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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820 vote 0 2019.04.16 (16:07:08)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축구를 한다면 골을 넣어야 하고 야구를 한다면 안타를 쳐야 한다. 답은 게임 속에 있다. 의미는 그 안에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게임을 이기는 것이다. 이기면 다음 게임으로 연결된다. 지면 끝이다. 그래서 인간이 얻는 것은? 없다. 얻어도 게임이 얻는 것이다. 


    나를 개입시키면 안 된다. 축구가 이기면 축구가 얻고 야구가 이기면 야구가 얻는다. 축구가 잘 되면 피파가 흐뭇하고 프로야구가 잘 되면 KBO가 행복하다. 내가 얻으려고 하고, 내가 보상받으려고 하고, 내가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미성숙한 어린이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니 사회적 본능이다.


    형들 앞에 자랑하려고 하고 선생님께 인정받으려 한다면 유치한 거다. 인생에 자랑할 것도 없고 보상받을 것도 없고 인정받을 것도 없다. 죽으면 흙이 된다.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걸로 끝이다. 이 사태를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남는 것은 타자성의 문제다. 나냐 남이냐다. 


    나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며 그저 불안감의 표현일 뿐이다. 나에 집착한다면 불안감에 휘둘리는 것이다. 생존본능이다. 생각하라. 내가 없으므로 남도 없다. 너도 없고 나도 없으므로 대신에 게임이 있다. 게임 자체의 치고 나가는 관성력이 있다. 진출할 게임의 다음 스테이지가 있다. 인간은 게임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이겨야 한다. 이겨야 다음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내가 이기는 게 아니다. 게임이 이기는 것이 진짜다. 당근과 채찍이 주어져 있다. 당근이 뭔가 보상받고 인정받는 것이라면 채찍은 죽음의 불안이다. 내 존재가 지워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불안하다는 말이지? 그 대상이 없다. 


    내가 없는데 뭘 걱정해? 문제는 남이다. 내가 없으면 없는 건데 남들은? 남들은 나 없는 곳에서 자기네들끼리 야밤에 뽀글이 끓여 먹고 있다면? 밤새 보초근무 서고 내무반에 돌아왔더니 지들끼리 뽀글이 끓여 먹고 시치미 뚝 떼고 잔다면? 이건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지는 현장이다. 내가 죽는 건 아무러나 상관없다.


    나는 지워졌는데 남들은 피둥피둥 잘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다. 부아가 치민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인간은 집단에 집착하는 동물이다. 사실 자기 죽음을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무리에서 멀어질까를 걱정한다. 개는 주인을 잃으면 무리를 놓쳤다고 여긴다. 개는 사람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무리에 충성한다.


    개는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이므로 어떻게든 무리에 남아있으려고 하는 것이며 무리에서 밀려나면 어쩔 줄 모르고 패닉에 빠지는 것이며 개가 사람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인간 위주의 사고다. 그거 착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무리에서 밀려나서 혼자 남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죽은 다음에 어쩔 줄 모르고 패닉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은 없기 때문에 어쩔 필요가 없다. 어쩌지 않아도 된다. 나는 죽어서 없게 되지만 남들이 있잖아? 아니다. 내가 부정되면 남도 부정된다. 그러므로 안심하라. 나 없이 남들은 지들끼리 희희낙락하며 잘 사는 일은 없다.


    만유는 복제된 것이며 복제된 것은 그림자이며 그림자는 지워진다. 대신 원본이 남아있다. 그것이 게임이다. 내가 지워지면 남도 지워지고 게임이 남는다. 반대로 우주가 존재하고 사건이 존재하고 게임이 존재하면 그 게임 안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결코 죽지 않는다. 원본은 죽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불멸의 나를 발견했는지다. 원본을 봤느냐다. 게임을 포착했는지다. 자신이 왕자로 태어난 사실을 모르고 거지로 산다면 바보짓이다. 원본을 모르고 복제본으로 산다면 비참하다. 나를 몸뚱이로 규정하면 복제본이 되지만 사건으로 돌아가 게임에 올라타면 원본이 된다. 진정한 나는 바로 그곳에 있다.


    내가 특별히 보상받고, 내가 남들에게 인정받고, 내가 남들 앞에서 우쭐대고, 내가 남을 주름잡으려 하므로 비참한 복제본이 되는 것이다. 나와 남은 동시에 발생한다. 내가 부정될 때 남도 부정된다. 나와 남을 통일하는 게임에 충실할 때 비로소 나는 완성된다. 원본이 되는 게임이 영원하므로 나는 영원한 것이다.


