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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조선일보는 왜 사실을 왜곡하는가? 왜 거짓말을 하는가? 그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 사람도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이유나 목적이 나름대로 있다. 조선일보는 언론인데, 왜 왜곡하고 거짓말을 하는가?』

『둘째, 이 대명천지의 세상에서 버젓이 거짓말을 하고 왜곡을 계속하는 짓거리 - 그것이 가능한게 어찌된 일인가? 거짓말과 왜곡을 계속하는 것이, 그것도 언론이 - 왜 무슨 이유로 가능한가? 그러고도 무사한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환경이나 요소는 무엇인가?』

왜 조선일보가 허위 날조를 일삼느냐구요? 그게 다 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에요.

중요한건 진실입니다. 저는 이렇게 질문하신 분께 이런 반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조선일보가 과연 사실을 왜곡하고 있을까요? 혹 오마이뉴스나 한겨레가 더 많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그렇다치고 언론사가 사실을 부풀려서 왜곡하면 안되나요? 님은 사실과 진실의 차이 정도는 알고 있나요?』

제가 정치하는 사람이라 치고.. 여기서 정치공세를 펴기로 한다면 『조선일보는 사실을 왜곡한다』는 일성으로 말을 시작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정치공세를 펴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건 진실입니다.

디지털조선을 방문해 본 일이 있습니까? 거기 기사에 달리는 쓰레기 같은 쪽글들 보신 적 있습니까? 『에구 미틴 넘들!』 하고 혀나 끌끌 차며 창을 닫아버립니까? 하긴 거기에 읽어줄만한 글이 있을 리 없지만요.

문제는 거기에 가득찬 쓰레기들도 인간의 배설물이라는 점입니다.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실이지만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옛날 황석영의 북한방문기가 생각납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놀랍게도 황석영이 본 북한에는 뿔달린 도깨비나 승냥이가 아닌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디지털조선의 저것들이 인간이 아닌 좀비나 괴수라고 여기기로 한다면 속은 편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단지 조선일보의 프리즘으로 사물을 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텍스트를 날조하지 않습니다. 팩트를 위조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독자들에게 영합할 뿐입니다. 그런 쓰레기를 원하는 시장에서의 수요가 있으므로 그러한 공급이 있는 것입니다.  

『천만에! 조선일보는 명백히 팩트를 위조하고 텍스트를 날조한다네』 하고 반론을 펴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은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언론의 자유』 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또 설사 그들이 날조하고 위조한다 해도 그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들이 허위사실을 보도하기 때문에, 우리가 안티조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때때로 조중동의 허위와 날조를 공격하는 것은 그 허위와 날조로 하여 우리가 입을 피해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이 언론개혁의 본질은 아닙니다.

물론 어리버리 진중권들은 다르게 생각하죠. 그들은 단지 조중동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기 때문에 비판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한겨레나 오마이뉴스도 허위사실을 보도해서 안된다고 주장하죠. 이런 식의 접근은 기본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공격하는 반언론적인 작태입니다.

언론은 루머도 보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판단은 독자가 합니다. 진실이냐 아니냐는 피아간의 공방과정에서 용해되는 것입니다. 물론 기자의 윤리도 중요합니다. 동아일보 오보사태와 같이 명백히 날조된 기사를 썼을 때는 응당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티조선의 본질은 아닙니다.

알아야 한다. 구라주필도 구라리 출신은 아니다. 조중동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단지 그들이 원하여 선택한 그들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언론의 자유는 그 보다 훨씬 더 위의 근원적인 가치입니다. 팩트가 사실이냐 조작이냐는 한차원 아래의 부수적인 논의입니다. 본말이 전도되어서 안됩니다.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패러다임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본질을 봐야 합니다. 일제 때는 친일하고, 전후에는 빨갱이사냥, 박통 때는 독재주구, 민주화 때는 전두환찬양, 이렇게 쭉 이어지는 흐름, 그 거대한 물줄기를 만든 밑바닥에서의 에너지원을 봐야하는 것입니다.

