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학이라고 한다. 왜 산학이라고 하지 않을까? 산수는 산이 수에 앞선다. 언어는 동사가 먼저다. 동작이 먼저 있고 그 동작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찍어주는 명사가 지정되는 것이다. 숫자가 모여서 셈을 이루는게 아니라 셈이 먼저 있고 그 셈의 도착점으로 얻어지는 값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셈의 출발점은 인간이다. 셈이 먼저냐, 숫자가 먼저냐? 근본적인 발상의 차이가 된다. 세상을 셈으로 보느냐, 숫자로 보느냐. 관계로 보느냐, 실체로 보느냐. 구조로 보느냐, 원자로 보느냐. 세상을 셈으로 보고, 동사로 보고, 관계로 보고, 구조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화살이 먼저 날아가고 과녁에서의 소식은 그다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한다. 날아가는 화살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과녁은 잘 보인다. 과녁을 먼저 보고 와서 그다음에 화살을 생각한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보이지 않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나 과녁을 보고 온 다음에는 이를 재현해야 한다. 화살이 날아가는 장면을 상상해야 한다. 사건을 재현하지 않고 단순히 눈에 띄는 순서대로 대응하는 것이 귀납의 오류다. 그냥 그게 먼저 보이니까 그것을 먼저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망한다. 결과를 건드리면 현장이 훼손되어 사건을 재구성할 수 없다. 범인을 잡을 수 없다. 현장을 보존하고 원인측에 서서 사건을 재현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관계가 실체에 앞선다. 세상을 관계로 보는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된다. 원자론이 세상을 고착된 고정된 숫자로 보는 관점이라면 구조론은 세상을 숫자들의 관계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것이 셈이다. 세상은 숫자의 집합이 아니라 셈의 연결이다. 셈은 비례를 반영한다. 자연수는 1에 대한 비례를 알아보기 쉽게 표시한 것이다. 비례가 활이고 그 활에서 쏘아진 화살이라는 셈이 과녁에 꽂힌 것이 숫자다. 색칠한 과녁은 자연수다. 색칠하지 않으면 정수다. 알아야 한다. 숫자 1은 지목된 사물 1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사람과 연결하는 라인이 1이라는 사실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짠 것은 고유하다. 설탕은 원래 달고 소금은 원래 짜다.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숫자도 고유하다. 1은 원래 1이고 2는 원래 2다. 다 정해져 있다. 이것이 원자론적인 태도다. 일본인은 원래 근면하고 중국인은 원래 지저분하다고 여긴다. 과연 그런가? 틀렸다. 인간은 주변과의 관계에 따라 근면해지기도 하고 게을러지기도 한다. 일본은 비가 많이 와서 목욕을 자주 하고 중국은 비가 안 와서 목욕을 못 하는 것이다. 산이 뾰족한 것은 물이 부단히 산을 깎아먹었기 때문이다. 산의 형태는 물이 결정한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원인이 객체 자체에 고유하지 않고 그 바깥에 있다. 외부에서 성질을 결정한다. 1이 변하면 2도 변한다. 그사이에 비례가 있다. 숫자를 보지 말고 비례를 봐야 한다. 자연에 고유한 것은 없고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성질이 결정된다. 밝은 곳에 두면 어두워 보이고 어두운 곳에 두면 밝아 보인다. 약한 곳에 두면 강해 보이고 강한 곳에 두면 약해 보인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단 것도 혀의 미뢰와 접촉하는 데서 일어나는 관계 때문이다. 관계는 외부와의 관계다. 관계는 외부의 환경에 따라 변하므로 인간의 판단에 혼선을 일으킨다. 닫힌계 내부에 집어넣어 관계를 고정시켜 보면 구조다. 관계는 상대적이고 구조는 절대적이다. 세상의 다양하고 상대적인 관계가 다섯 가지 절대적인 구조로 정리된다. 자연은 계 안에서 대칭과 축을 만들어 의사결정을 하는 방법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만유의 자궁이 된다. 파장이 컬러를 결정한다. 색깔이 숫자라면 파장은 셈이다. 빛의 파장이 날아가는 화살이라면 색깔은 과녁에 꽂힌 화살이다. 색은 원자처럼 고정되어 있다. 색상표에서 #FFFFFFF를 찾으면 무색이다. 그런데 가짜다. 사실은 빛의 파장이 있을 뿐 색상코드는 프로그래머가 임의로 정해놓은 것이다. 자연에는 색상표가 없다. 우리는 세상을 색상코드로 알지만 착각이다. 파장은 둘의 간격이다. 세상은 어떤 고유한 것의 집합이 아니라 어떤 둘 사이에서 간격의 변화로 이루어진다. 원자가 모여서 세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간격이 변해서 세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격을 조절해서 온갖 컬러를 연출할 수 있다. 다양성의 자궁이 되는 하나의 절대성이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 절대성을 통제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배의 키를 얻은 셈이다. 고대 로마와 바이킹은 범선에 키가 없어서 노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여러 명의 노잡이 간에 의견이 틀어져서 항해는 실패로 되기가 다반사다. 동양에서 키가 전래되어 한 명의 조타수가 범선의 키를 잡자 항해가 수월해지고 원양항해가 가능해져서 지리상의 발견이 일어났다. 키가 셈이라면 노는 숫자다. 키가 활이라면 노는 과녁이다. 하나의 키를 움직여 백 개의 노를 갈음하고 하나의 간격을 조정해서 백만 가지 칼라를 얻는다. 사람들은 다양성을 주장하지만 정작 그 다양성의 자궁 앞에서는 머뭇거린다. 용감하게 손을 내밀어 키를 잡아야 한다. 거침없이 항해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