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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투병 파병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도 많지만 회의적으로 봅니다. 요는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할 것인가입니다. 일단 미국을 ‘형님’으로 인정했다면 끝난 이야기입니다. 주최측에서 요구하지도 않은 공병대를 보내서, 있지도 않은 예산으로, 시키지도 않은 노가다를 한다는건 어불성설이지요.

어떤 일이든 일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비전투병 운운은 순서가 아닙니다. 전투병파병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미국이 마지못해 비전투병이라도 보내달라고 하면, 미국의 대폭적인 양보를 받아낸 다음 그때가서 고려해볼 수 있는 사안입니다.

일단 파병을 결정했다면 비전투병 운운은 부질없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협상카드를 잃었기 때문에 협상자체가 불능일 겁니다. 비전투병이 미국측에 더 유리하다고 설득해보겠다는 주장도 웃긴 겁니다. 외교는 총성없는 전쟁입니다. 말로 설득해서 전쟁에 이겨보이겠다면 썰렁한거죠.  

파병을 어제 NSC에서 결정했다면 거짓말입니다. 파병은 오래 전에 결정된 것이고, 서둘러 발표한 것은 아마 부시와 회담을 앞두고 사전협상에서 뭔가 반대급부를 확보해놓고 확인도장을 찍어준 모양인데,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정석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노무현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여름 인기 올라가자 YS시계로 다 까먹었듯이, 재신임소동으로 지지도가 약간 상승하니까, 바둑에 비유하면 ‘손따라 두는..’ 악수가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파병을 않기 위한 수단으로 비전투병을 보낼 수는 있어도, 파병을 하기로 결정이 나버렸다면 차라리 전투병을 보내는 것이 낫습니다. 비전투병 파병은 전투병을 파병하지 않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을 뿐, 그 자체만으로는 경제적 의미도 없고 군사적 이익도 없는 얼빠진 짓입니다.  

서프의 입장은 일체의 파병반대로 가야 합니다. 하여간 저의 입장은 모든 종류의 파병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어이 파병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파병 안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전투병을 보낼수는 있어도, 파병한다는 전제하에서의 비전투병 파병은 명분도 실리도 잃는 머저리 짓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 논의의 본질은 파병여부가 아니라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할 것인가입니다. 파병결정으로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했다면 이미 게임은 끝난건데, 이미 명분을 잃었다면 실리라도 얻도록 전투병을 보내지 비전투병은 뭐하러 보냅니까?

서프의 좋은 시절은 갔다
노무현의 지지도가 떨어질수록 노무현을 독점하고 있는 서프라이즈의 주가는 올라갑니다. 지난 몇 개월이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고 ‘노무현의 길’을 가는 그가 예뻤습니다. 모두가 노무현을 버렸을 때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킨 서프는 그를 독점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서프의 좋은 시절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서프의 노무현’은 다시 ‘대한민국의 노무현’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아쉽지만 그가 원한다면 떠나보내야 합니다. 서프는 이제 그만 노무현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었지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직도 위화도 섬 위에서 회군할 방법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결정이라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회군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전진한다는 거 하나 뿐입니다.

모두가 노무현을 버렸을 때 우리는 끝까지 노무현을 지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설사 노무현이 우리를 버리고 회군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남아서 명을 토벌하다가 전사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저 혼자만이라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노무현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마법의 세 번째 주머니라도 남겨놓았는지 그 막다른 골목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내일 부시와 회담하여 어떤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낼지 모르나, 이런식으로 간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노무현 독트린’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저는 파병반대가 ‘노무현 독트린’의 하나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지지도를 제고하는 것도 아니요, 5년 임기를 무사히 마치는 것도 아니요, DJ가 햇볕정책으로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았듯이, 노무현 독트린으로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끝내 노무현 독트린은 나오지 않는다면 서프 독트린으로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식량도 버리고, 배낭도 버리고, 오직 탄창에 총알만 재워넣고 총검 꽂은 채 돌격하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했는데 그는 돌연 보급을 받아와야 한다며 진지를 철수하여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특검에, 신당에, 지지도추락에 이제는 오직 개혁의 외길을 가는 수 밖에 없도록, 노무현을 사즉생(死卽生)의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직도 사즉생의 방법 외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길이라도 알고 있나 봅니다.