까놓고 말하면 한겨레나 오마이나 서프라이즈에도 많은 오보와 허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버스나 자동차라면 승객의 보호가 우선이지 차선위반 혹은 소소한 신호위반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곧잘 거론하는 조중동의 날조나 왜곡은 신호위반과 같은 지엽말단의 논의입니다.

아 물론 신호는 지켜야죠. 그러나 본질은 따로 있습니다. 승객의 보호가 우선이죠.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과속도 해야하고, 때로는 신호를 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운전자는 교통흐름의 유지가 생명이지 교통법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통법규에 집착한다면 이건 후진국스러운 논의에요.

어떤 사람이 독일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경찰이 도로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잡지 않고 있길래 항의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관의 답변이 이러합니다.

『저 사람도 사리분별은 하고 사는 성인인데, 다 큰 성인이 자기 판단 하에 하는 일을 내가 무슨 근거로 제지한단 말이오?』

어린이라면 당연히 교통신호를 강조해야겠지요. 그런데 어른입니다.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조중동의 보도가 왜곡이냐 아니냐는 저차원의 논의입니다. 물론 자라나는 중고교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학습입니다. 만약 님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두고있다면 조중동이 자행하고 있는 허위날조의 실상을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조중동에 쪽글을 다는 쓰레기들이 다 큰 어른들이라는 점입니다. 그 인간들 알 거 다 압니다. 바보라서 헛소리하는거 아니에요. 물론 걔중에는 바보가 많죠.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예컨대 박사 김동길이 하는 짓을 보면 바보가 분명한데 용케 대학교수까지 된 것은 또 무슨 조화란 말입니까?

언론은 보도가 생명이 아닙니다. 팩트는 재료에 불과합니다. 본질은 요리과정입니다. 희랍시대라면 광장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라면 아래로는 향교와 성균관이 있었고 위로는 삼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언론이었죠.

원래 3사에는 나이제한이 있었습니다. 꼰대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언론을 해서 안된다는 것이 그 당시의 사회적 합의였습니다. 예컨대 암행어사는 젊은 신예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집니다. 벼슬을 많이 한 영감이나 대감을 어사로 파견해서 암행어사가 되겠습니까?

변학도 『아이고 선배님이 여기에 웬일로 오셨습니까?』
이몽룡 『에구 들켜버렸군!』

이래가지고는 암행이 될래야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론은 일종의 암행어사입니다. 이몽룡어사는 나이가 스물도 안되는데 조중동어사는 몇 살이란 말입니까? 자 뭐가 잘못되었는지 대충 감이 오시지요! 이건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개혁의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개혁은 판을 깨고 판을 뒤집고 판을 새로이 설계한다는 것입니다. 룰을 바꾸는 거에요. 진중권스러운 팩트운운은 판을 깨지 않으면서, 기존의 룰을 인정하면서 그냥 용을 써서 골이나 한골 더 넣겠다는 식입니다.

한겨레는 죽었다 깨나도 조중동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싸움질로 붙어서는 선은 결코 악을 이길 수 없어요. 그러므로 룰을 바꿔야 합니다.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오보냐 날조냐는 피아간의 공방과정에서 용해되고 마는 지엽말단의 논의입니다.

조중동의 독자들도 알거 다 아는 성인입니다. 그게 허위라는거 몰라서 보는거 아닙니다. 그들이 무단횡단을 하는 것은 신호등을 못봐서가 아니라 어른이 작심하고 무단횡단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찰도 안잡는 거에요.

성인이라면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무단횡단 하다가 사고나면? 지만 손해죠. 조중동보다가 바보되면? 그것도 신문이라고 보는 지만 손해죠. 그런데도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조중동 독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이 되는걸로 철썩같이 믿고 있었어요. 근데 노무현되었죠. 조중동 안보는 네티즌들은 노무현 된다는 사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 대한민국 안에 두개의 전혀 소통되지 않는 다른 층위의 인간집단이 있는 거에요. 가공할 사태입니다.

