상 먼저 공격하여 의도적으로 혼란을 조성한 다음, 적의 빈틈을 찾아 빠르게 찌르고 들어가서 단숨에 적의 지휘부를 궤멸시켜버리곤 했다. 이후 한니발에서 나폴레옹까지 이 전술은 답습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제공격하여 혼란을 조성할 줄 알아야 한다. 혼란을 두려워하여 일치단결, 강철대오, 대통합만을 주장하면 결국 고립되어 말라죽고 만다. 혼란을 두려워 하는 지휘관은 자격이 없다.

 

전쟁에는 세력전, 조직전, 돌파전, 기동전, 동원전이 있지만 유능한 지휘관은 이 다섯가지를 모두 구사한다. 그러나 사회사적으로 가장 유의미한 부분을 논한다면 중세의 전쟁은 단연 기동전이다. 말을 이용하여 빠르게 이동할 수 있기에 돌파도 조직도 유의미한 것이다. 진정한 봉건시대는 말의 등장으로 인한 기동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휘관의 능력과 병사의 기량만으로 압도적인 숫자를 이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상승부대가 출현한 것이다.

 

동원전은 병사만 있으면 되고, 기동전은 하사관이 있어야 하며, 돌파전은 장교가 있어야 하고, 조직전은 장군이 있어야 하며, 세력전은 황제가 있어야 한다. 이에 따라 국가형태가 결정된다. 기동을 하려면 움직여야 하는데 그 움직이고 멈추는 타이밍을 찔러주려면 누군가 신호를 해야 한다. 신호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사가 있어야 기동전이 가능한 것이다.

 

◎ 동원전 - 사병
◎ 기동전 - 하사
◎ 돌파전 - 장교
◎ 조직전 - 장군
◎ 세력전 - 황제

 

돌파전을 하려면 특정한 시공간의 한 지점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1천명의 병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뛰어난 장수가 있어야 한다. 삼국시대 여포의 부하였던 고순은 과묵한 사람이었다. 오직 고함소리 하나로만 7백명의 궁사를 자유자재로 다루었기로 그의 정예부대를 함진영이라 불렀다고 한다. 함진영은 여포의 정예로 조조를 여러번 사지에 몰아넣어 크게 명성을 떨쳤다. 나중 여포를 죽이고 장료를 얻은 조조가 여포 밑에서 장료와 함께 쌍벽을 이룬 고순도 얻으려고 의향을 물었으나 고순은 너무난 과묵한지라 끝내 아무 말도 안해서 열 받은 조조에 의해 목이 베어지고 말았다. 장료가 합비에서 손권의 대군 속을 불과 수십기로 무인지경 내달리듯 돌파하여 단번에 전세를 바꿔놓은 사실도 유명하다. 장료나 고순같은 뛰어난 장수가 있어야 돌파를 할 수 있다.

 

유능한 장수 하나가 전세를 완전히 바꿔놓는 일은 고대의 전쟁에는 없었다. 집단의 힘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 조명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차대전때 일본군은 하사관이 강하고, 독일군은 장교가 강하고, 미군은 장군이 강했다는 말이 있다. 일본군은 박격포가 주무기였으므로 박격포를 쏘는 오장인 하사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독일군은 전차가 주력무기였으므로 전차를 지휘하는 장교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미군은 아주 핵폭탄을 쓰는 판이니 핵무기의 사용을 결정하는 장군의 역할이 부각되는 것이다. 어떤 무기, 어떤 시스템을 쓰느냐에 따라 국가체제가 결정된다. 거기에 연동되어 사회의 신분제도가 변화한다.

 


근대의 돌파전

 

고대의 전투가 동원전만 한 것은 아니고, 중세의 전투가 기동전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은 그러하다. 이에 따라 돌파전은 근대의 전투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전차도 돌파용으로 쓰였지만 약하고, 역시 성곽을 파괴할 수 있었던 대포의 등장이야말로 돌파전을 설명하는데 적격이라 하겠다.