    축구선수라면 골을 넣고 야구선수라면 안타를 친다. 그럴 때 게임은 살아난다. 우주는 살아난다. 우주가 있고 신이 있고 사건이 진행하고 있으면 존재가 있는 것이다. 나를 앞세우면 인간은 벌레와 다름없다. 나는 짐승과 다름없다. 천하의 큰 사건 안에서 내 존재와 내 위치와 내 역할을 찾아 기능해야 마땅하다.


    천하가 나를 부를 때 내가 그곳에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역사의 한순간에 역사의 현장을 지켰는지가 중요하다. 부름에 응답하는지가 중요하다. 동료가 내게 패스를 했는데 내가 패스를 받았는지가 중요하다. 인간은 바둑판에 놓인 하나의 바둑알과 같다. 보상은 바둑알이 받아먹지 않는다. 이기면 한 판 더 둔다.


    그 계속되는 게임이 보상인 것이며 그 보상은 하나의 작은 바둑알에 지나지 않는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바둑알이 모여 게임이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중요하다.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되는 게 아니다. 너와 내가 모여 우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모여도 우주보다 작다.


    그 반대다. 우주가 먼저 있고 그것이 너와 나로 복제된 것이다. 바둑게임이 먼저 있고 여러 바둑알로 복제된 것이다. 시합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선수가 있다. 선수가 모여서 시합이 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주최측이 먼저 있고 사건이 먼저 있고 게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바둑알은 무한히 복제될 수 있다.


    바둑판의 사이즈를 키우면 된다. 그러므로 바둑알이 모여 바둑게임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모여도 덜 모였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여 국가를 이루는 게 아니다. 천하가 먼저 있고 사건이 먼저 있고 다음에 국가가 있다. 천하에서 내게로 바로 오지 중간에 국가를 거쳐 갈 필요는 없다. 천하와 나는 일대일로 만난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된다면 개인이 모여 가족이 되고, 가족이 모여 부족이 되고, 부족이 모여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여 세계가 되고, 세계가 모여 천하가 되며, 천하와 나의 거리는 까마득히 멀어져 버린다. 중간단계가 너무 많아서 복잡해진다. 나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내가 희미하므로 내 존재의 의미도 희미하다. 


    그러나 전체가 복제되어 부분이 되므로 중간단계는 필요 없다. 천하는 세계로도, 국가로도, 부족으로도, 가족으로도, 나로도 복제된다. 어떻게 복제되는지는 사건의 유형이 결정한다. 나는 개인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부족이기도 하고 국가이기도 하고 동시에 천하이기도 하다. 그것이 찾아야 할 대표성이다. 


    축구선수가 공을 놓치면 평범한 개인으로 남게 되지만 드리블을 해서 골키퍼를 제치고 빈 골대 앞에 서면 내가 곧 팀이다. 승부처에서는 한 개인이 우주 전체를 감당하게 된다. 내가 신이고 우주이고 천하이고 국가이고 왕이고 족장이다. 사건이 모두 결정한다. 인간은 그 사건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호흡한다. 


    수천억 개의 세포가 모여 생명을 이루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수천억 개 세포로 복제된 것이며 역할분담한 것이며 언제라도 하나다. 한 사람의 목숨이 한 우주의 목숨과 같다. 사건은 1단위로 움직이는 것이며 세포 숫자는 수학에 불과하다. 달걀은 세포가 한 개고 어미닭은 세포가 수천억 수조 개라 해도 같다. 


    의미나 가치를 나에게서 찾으면 안 된다. 바둑알 속에는 바둑이 없다. 바둑 속에 바둑알이 있다. 개인 속에는 의미가 없다. 의미 속에 당신이 있다. 의미는 원래 있었고 당신은 우연히 그 의미라는 배에 올라탄 것이다. 당신은 살든 죽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삶의 가치는 같다.


    백 살 산 사람이 6개월 산 사람보다 더 낫다고 할 이유는 없다. 아무런 차이도 없다. 어차피 게임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신에게 있고 우주에 있고 전체에 있고 완전성에 있다. 다른 것은 사건이다. 보수는 지는 게임이고 진보는 이기는 게임이다. 지면 끝나고 이기면 다음 게임으로 연결된다. 의미는 그곳에 있다.


    의미는 내게 있는 게 아니라 게임에 있고 의미 자체에 있고 나는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의미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패닉에 빠지는 생존본능,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학습본능, 무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회적 본능에 따른 원초적 불안을 극복한다면 진정한 게임이 시작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04.17 (05:03:37)

"~ 생존본능, ~ 학습본능, ~ 사회적 본능에 따른 원초적 불안을 극복한다면 진정한 게임이 시작된다."

http://gujoron.com/xe/108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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