언론개혁운동은 우회적인 국민계몽운동입니다. 바보에게 『너 바보야!』하고 알려주면 그 말 듣는 바보는 얼마나 기분나쁘겠습니까? 문제는 그 바보가 어린이가 아닌, 중고교생이 아닌, 제 인생 제가 사는 성인이란 점입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계몽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 조중동을 깨느냐?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이회창을 씹느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터무니없이 이회창을 숭배하는 어른 바보들에게 그들이 오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두개의 서로 소통되지 않는 인간집단이 있어요. 하나는 노무현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네티즌이죠. 하나는 그러한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조중동 독자이죠. 주도권 싸움입니다. 조중동 독자들을 이탈시켜 이쪽에 흡수하는게 아닙니다. 청소년이라면 몰라도 어른들은 그게 불능입니다.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그들이 오판하고 있을 때, 사전에 경고를 날립니다.

『니들 지금 오판하고 있어. 조금 있음 알게 돼.』

조금 있다가 결과가 나옵니다. 과연 그들의 오판임이 증명됩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니들 오판했다고 지난번에 경고했지. 지금 오판임이 확인되었지. 그러니 니들은 이제 찌그러져.』

이거지요. 신호등의 빨간불을 주지시켜 주는 것은 중학생 까지입니다. 어른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판임이 확인되면 주도권을 내놓고 찌그러져야 합니다.

조중동은 오보를 날립니다. 이건 전투에서 총알을 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왜? 자신있다 이거죠. 한번 붙어보자 이겁니다. 그들의 전술입니다. 우리가 조중동의 오보를 꾸짖는 것은 전쟁터에서 적군을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부시넘 『후세인 이 죽일 넘아. 넌 나쁜 놈이야!』
후세인 『부시넘아. 비겁하게 미사일 뒤에 숨지 말고 나랑 배치기 시합으로 결판내자』
김정일 『어? 배치기라면 나도 끼워줘. 나도 한 똥배 한다구.』

전쟁이 이런 식으로 결판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조중동을 꾸짖어서 바르게 인도하겠다는 망상을 가졌다면 어린애다운 치기입니다. 적군은 꾸짖어서 제압하는 것이 아니고 목을 따서 제압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보를 문제삼는 것은 아군을 경계하기 위함이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지 조중동을 회개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회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시장을 잃고 사라져갈 것입니다. 그러기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어쩌면 백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언론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며 거기에는 오보의 자유도 일정부분 포함됩니다. 한겨레의 오보는 피해가 적고 조중동의 오보는 피해가 크다는 차이 뿐입니다.(독자 수가 많으므로)

우리는 그들과 우리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장벽을 높이고 서로 소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에 갖혀 살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성 안에서 고립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할 것입니다.

독자들의 다수는 조중동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그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그들로부터 헤게모니를 빼앗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방법으로 거듭 그들을 패배시킬 것입니다.

독자들의 다수는 여전히 조중동을 선택하겠지만 역사는 우리를 선택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선택하고 인터넷이 우리를 선택합니다.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천만명이 콜롬부스가 틀렸다는 쪽을 선택했지만, 신대륙은 콜롬부스를 선택했습니다. 누가 승자입니까? 콜롬부스가 승자입니다.

갈릴레이는 지구가 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유럽인이 갈릴레이가 틀렸다는 쪽을 선택했지만 신은 갈릴레이를 선택했습니다. 누가 승자입니까?

물론 그들의 독자는 많고 우리의 독자는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여전히 패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훗날 승리한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돌아올 몫은 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싸움을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개혁은 최종적으로 사람을 바꾸고,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사람의 가치관을 바꾸고, 철학을 바꾸고 인생관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시점에서 종료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을 직접적으로 계몽할 수단이 없으며, 또 주제넘게 계몽을 시도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부입니다. 그들이 오보하고 오판할 때, 우리는 그 때마다 도장을 받고 사인을 받아 확인을 시킬 것입니다. 그들의 오판이 검증되는 시점에 가서 책임을 묻고, 헤게모니를 빼앗고, 운전자의 키를 돌려받고 대한민국의 운전대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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