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짓는 사람과 부수는 사람이 있다. 짓는 사람은 집이 무너지면 다시 지으면 되지만 부수는 사람이 부순 집을 다시 부술 수는 없다. 짓는 사람은 계속 짓는다.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다. 부수는 사람은 수시로 멈춘다. 짓는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부술거리를 구한다. '멀쩡한 집아 무너져라.’ 하고 고사를 지낸다. 행여 집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거봐. 내가 뭐랬니. 내가 잘 안된다고 그랬지. 잘 될 턱이 있나?’ 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윤서인과 진중권의 심술행동이다. 그런 사람도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 우리가 그들을 존경할 필요는 없다. 생태계에 생산자도 있고 분해자도 있다. 우리는 생산자 역할을 맡았다. 생산자에게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분해자는 열등의식만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오기로 똘똘 뭉쳐서 이겨먹으려고 한다. 원래 짓기보다는 부수기가 쉽다. 이겨도 이긴게 아니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다들 쉬운 역할을 맡으려 한다는 점이다. 비겁하게도 말이다. 생산자는 나무처럼 덩치가 크고 분해자는 곰팡이처럼 몸집이 작다. 작은 것은 눈을 내리깔아서 보고 큰 것을 고개를 들어서 우러러보는 법이다. 뇌가 작은 소인배가 정치생태계의 분해자가 된다. 인간은 앞으로 못 가면 뒤로 가는 동물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짓을 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나 목적과 이념은 꾸며낸 거짓말이다. 에너지의 형편을 따라간다. 왜 부수는가? 부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짓는가? 남들이 못 지으니 내가 짓는 것이다. 정치판은 짓기와 부수기의 대결이다. 진보는 짓고 보수는 부순다. 공정한 게임은 아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어려운 역할을 맡고 비겁한 사람은 쉬운 역할을 맡는다. 고양이에게는 쥐를 잡는 쉬운 역할을 주고 강아지에게는 집을 지키는 쉬운 역할을 맡긴다. 동물이니까. 쉬운 역할을 맡고 의기양양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천상 곰팡이나 벌레의 무리다. 그들도 존재 이유는 있겠지만 우리의 대화상대는 아니다. 앞으로 못 가면 뒤로 가는게 인간이다. 허다한 이유를 들이대지만 진실은 하나다. 그들은 눈이 없어서 앞으로는 가지 못하는 존재다.
우리는 집을 짓는 자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좌절해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게 존재의 목적이니까. 인간은 언제나 상대를 이겨먹으려고 하지만 그건 프로그래밍 된 동물의 본능이다. 주최측의 의도는 다른 것이다. 동물의 본능에 낚이지 말고 신의 미션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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