 

고대의 전투에서 돌파전을 해낸 사람이 있다면 패왕 항우다. 그는 인간의 능력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는 항우 개인의 특별한 능력이었을 뿐 다른 사람에 의해 모방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반화 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시대의 보편적인 특징은 아니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여포 역시 맹장으로 적진을 여지없이 돌파해 보였다. 조조는 여포와 야전에서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비와 동맹을 맺어서 배후의 연결을 차단하고 서서히 숨통을 조이는 방법을 썼다. 항우와 여포 모두 막판에는 패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돌파전이 중세의 전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돌파가 단순히 개인의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저 활을 쓰고 칼을 휘두르기만 해서는 결코 적진을 무인지경으로 누빌 수 없다. 돌파의 관건은 지휘력이다. 이는 1초의 짧은 순간에 몇가지 판단을 동시에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윈터스 중위는 빗발처럼 쏟아지는 적의 총탄을 두려워 않고 선두에서 지휘를 해서 존경을 받았지만 실제로 승리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빠른 승리의 요체는 판단력이었다. 아군이 20명에 불과하고 적군이 200명이나 되더라도 적군의 시선이 모두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그 1초의 헛점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것은 흐름을 읽는 동물적인 감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냥 무모하게 앞에서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읽고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며 예리한 눈썰미로 적의 약점을 순식간에 찾아내는 것이다.

 

여포가 단순히 힘만 센 무장이라는 일반의 인식은 소설의 잘못된 서술 때문이다. 그의 지휘능력은 탁월한 것이어서 여러번 조조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삼국지연의에는 여포가 장비나 관우와 힘대결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소설일 뿐 그 시대의 전쟁에서 장수가 바보같이 맨투맨 대결로 힘자랑 하는 일은 없었다. 소위 ‘일기토’라는 것은 관우나 두어번 한 것이며, 그것도 혼전 중에 일어난 일이지 그냥 그라운드 비워놓고 일대일로 싸우는 바보짓은 삼국시대에 없었다.

 

실제로는 장수의 능력은 지휘능력이며 이는 전투의 맥을 짚고 한 순간에 힘을 집중하는 능력이었다. 결정적으로 빠른 판단력이다. 적의 헛점을 찾았으면 1초에 여러가지 명령을 내리고 본인이 앞장서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 한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자가 승자가 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역량있는 장수의 특별한 능력이 소용되었다. 그래서 맹장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라운드 비워넣고 1합을 겨루는 바보같은 일기토는 없었다. 물론 초전에 싸움을 돋우기 위해 젊고 용맹한 병사를 내보내 일대일 대결을 벌이곤 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신경전이었을 뿐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양군이 대치한 상태에서 일본군 진영에서 젊은 장수 하나가 달려나와 일대일을 요청하였으나 대꾸도 않고 그냥 몽고병사 서너명이 에워싸더니 철퇴로 내리쳐서 때려죽여버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일기토 비슷한 것은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을 세우고 명성을 떨쳐 출세하기를 원하는 젊은 장수들의 힘자랑일 뿐이다.

 

항우, 여포, 관우, 장비 등은 뛰어난 지휘능력을 갖춘 사람이며 그들에게는 동물적인 승부감각이 있었다. 어디가 강하고 어디가 약한지 알고, 흐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자신이 가진 약간의 힘을 승부처에 집중하여 전세를 바꿔놓곤 했다. 결국 전쟁을 보는 눈과 빠른 판단력과 그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이었던 것이다.

 

지능이 떨어지는데 단지 힘만 센 장수는 절대 그런 승부감각을 보일 수 없다. 전쟁의 에너지를 몸으로 느끼며 연주자가 리듬을 타고 건반을 치듯이 그 에너지의 흐름에 올라타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스필버그는 윈터스 중위 역으로 지적이고 곱상한 이미지의 데미안 루이스를 기용했으나 실제인물 리처드 윈터스는 기골이 장대한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타고난 무인의 센스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스포츠 스타들도 대개 지능이 높다. 그저 힘만 센 마이크 타이슨도 있으나 뛰어난 스타들은 월등한 지능을 가진 것이 보통이다. 진정한 스포츠는 힘이 아니라 판단이기 때문이다. 강호동도 현역시절 높은 지능으로 일종의 속임수를 써서 이만기를 이긴 적이 있다. 힘으로는 정상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을 뿐 높은 지능이 있어야 정상을 밟을 수 있다. 돌파는 힘만이 아니라 집중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집중에는 밸런스와 타이밍이 절대적이다. 혼전이 벌어지는 중에서도 공간과 시간의 기운을 읽는 센서를 가동하여야 한다.

