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남는 것은 의미뿐이다 인생에서 추구할 것은 의미밖에 없다. 의미는 사건의 연결이다. 다음 선수에게 바톤을 넘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을 자랑한다.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키가 크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다. 남들이 비웃는다. 그것은 부모를 잘 만난 덕이다. 사실은 다들 은밀히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 교양있는 백인들은 알고 있다. 타 인종을 존중하는 것이 우월감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교양이 없는 사람들이나 ‘나 이뻐?’ 하고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다. 국민 밉상 나경원이 얼굴자랑을 한 적은 없다. 아니다. 매우 자랑하고 있다. 사진 찍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밉상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말이다. 노력해서 성공했거나 행복을 얻었다고 해도 태어날 때부터 우월한 것과 같지 않을까? 성공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와 운과 환경이다. 밝은 피부색과 높은 지능과 우월한 기럭지와 근사한 외모는 유전자가 결정한다. 부지런한 성격과 게으른 성격도 상당 부분 유전자다.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면 분위기 때문에 노력하게 된다. 성공은 노력 3, 행운 3, 환경 4다. 진실을 말하자. 우월한 신분을 자랑하거나, 우월한 지능을 자랑하거나, 우월한 외모를 자랑하거나, 우월한 성격을 자랑하거나 같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우쭐대는 트럼프 짓도 교양 없는 행동이다. 잘났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왜 그걸로 타인에게 말을 붙이지? 아는 사람들은 타인과 같다는 점을 어필한다. 너도 여행 좋아해? 나도 여행 좋아하는데 우리 서로 잘 통하는군. 취미와 기호가 같다는 것이 타인에게 말을 붙일 근거가 된다. 같으면 함께 하고 함께 하면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시너지 효과는 이전에 없던 것이므로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잘났으면 차별하고 차별하면 등 돌리고 떠날 빌미가 될 뿐이다. 우월함은 말하지 말아라. 선천적으로 우월하든, 후천적으로 노력하든, 공짜로 지갑을 주웠든, 일해서 지갑을 채웠든, 자수성가했든, 환경이 뒤를 받쳐줬든 다를 것은 없다. 그래서 어쩌라고? 말하지 말라. 자아도취에 나르시시즘에 왕자병에 공주병에 우월주의다. 교양 없는 행동은 친구와 멀어지는 단초가 된다. 그러므로 말 걸지 마라. 말하면 틀어진다. 단 하나 허용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식자랑이다. 손웅정은 말한다. 내 자식은 아직 월드 클래스가 아냐. 흥민이는 더 노력해야 해. 까맣게 멀었어. 겸손을 가장한 자랑이다. 자식자랑이면서 자기자랑이다. 누구도 손웅정을 비난하지 않는다. 손흥민은 손기정처럼 내달리면서도 자기 입으로는 자랑하지 않는다. 잘났다는 것도 잘했다는 것도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다. 내 성공은 자랑하고 싶지 않아도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고 싶다는 사실을. 챔피언이 되고 싶지는 않아도 챔피언 타이틀을 고국에 바치고 싶다는 사실을. 우승반지는 필요가 없지만 우승반지에 키스하면서 아내를 가리키고 싶다는 사실을. 그럴 때 관중은 다들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그 장면에서 누구도 질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 자랑은 밉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생은 그런 것이다. 성공한 인생은 없다. 미녀는 태어나면 성공이고 엘리트는 서울대 붙으면 성공이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부모가 물려준 유전자의 우월함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부는 자랑할 만한 것인가? 천만에. 둘은 정확히 같다. 날 때부터 성공하든 노력해서 성공하든 자질과 운과 환경 덕이다. 자질은 타고났고 환경은 받쳐준다. 그것은 자랑할 건덕지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어쩌라고? 그걸로는 타인에게 말을 붙일 수 없다. 나의 성공, 나의 우월, 나의 자랑을 내세울 수 없다. 분열의 단초가 될 뿐이다. 다만 자녀의 성공, 후배의 성공이라면 자랑하라. 미래의 성공을 위해 내가 길을 닦아놓았을 때는 자랑할 수 있다. 인수인계 해야하기 때문이다. 길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자들은 말한다.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야.' 노무현은 잘 생기지 않았다. 따르는 동료의원도 없었다. 세력이 없고 학벌도 없었다. 그러나 먼저 와서 문재인의 성공을 설계해 놓고 떠났다. 그것은 자랑할 만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만 하니까. 설계도가 있으므로 우린 거저먹기로 전진할 수 있으니까. 인생에 건지는 것은 하나뿐이다. 잘생긴 얼굴은 무덤에서 썩고 쌓아놓은 부는 먼지처럼 흩어지지만, 닦아놓은 길과 세워놓은 이정표는 천 년을 간다. 사건을 계속 이어간다. 세종의 영토확장과 한글창제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가는 것이다. 인간은 매트릭스의 파란 약을 탈출할 수 없다. 유전자의 노예, 본능의 노예, 무의식의 노예, 집단의 노예, 환경의 노예, 상호작용의 노예다.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혹자는 선천적 외모를 자랑하고 혹자는 후천적 성공을 자랑한다. 그래봤자 훌륭한 노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으켜 놓은 사건은 계속 간다.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문명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 그럴 때 말을 붙일 수 있다. 자랑할 수 있다. 함께 하며 의기투합할 수 있다. 찾아야 할 의리는 그 안에 있다. |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은 확률로 존재한다. 관측을 통해 생사가 결정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리고 나와 타인은 다를 수 없고 하나의 매트릭스 속에 존재하는 가능성의 연결이다. 원인이자 결과이다. 원리와 구조에 대해 고민했고, 흔히 말하는 깨달은 이후의 삶이 의문이었다.
의문이 한 고리가 풀렸다. 게임의 참가자가 되는가? 설계자가 되는가?
설계자가 되면, 어제의 잠재성이 오늘의 실재성으로, 내일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관리할 수 있겠다는 여지가 생겼다.
그리고 남는 것은 이를 이어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