설사 그렇게 사는 길이 있다 하더라도 ‘노무현 드라마’의 미학적 완성도는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설사 마지막 극적인 반전이 남아있다 해도 중간에 극장을 떠나버린 사람을 도로 잡아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공한 유비'가 되는 길은 이제 명백히 틀어졌고 '살아남은 조조'가 되는 길은 아직 약간의 가망이 있습니다.

노무현독트린은 없다?
재신임정국에 태도를 바꾸지 않은 정당과 언론은 없습니다. 오직 서프라이즈만이 일관된 길을 걸었습니다. 서프가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노무현은? 지금 국민투표가 무산되는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무산된다면?

정치인은 항상 결과를 예측하고 거기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뒤늦게 ‘일이 그렇게 될줄 누가 알았나?’는 식의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재신임이 무산된다면 최도술암초를 우회하기 위한 노무현의 깜짝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이 됩니다.

깜짝쇼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속타가 나와주어야 합니다. 파병이 그 후속타였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재신임은 통과되겠군요. 부시와 ‘형님 아우’ 하면서 러브샷이라도 한판 땡기면 금상첨화가 되겠습니다.

저는 좌파도 아니고 수구도 아닌 제 3의 길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인터넷과 개미의 길’입니다. 노무현에게 인터넷과 노사모는 우연한 행운이었는지 모르지만, 제게 인터넷과 서프라이즈는 우연한 기적이 아니라 예정된 역사의 항로였습니다.

어떤 새로운 붐에 발빠르게 편승하는 사람과 애초에 그 흐름의 가운데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국민참여! 좋습니다. 말로만 참여가 아니라 그 '툴'을 먼저 제시해야 합니다. 툴도 제공하지 않은채 말로만 ‘참여’라면 기만입니다. 그 툴은 인터넷입니다.

소수가 다수를 저지할 수 없다면, 참여가 아니라 희생이겠지요. 국민참여는 국민의 소수가 다수의 횡포를 저지할 구체적 수단을 가진다는 의미 외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설사 파병반대가 소수라도 다수를 저지할 수 없다면 '참여'라는 말은 떼야겠지요.

유시민의 신당참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개혁당 보다는 개미당을 원했습니다. 유시민, 노무현에게 인터넷은 길에서 우연히 금덩이를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그 흐름에 편승하고 그 이익을 취할 뿐 그 본질에 다가서지는 않습니다. 그 열매를 얻어갈 뿐 그 씨앗을 뿌리지는 않습니다.

노무현에게 노무현의 길이 있다면 서프엔 서프의 길이 있고 제겐 저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터넷의 길이고, 소수가 다수를 저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국민참여의 길이고, 인터넷 직접민주정치의 길입니다.

지금까지 인터넷과 노무현은 공생관계였습니다. 공생관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익은 공유할 수 있어도 고통은 공유할 수 없습니다. 파병저지 실패는 서프라이즈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저는 ‘그 한계의 끝’을 보고자 합니다. 일체의 파병논의에 반대합니다. 100년이 걸려도 인터넷이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싹을 틔우고, 스스로 성장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덧글..
이 글을 지지철회나 비판적지지로 보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정책의 문제는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 결정할 수 있지만, 철학의 문제는 원초적으로 그러한 판단의 대상에서 배제됩니다. 철학은 누가 대신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옆에서 거들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 파병을 하는가 마는가, 혹은 전투병을 파병하는가 비전투병을 파병하는가, 혹은 명분이 있는가 없는가 따위는 무의미한 논의입니다. 본질은 철학이며, 구체적으로는 ‘주도권’이며, 실질적으로는 한국의 주권을 희생해 가면서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입니다.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했다면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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