 

돌파전의 정석은 나폴레옹에게서 찾아야 한다. 포병출신의 나폴레옹은 대포를 다수 동원하여 일점포격으로 적의 한 지점을 부숴놓곤 했다. 중요한 것은 그 한 지점을 어떻게 찾아내는가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속도이다. 빠르게 행군하고 빠르게 개전하고 선제공격하여 적이 정신차릴 새가 없이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한바탕 휘저어 놓으면 적의 약한 고리가 드러난다. 그 지점을 집중 타격하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최근 한국의 프로야구도 수준이 높아지면서 전반적으로 빨라졌다고 한다. 투수의 볼 스피드만 빨라진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격도, 주자의 주루도, 모두 빨라졌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전쟁도 느긋하게 했다. 화려한 갑주로 무장하고 현란한 깃발을 내걸고, 대군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 일대에 널리 소문을 내고, 느릿하게 행군해 와서, 점심밥을 든든히 먹은 후에 서전으로 젊은 장수를 내보내 일대일을 한번 벌여서 한바탕 싸움을 돋우는가 하면, 장수들은 막사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천천히 전술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여유있는 전쟁은 나폴레옹에 의해서 박살이 났다. 전투의 요체는 신속한 공격에 의한 정면돌파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런 느긋함은 실제로는 숫자의 힘을 과시하여 적이 쫄아서 스스로 항복하기를 유도하는 겁쟁이의 전술인 것이다. 양쪽 다 실력히 형편없다면 먼저 숫자가 적은 쪽이 쫄아서 도주하고, 다음은 훈련되지 않은 부대가 쫄아서 도주한다. 적이 내분을 일으켜 자멸하기를 바라면서 요란하게 나팔불고 행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투가 계속되면 다들 악에 받쳐서 눈에 핏발이 서서 그런 여유를 잃게 된다.

 

직업군인들은 그런 요란한 절차를 두지 않는다. 몽고군은 약탈이 목적이고 전쟁이 본업이므로 그런 신경전은 귀찮다는 듯이 생략하고 바로 대군을 몰아 숨쉴틈없이 공격하여 끝장을 내버린다.

 

히틀러의 전격전도 돌파전의 좋은 예가 된다. 신속한 공격으로 적을 흔들어 놓고 현장에서의 임기응변으로 적의 틈새를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초전에 가능했을 뿐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돌파전의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돌파전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1초 안에 중요한 판단이 일어나야 하며 그러려면 현장에 있는 지휘관이 전권을 가져야 한다. 독일군은 너무 빨리 진격하는 바람에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대신 외교가 깨졌다. 쓸데없이 영국군과 미국군을 끌여들여 전쟁이 장기화 된 것이다.

 

히틀러는 서부전선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는 대신 영국과 미국을 자극하지 않고 대략 무마시켜 그들이 소극적으로 나오게 한 다음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를 이기려고 했다. 러시아가 히틀러의 진정한 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장군들은 너무 빨리 진격했다. 프랑스나 영국은 러시아의 슬라브족과 달리 같은 게르만권이다.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면서 같은 게르만족을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되는 것이다. 압도적인 전력의 우세로 적을 몰아붙인 다음 일정한 조건을 걸고 협상하여 그들이 더 이상 전쟁에 나서지 않게 묶어두었어야 했다. 그 때문에 히틀러는 중요한 고비에 머뭇거리다가 영국군과 프랑스군 30만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중대한 전략적 실수였다.

 

사실 히틀러에게는 환상이 있었다. 프랑스를 침략하여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면 프랑스와 영국과 미국의 자생적인 나치들이 소요를 일으켜 내부에서 협력해 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초반에 위력을 보여주되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고 적당히 해 두고 적의 내부혼란에 편승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하여 뒷문을 단속하고 진정한 적인 러시아를 치겠다는 것이다. 얼빠진 생각이었다. 침략은 나치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그건 혼자 생각이었고 위대한 게르만족의 단결이라는 구호는 먹히지 않았다.

 

실제로 미국 등에서 일부 나치들이 준동하는가 하면 독일군 편에 자원하여 참전하기도 했다. 김일성도 625때 남침하여 위력을 보여주면 남한 내부에서 호응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다. 모택동의 경우 그런 호응이 먹혔지만 그건 중국의 특수성이다. 징기스칸의 예에서 보듯이 땅덩이가 넓은 나라에서는 소수파가 비장한 결의를 보여주면 민중이 호응하는 경향이 있다. 중간에서 관망하는 자들이 소수파에 붙어서 다수파를 털어야 나눠먹을 이익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약자인 모택동에 붙어 부유한 장개석을 털어먹는 것이 낫지 가난한 모택동은 털어봐야 돌아오는 국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규칙은 한국과 같은 반도나 일본과 같은 섬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중국의 백만대군 숫자 속에 어물쩡 묻어가서 적당히 털어먹고 튀자는 생각은 작은 땅덩이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구데리안, 만슈타인, 로멜 등 히틀러의 맹장들은 초반에 상당한 재량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작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창의적인 전쟁을 구사하여 승리했지만 그들의 지나친 승리는 도리어 외교적 실패로 되어 나치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으니 부메랑을 맞은 셈이 되었다. 히틀러는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이 자신을 짝사랑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현실은 나치에 대한 냉담한 태도였다. 그렇게 된 것이 제멋대로 공격한 장군들 때문이라고 여겨, 장군들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모두 자신의 지휘를 따르게 했지만 창의적인 전쟁은 전선에 나가 있는 장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625 초반에 서울을 점령하고 며칠간 머뭇거린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전쟁에 승리하려면 적을 흔들어야 하고 그것은 동시에 아군을 흔드는 셈이 된다. 이때 헛점은 양측에 동시에 나타나지만 먼저 판단하고 결정하는 쪽이 승리한다. 이러한 판단과 결정은 현장에 있는 지휘관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적의 헛점을 보았다고 바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스피드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스피드는 의사결정의 속도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히틀러는 선조임금처럼 현장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수백키로 떨어진 후방의 벙커에서 지휘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돌파전은 오직 창의적인 전쟁에 의해 가능하다. 창의적인 전쟁은 사전에 승리의 공식을 정해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단 현장에서 부닥쳐보고 적을 흔들어놓고 빠른 결정과 스피드로 승리를 끌어낸다. 그러나 돌파전의 약점은 공격을 잘할 뿐 수비에 약하다는 것이다. 수비를 하려면 조직전을 해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켜야 한다. 사전에 정해진 대로 약속플레이를 해야 한다. 유능한 지휘관은 조직전과 돌파전 둘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다. 이때 조직전이 먼저고 돌파전은 나중이다. 먼저 약속된 플레이를 해서 적의 공격을 교착시킨 다음 헛점을 찾아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다.

 

잔다르크는 초반에 신속한 공격으로 재미를 보았으나 적이 지연작전을 쓰자 허무하게 되었다. 잔다르크를 따르는 농민군은 오합지졸이라 신속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겁을 먹고 도주해 버리는 판이었다. 농민군이 아무 생각을 못하도록 계속 움직여야 한다. 농민군은 다만 공격을 할 수 있을 뿐 수비를 할 수 없다. 수비는 조직전의 협력플레이에 의해 가능한데 이는 오직 훈련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조조는 황건적 출신의 정예 청주병을 써서 여러번 재미를 보았는데 이들이 용맹하기는 했으나 근본이 황건적 출신이라 통제되지 않았다. 이때문에 서주를 공격했을 때 대학살을 저질러 조조는 두고두고 오명을 쓰게 된다. 오합지졸은 빠르게 공격하는 기세를 유지해야 대오가 유지되고 그러지 않으면 반드시 흩어지고 만다. 기세를 얻으려 하다가 규율이 깨져버린 것이다. 이런 군대로 공격은 가능하나 수비는 할 수 없다. 수비를 하려면 전리품에 눈이 먼 오합지졸이 아니라 곧 죽어도 명령을 지키는 직업군인을 양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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